'바라봄'과 '돌봄'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2015. 2. 23. 오전 6: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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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봄'과 '돌봄'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병 환자가 있습니다. 스스로 나병을 뒤집어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는 자신의 탓 없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치며 공동체 밖에서 죽은 듯 살아야 합니다 (레위13,45-46 참조). 어느 누구보다도 돌봄이 필요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나병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서서히 잊히며 죽음을 향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제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살갗에 생긴 병을 살펴보고 공동체에서 격리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누군가 다 나았다고 찾아오면, 다시 살펴보고 공동체에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저 율법에 충실하게 나병 환자를 바라볼 뿐입니다(레위기 13장 참조).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뭇사람들은 스치는 눈빛조차 거두었던 나병 환자의 뭉크러진 몸을 정성껏 어루만지십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신 바는 한 사람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습을 닮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음의 늪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한 치의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율법 준수보다 생명 살림을 선택하십니다. 피붙이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을 피눈물 삼키며 지켜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신(物神)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 하루아침에 일터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짓밟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가운 시선과 험악한 비난을 온 몸으로 맞으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다운 삶을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돈과 불의한 권력에 오염된 세상이 덮어씌운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온 삶이 파괴당하는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구약의 사제'가 될 것인지, '제2의 예수'가 될 것인지 피할 수 없는 선택을 맞닥뜨립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곱게 품에 안고 돌볼 것인지 결단해야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벗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고자 오늘도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으실 사랑하는 벗님들, 과연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중간은 없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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