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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러분과 |
성당 아저씨! 남인산/꼰솔라따 선교 수도회
저는 이탈리아의 북쪽 지방인 구네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알프스 산 아래의 조용한 마을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산을 많이 좋아합니다. 산을 보면 성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느낍니다. 또한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과 사람과의 만남을 표현합니다. 때문에 저는 저의 한국 이름 안에 ‘산’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는 신부님께서 ‘어질 인(仁)’ 자가 저와 어울린다고 해서 제 이름이 ‘인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성소를 느꼈지만 자신이 없어서 소신학교에 들어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 년 동안 어려운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안에 성숙하면서 제일 가치 있는 봉사는 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해마다 5월이 되면 매일 저녁 우리 본당에서는 어린이들이 성당 앞 광장에서 모여 놀다가 보좌 신부님께서 부르시면 함께 가서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또한 은총시장에서는, 열심히 나와서 기도한 어린이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으므로 저는 빠지지 않고 묵주기도를 하러 성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큰 상을 받지는 못하고 그저 작은 성서 하나만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그 작은 책을 그만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복음 성서에서 저의 성소가 꽃 피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몰로카이 섬에서 일하시던 다미아노 신부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었는데 그분은 나환자를 돌보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저도 그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먼 나라로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영영 떠나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리기가 두려웠습니다. 저는 일단 학교를 졸업하고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단지 몇 년간만 가려고 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너그러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 두려움, 저의 단점들… 또한 ‘내가 잘 해낼 수 있으까?’ 하는 의문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점점 더 예수님께로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분을 더 가까이에서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 성서공부를 시작했고 기도모임에도 나갔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 더욱 위대하고 뜻깊은 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만나, 모두가 한 마음 한 영혼이 되어 가진 것을 함께 나누던 예루살렘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네’라고 답할 용기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 때에 꼰솔라따 수도회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수도회 안에는 수도 생활과 사제 생활, 선교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가정같은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알라마노 신부님의 가르침과 모범이 저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먼저 성인이 되고 그 다음에 선교사가 되어라. 선을 행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을 잘 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신 단순하고 깊은 그분의 가르침은 저에게 새로운 등대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봉헌 생활을 향하여 저를 부드럽게 인도하시면서 제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심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언제부터 한국을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고향에 작은자매회 수녀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남한에서 여러해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시던 분으로 한국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서 제게 이야기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신문, 책, 잡지 등에서 한국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만 하면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읽곤 했습니다. 저는 그후 1981년 꼰솔라따 선교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지도 신부님과 첫 면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수도회에서 아시아에 처음으로 공동체를 열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면서 제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만일 한국에 공동체를 열게 된다면 저는 그리로 가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수도회가 한국을 택한 것은 1987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최소한 3년간 고향의 그 수녀님께서 주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103위 한국 순교자의 상본을 성무일도 기도서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한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는 사제가 된 후 미국에서 3년간 일했고 1992년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인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즉시 이 곳의 아침이 그다지 조용하지 못한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도림 역에서 전철을 갈아 탈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떠밀면서 급히 직장으로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시장에도 사람과 물건이 많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저는 이제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새롭고 낯선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저는 한국 음식에 맛을 들이게 되었고 김치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공부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고 무척 피곤했기 때문에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영영 한국어를 배울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한국에 대한 꿈을 잃는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했습니다. 심신으로 어려웠던 순간에 우리 수도회의 창설자 요셉 알라마노 신부님의 이런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값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사실 제가 아프리카로 갔으면 저는 아마도 말라리아나 기타 질병에 걸렸을지도 모르고 남 아메리카로 갔으면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그 곳에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님께서 제가 한국에서 전교하기 위해 지불하도록 허락하시는 값이라면 기꺼이 그 값을 치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해 판공성사 기간이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귀가 먹었습니다.”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귀를 먹다니! “어떻게 하셨다구요?”하고 제가 묻자, “신부님, 좀 크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한 귀가 먹었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분이 약간 귀가 먼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한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미사 배 먹었어요.” 저는 그 분이 미사 중에 배를 잡수셨다는 말로 알아 들었습니다. 참 이상한 나라도 있구나. 여기서는 귀도 먹고 욕도 먹고 마음도 먹고 가방도 잊어 먹을 수 있다니! 한 소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고3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 소녀가 아주 큰 죄인인 줄 알고 “이제부터는 절대로 고3 더 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던 적도 있습니다. 화살기도를 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살기도를 하라고 말했지 뭡니까?


저는 보다 훌륭한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수도회의 형제들이 제게 없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제게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 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합니다. 선교활동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교회가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항상 우리 공동체의 형제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려 노력합니다. 함께 결정을 내리고 함께 일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저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고 아홉이라고 느낍니다. 즉 제 형제들이 받은 은총과 재질은 바로 제 것이며 제가 받은 것들은 형제들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본당에 가서 일을 할 때 저는 항상 본당 신부님, 신자들과 아주 강한 일치를 이루려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일 같지만 그래도 역시 훌륭한 선교활동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가 ‘그분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할 때에만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자유로이 일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한 가지 신기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즉 저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선교사라고 느끼는 동시에 또한 제 뒤에서 그리고 제 내면에 교회의 온갖 힘이 들어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만석동에 있는 가난한 노인들을 찾아 갈 때나, 800명의 신자 앞에서 미사를 할 때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재정을 관리할 때 늘 한결같이 선교사라고 느낍니다.
모든 이에게 예수님을 모셔다 드리고 또한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선교사로서 저는 더 잘하고 싶은 열의를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 자주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비신자들을 복음화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주님께서는 때를 기다리신다는 것과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그분의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치 예수님이 그들을 제게 보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맞이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고해성사를 보러 오거나 도움을 구하거나 우리 수도회의 정기 간행물을 발송하는 일을 도우러 오거나, 모르는 사람을 우연히 만날 때면 그들 각자에게 사랑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몇 년전, 예수님께 “저는 내성적이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바로 선교하십시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계속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래서인지 동네 아이들이 저를 보면 “성당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아이들은 제 십자가를 가리키며 “미국 아저씨! 저도 성당 다녀요!”하고 인사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북한에 사는 사람들과 중국, 일본, 몽고 등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넘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높은 산 앞에 있는 하나의 작은 모래알과 같은 존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꿈은 2000년 1월부터 우리 수도회 신학생 5명의 수련을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씩 실현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선교에 대한 열정보다 그들이 더 큰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의 씨앗이 됨으로써 한국교회가 그 씨앗을 아프리카, 중국 등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 곳곳에 뿌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한국에 머물면서 제가 얼마나 작은지, 제가 얼마나 작은 일밖에 못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내 머리에 힘이 빠지고 피로가 몰려와 아무것도 못하게 될 때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이 곳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시는 날까지 저는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서, 기꺼이 작은 도구가 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 분 안에서 구원을 찾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와 그들의 기쁨은 충만해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