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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땅에서 |
몽 골

이준화 신부/대전교구
1997년 2월 28일 오후, 몽골 울란바토르 행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몽골 대륙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날 기온은 영하 16도라고 했다. 숙소에서 기도를 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앞으로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묘하게도 행복한 충일감 속에서 편안히 잠을 잤었다.
우선 몽골 말을 배워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 한국에서 가지고 온 책으로 혼자서, 말하자면 독학을 한 셈이었는데 신학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국립대학 몽골어 수강료는 몽골의 경제 수준에 비해 엄청나게 비싸다(한 학기에 1,000불 정도). 이 돈을 첼솜이라는 동네에 씨 감자 값으로 주었다.
덕분에 지금도 내 몽골어 실력은 한국형, 그것도 고향이 경상도라서 경상도 억양 몽골어로서 별로 신통하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시내 한 중간 큰 길 바로 옆이었는데 낮에는 자동차 소리, 밤에는 술 취한 사람들 싸우는 소리, 고성방가 등으로 매우 소란했다. 그리고 가끔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있었다. 찾아 올 사람은 없는데 누군가하고 보면 얼굴, 손이 새까만 일곱 여덟 살 정도의 거지 아이들이다. 하도 가엾어서 들어오라고 해서 급한 대로 먹을 것을 찾아 주곤 했다.
어느 날은 아예 앉혀 놓고 밥을 해 먹인 적도 있었는데 문제는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오는 바람에 네 다섯 명을 해 먹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 혼자서는 해 먹는 게 귀찮아서 라면 정도로 떼우곤 하였는데 좀 곤란해졌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지금은 너희들을 돌볼 수가 없는데 앞으로 꼭 너희들을 위한 일을 할 터이니 당분간은 오지 말라.”고 하였는데 아이들은 정말 그날부터 오지 않았다. 사실은 죄스러움과 아쉬움이 있어 그래도 기다렸는데… 그래서 지금은 이러한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계획하고 산동네에 복지센터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1년 몽골어 공부를 하고 이제 무엇인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선교사로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고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 나의 본래 의무이자 사명인데 몽골의 현실은 종교 활동을 하는데 여러 가지 법적 제한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70년 동안 러시아와 협력 관계(사실은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로 종교는 아편 정도로 생각하는 공산주의식 사고 방식이 많이 남아 있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덴산트 가난안 선교 농장에서 통나무로 집을 짓기 전에 살던
게르(몽골식 천막)에서.
몽골은 오랫동안 청나라 지배를 받아 오다가 중국이 혁명으로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독립국가로 서게 되었는데 결국 러시아 혁명 세력과 손잡고 1921년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우리가 내몽골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구는 모택동이 혁명을 성공한 직후 옛날에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하여 중국 본토로 만들었고 러시아는 또 선물로 받는 형식을 취해 바이칼 호를 포함하는 시베리아 땅을 차지하였다. 현재 외몽골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지금의 몽골 공화국이다.
국토 면적은 남북한 합친 한반도의 7.5배인데 인구는 250만이 채 안 된다고 한다. 남쪽의 3분의 1은 고비사막이고 북쪽은 삼림지역 그리고 중간은 몽골고원으로 초원지대이다. 형님 나라 러시아 연방이 잘 살 때는 몽골도 현대화하여 도시도 건설하고 공장도 세우고 농사도 짓고 해서 그런대로 잘 살았는데 90년대 러시아 경제가 붕괴되면서 몽골도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 공산주의 개방의 흐름을 타고 공산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로 전환을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빈부차이다. 눈치 빠른 고급 관료들은 유망성 있는 회사를 싸게 인수하여 부를 누리고 있고 또 외국 자본이 유입될 때 개인 치부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역시 도시가 빨라서 인구 60만이라고 하는 수도 울란바토르가 변화의 과정을 먼저 겪고 있는데 시골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 천년전 까치집이 오늘날 철탑 위에 까치집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것처럼 이 곳 사람들은 여전히 양털로 만든 ‘게르’라 불리는 옛날 천막에서 살고 있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대부분 서민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그나마 일자리가 있다해도 우리 돈으로 5-6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거리에는 거지 아이들, 알콜 중독자, 소매치기들이 있다. 시장에 가면 각 시장마다 전속 소매치기가 사방에서 노골적으로 밀어부치는데 참 화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먹을 것이 없어도 시장에 잘 안 간다. 하루는 내가 집 안에 있는데 도둑이 문을 열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외국에 나가서 불법 체류를 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데 한국에도 꽤 많은 몽골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나한테 한국 비자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 능력 밖의 일일 뿐만 아니라 법을 어기는 일에 신부가 앞장 설 수가 없어서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과거 우리에게 아메리카 드림이 있었던 것처럼 몽골은 지금 `솔롱고스 드림’이 있다.
몽골에서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혼인데 공산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성 풍조가 매우 무질서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조혼 풍습, 여성 우위 현실 등으로 내가 알기로는 도시의 젊은 가정 반 이상이 이혼을 한 경험이 있다. 더구나 러시아가 성씨를 없애서 가족의 끈이 없어져 버렸다. 아이의 이름은 아버지 이름이 성이 된다. 우리 식으로 설명하자면 이춘풍 씨의 아이 철수의 이름은 `이 철수’가 아니고, 이름인 춘풍이 성이 되어 `춘풍 철수’가 된다. 아버지가 없으면 엄마 이름이 성이 되는데 엄마 이름이 월매이면 `월매 춘향’이 되는 것이다.
몽골의 종교법은 “종교는 자유다. 그런데 불교, 이슬람교, 무속 신앙을 다른 종교보다 우위에 둔다. 자기 종교를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선전할 수 없다.”는 등의 조항이 있다. 몽골은 징기스칸의 대 제국 멸망 후 티벳의 라마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아서 오랫동안 믿어 왔는데 1921년 공산 혁명 당시 승려 만 명 정도를 총살시키고 대부분의 사원을 불태웠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켜 종교의 힘을 약화시켜 버렸고 명맥만 겨우 유지할 정도로 쇠퇴의 길을 걸어 왔었다. 오늘의 라마 승려들은 우리가 흔히 자주 말하는 사주 팔자, 결혼 궁합, 운수 택일 등을 봐 주고 부적을 써 주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아이의 탄생, 결혼, 장례 등의 일에 경을 읽어 주고 약간의 사례금을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할머니들이 염주알을 굴리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공산주의도 인간의 종교심은 어쩌지 못 했을 것이다.
지금은 통일교를 비롯해서 개신교 선교사들이 많이 활동하는데 신문은 여전히 이들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싣고 있다. 다행히 가톨릭은 로마 바티칸 대표부 자격으로 선교 센터를 운영하여 가톨릭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관료들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아직은 종교를 옆눈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나는 우선 교회를 세우는 일보다 나 자신이 몽골 사람과 함께 살면서 서로나누고 그 다음에 올바름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수도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에르덴산트 마을에 땅을 임대하여 이른바 “가나안 선교 농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서산의 운산본당 신부로 있을 때 호박, 우리 밀, 콩 농사를 3년간 지었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농사꾼으로서 트랙터를 몰다가 씻을 겨를도 없이 미사를 드렸던 경험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전기를 끌어들이고 샘을 파고 통나무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밀 농사를 시작했는데 첫 해에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몽골은 비가 1년에 250미리 정도 온다. 적어도 500미리는 되어야 하는데 물이 부족하니까 농사가 잘 될 리가 없다. 난감하고 불안했다. 이듬해에는 감자를 심었는데 씨 감자 100톤에 수확량은 50톤 정도였다. 농사도 안 좋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감자를 훔쳐갔기 때문이었다. 훔쳐간 우리 감자가 동네에서 내 놓고 팔릴 정도였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감자도 밀도 수확이 괜찮았다. 그래서 교회 단체에 굵은 것을 골라 나누어 줄 수 있었고 도둑도 잘 감시해서 그런대로 농사 관리에 요령을 터득한 셈이었다. 올해는 7, 8월에 이상하게도 비가 없어 작년에 비해 수확이 적었는데 수리시설만 잘하면 농사는 땀 흘린만큼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내년에는 정상적인 농업 경영을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농사가 아니다. 사람들과 만나고 서로 믿고 도우며 살자고 한 농사인데 문제는 사람들이다. 작물은 거짓말을 안 하는데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농기계 기름을 훔치는 일은 공산주의 시절부터 전혀 문제 의식 없이 해 온 관례이고 눈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은 울타리를 끊고 일부러 자기네 가축을 들여 보내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술취한 젊은이들이 왜 남의 나라 땅을 차지하느냐고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 지방 관리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요구해 온다. 무엇이라도 주지 않으면 심술을 부리는데 이 사람 때문에 가장 골치가 아프다. 종교 활동을 못 한다고 얼마전에도 협박을 하고 나갔는데 그 이유는 ‘왜 자기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지 않느냐?’하는 것일 것이다. 농장에는 통신시설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울란바토르와 농장 200킬로미터 거리를 수도 없이 왔다갔다 했다. 그래서 4년 동안 내가 한 일은 자동차 운전밖에 한 것이 없는 것같다. 도중에 브레이크 과열로 뒷바퀴에 불이 난 적도 있었고 눈보라 속에 시동이 꺼져 추운 겨울 밤에 매우 고생한 적도 있었다.
나는 몽골에서 다른 신부님들이 잘 안 하는 것을 고맙게도 해 보는데, 15톤 덤프 트럭도 몰고 굴삭기도 운전한다. 대형 운전 면허증도 있는데 운전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덤프 화물차 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 포크레인은 전문 기사 뺨 칠 정도로 자신 있다.

몽골은 내가 죽어야 할 땅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착한 어린이들 때문이다. 올 여름 처음 해 본 2박 3일의 여름 캠프는 70여 명이 모였는데 매우 소중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캠프의 마지막 날, 언제 다시 모이느냐고 물어오는 순진한 눈망울은 몽골 선교의 미래를 예언해 주는 선명한 한 줄기 빛이었다.
굶는 어린이들을 위한 식당,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 체육시설, 주민 진료소, 아이들 놀이방 등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장차 교회의 역할을 해 나가고자 하는 선교 전략을 세웠다.
울란바토르는 인구가 비교적 가장 밀집되어 있는 도시일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 나라 서울처럼 시골에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곳이다. 이 곳을 선교 지역으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장 변두리 지역에 4000평 정도의 땅을 임대해서 현재 가나안 복지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요즈음은 부지 토목 공사를 하고 있는데 굴삭기로 땅을 파서 덤프 트럭에 싣고 다시 덤프 트럭을 몰고 아래 쪽에 흙을 뿌리는 그런 일이다. 혼자서 포크레인과 덤프 트럭을 오르 내리는 일이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내년 봄에는 정직한 기사를 한 사람 뽑아야겠다. 말 난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이제 자동차 정비도 어느 정도 자신 있다. 얼마 전에는 자동차 부품을 스무 번도 더 이상 뜯었다 붙였다 한 적도 있었다. 미사 드리는 일보다 운전이나 기사 노릇을 더 많이 해서 겁이 나기도 한다.(?)
어렵게 허가를 받아 시작한 복지센터 건립 사업은 당장 자금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어려운 문제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부자인데… 세상의 주인이 우리 아버지인데… 하면서.
이 지면을 통해 몽골 선교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와 주신 후원회 여러분과 그 외 저의 일을 도와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후원하신 여러분들의 고마운 마음이 몽골 땅에 심어져 기어코 싹을 내고 몇 백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과거 2000년 역사 안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선교의 일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 동안 국가의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가 나온 때도 있었고, 오히려 왕권의 보호 아래 교회가 권력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더구나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반 종교적인 시대적 사조 등으로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은 적도 많았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 기묘한 방법으로 당신의 교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끌고 가신다는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고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결과는 바람직한 쪽으로 가고 만다는 믿음이 선교의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너희는 이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모두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용기와 힘을 얻는다. 내가 못하면 후배 신부님과 신자들이 이 일을 계속 할 것이고 그러다 몇 십 년 후에는 몽골에도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성가를 들을 날이 꼭 올 것이다.
참 인간 예수.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한 선교는 그렇게 힘들고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나는 몽골에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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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선교 후원회: 대전시 중구 대흥동 189(가톨릭문화회관 312호) ☎042)256-4111 * 외환은행: 034-19-34169-9(예금주-김종수) |

몽골 선교 후원회 지도 신부인 김종수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