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2001. 1. 3. 오전 10:28:59

글자

*선교생활은 1년에 두번(여름과 겨울) 선교 현장에서 일하시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수행을 돕는 전교회, 베드로 사도회 회원들을 위하여 교황청전교회에서 만듭니다.

 

선교생활 2000년여름호 [한국에서 여러분과]란 중에서

 

아니마 수사/ 사랑의 선교 수도회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도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수도회가 성장하고 일이 점점 많아지자 마더 데레사는 똑같은 카리스마를 나누는 남자 수도회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더 데레사는 1963년 "사랑의 선교 수사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수도회의 카리스마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이의 비참한 가면 속에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사랑하며 진심으로 섬기는 데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확신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마더 데레사는 형제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먹여 주고 씻겨 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참으로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로 충만되고 관상적인 자세를 행하기 위해 일을 기도화하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사랑의 선교회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사랑의 선교회의 앤드류 수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사님은 그 당시 수도회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내면에 숨어 흐르는 가난하고 단순한 생활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은 저를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1968년 2월 19일 사랑의 선교회에 입회하여 1972년에 첫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되기전까지 저의 조국 인도에서 살았습니다.

1993년 12월 7일 한국에 왔는데 첫 선교지에서의 시작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데 왜 그리 어려운 지 너무 힘들었지만 선생님들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마디의 낱말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할까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또한 겨울 추위는 뼈 속까지 파고들었고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아 식사를 거의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된장국 냄새는 저의 모든 감각을 잠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에 따른 공동체 생활도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 공동체가 아니라 별 세계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집에서 온 편지에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그후 한달 만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연달아 찾아왔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 아팠고 또한 선교에 대한 열망과 희망과 용기가 다 빠져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저같이 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왜 선교사로 불렀을까하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상념 안에서 하느님께 침몰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의 첫 번째 선교사 생활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선교사 생활은 저 자신의 힘과 기도와 노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자비 그리고 그 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로써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동안 힘들고 아팠던 것들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지금은 한국말도 조금씩 배우고 있고 된장국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음식을 잘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 중에 있을 때 한국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저의 집에 봉사하러 오신 분들의 친절한 마음과 사랑, 모든 가난한 분들이 주신 사랑으로 용기도 많이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처음 본 한국은 저희 인도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잘 사는 나라에 선교사가 할 일이 있을까하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저 우리가 모시고 사는 할아버지와 아저씨들 목욕시켜 드리고 옷 갈아 드리고 식사 도와주고 청소하는 것 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수사님들과 함께 이곳저곳 활동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울 방학동에는 높고 넓은 깨끗한 아파트 사이에 가리워진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한 할머니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광주 무등산에 올라가는 길 옆에 한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집이라고 할 수 없는 비닐 천막으로 비와 바람과 이슬을 막아 주는 하나의 작은 공간일 뿐입니다. 그 집에는 다섯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연탄불도 전기 장판도 없고 식수는 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사용하고 계곡이 마르면 여기저기로 물을 찾아 나섭니다. 다섯 식구 중에 네 명이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돈을 버는 사람이 없어서 나라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매일 매일 시장으로 나가 버려져 있는 야채를 주워 와서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가끔씩 저희가 방문하여 쌀과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방문할 때 마다 느껴지는 것은 이 가난한 생활 중에도 그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이거저것 도와 달라고 한 번도 청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고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가족들이 욕심없이 손에 손을 잡고 큰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명 이 가족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잘 사는 가족 안에는 이 같은 사랑과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가족을 `신비의 가족'이라 부릅니다.

  광주와 목포 사이에 함평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나환우촌이 있습니다. 거기에 저는 한달에 한 번씩 이발 봉사하시는 프란치스코 형제와 함께 갑니다. 프란치스코 형제는 그 분들에게 이발을 해 드리고 저는 그 시간에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강하십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분들의 기쁨과 슬픔을 조금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소록도에서 살다가 함평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이 섬의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 곳은 오래 전부터 나환우들을 격리시켜 치료하던 섬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그 섬에 갔을 때 저는 한 할머니를 보았는데 그 할머니는 두 다리가 무릎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릎으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지금도 그 할머니의 걸어가는 모습을 제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할머니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큰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제가 함평 나환우촌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도 소록도를 다녀온 후 였습니다. 그런데 함평에서도 비슷한 고통을 지닌 아가다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나병으로 얼굴 모양도 손가락 발가락도 없어졌습니다. 한쪽 다리는 나무 다리를 만들어서 걸어 다닙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꼭 수도꼭지처럼 나옵니다. 할머니가 받은 고통, 어려움은 헤아릴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예쁜 마음 속에는 기쁨과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할머니는 힘있게 사셨습니다. 아가다 할머니는 분명 죽으신 예수님의 3일 무덤 앞에 살고 계신 분이십니다. 돌아가시기 전 제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아가다 할머니는 제게 한 끼의 식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손과 발이 문들러졌는데도 맛있는 상을 차려 주시니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그 때 할머니와 함께 한 식사는 평생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다른 여러 곳에서 가난과 고통받는 이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면 아름답고 깊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불러일으키시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덕성의 모범이 되시며 받아들임과 사랑으로 저희를 축복해 주십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지만 라자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도다"

(루가 16,25).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모이랑&선교생활&선교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