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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향기 |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들

▲수유5동 녹색 어머니 회원들이 바자회장 입구에서 신명나게 풍물놀이 한판을 벌이고 있다.
김인환/서울 수유1동 성당
“…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사도 2,44-47)”
우리는 종종 가난한 이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거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구티에레즈 신부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우리가 걸어가는 “바로 그 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2000년 11월 11일 토요일. 서울.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유리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운동장. 전날 내린 비로 초겨울의 한기가 옷 속으로 파고 드는 이른 새벽부터 나눔의 장터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운동장은 매우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문에 가로 걸린 대형 현수막에‘난치병 어린이 돕기 종교 연합 바자회’라는 글귀가 나눔의 장터를 설명하고 있다. 그 아래‘주최:천주교 수유1동 교회·화계사·송암교회’라고 주최측을 알리는 작은 글자들은 보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담양 죽제품, 완도 김, 경기 햅쌀, 제주 갈치 등 전국의 특산물, 남성복, 여성복등의 의류, 한약재, 주방용품, 온갖 생활용품, 스포츠용품등의 판매 코너를 행사장 중앙에 두고 가장자리에는 세 종교에서 기탁 받은 기증품 판매 코너와 먹거리 코너를 배치했다. 먹거리 코너에는 각 종교별로 준비한 음식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개장, 보쌈, 닭갈비, 주류는 수유1동 성당 신자들이, 국수, 전, 호박죽, 식혜, 도토리묵은 화계사 불자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며 송암교회 신자들은 오뎅, 김밥, 떡볶이, 순대를 마련하는 등 처음 열리는 종교 연합 바자회를 찾는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오전 10시 천주교 수유1동 이종남 주임신부, 대한불교 조계종 화계사 주지 성광스님, 한국 기독교 장로회 송암교회 회장, 박승화 목사 등 세 성직자의 개회사에 이어 바자회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 있자 일찌감치 행사장에 나와 있던 신자들과 이웃 주민들의 열렬한 박수가 일제히 터져 나왔으며 바자회장은 이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 아직도 하나의 화두로 남아있는 이 시대에 천주교, 불교, 개신교가 이웃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간 수유1동 성당이나 송암교회, 화계사는 그들 나름대로 불우이웃돕기, 결식 아동 급식 제공, 장학금 기탁, 무료 점심 제공 등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으나 지역사회를 위해 함께 모여 생각하고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날 서로 다른 세 종교가 어우러져 이루어낸 사랑의 나눔 한마당은 수유1동 성당과 송암교회간의 오랜 우정이 그 바탕이 되었다.
지난 7월 수유1동 성당과 송암교회의 친교모임인 대송회는 지역주민을 위한 공동 바자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인근 화계사의 참여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침 화계사 주지 성광 스님이 이종남 신부와 14년전 함께 군종으로 복무하여 친분이 있는 사이였으므로 흔쾌히 그 뜻을 수락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1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수유1동 성당과 송암교회의 우정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1983년 8월 수유1동 성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조군호 신부는 그 이듬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진기한 방문객을 맞게 된다. “정월 대보름 척사대회 때라고 기억이 되는데 그 당시는 임시 성전도 없이 지낼 때 였어요. 마당에서 신자들과 윷놀이판을 벌이고 있는데 낯선 신사들 몇 사람이 찾아왔지요.” 그들이 길 건너 모퉁이에 마주하고 있는 송암교회에서 왔다고 밝혔을 때 조군호 신부는 내심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중하고 진심 어린 태도로 수유1동 성당의 설립을 축하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당시 송암교회의 고 기원형 목사와 장로들이었다. “친교의 손길은 그들이 먼저 내밀었죠.” 조군호 신부의 회상이다. 그 후 수유1동 성당은 송암교회의 도움으로 한신대 신학대학원 운동장을 빌려 성전 신축기금 조성을 위한 대규모 바자회를 두 차례나 실시했다.

▲수유1동 성당 김 에반젤리나 수녀도 의류 판매원으로 나섰다.
당시 바자회장을 방문했던 김수환 추기경도 개신교측이 신학대학원 운동장을 빌려 준 데 대해 놀라워 하고 그 개방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고 조신부는 기억했다.
1987년의 성전 기공식과 1989년의 축성식 미사에 장로들과 함께 참석했던 고 기원형 목사가 별세했을 때는 조군호 신부와 신자들이 송암교회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 연도를 바치고 연미사를 봉헌했다. 90년대에 들어와 수유1동 성당 장덕필 주임신부와 송암교회 박승화 목사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 주일’과 천주교의 ‘일치주간’에 예배와 미사에 서로 참석하여 설교와 강론을 나누게 되었다. 이와같은 지속적인 교류와 친교모임을 가져오던 중 수유1동 성당의 주보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대(大)’자와 송암교회의 ‘송(松)’자를 따서 두 교회의 친교모임을 대송회라 이름짓고 주임신부와 담임목사가 공동회장을 맡아 두 교회의 우의를 다지는 한편 지역사회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 실천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일치와 화합을 도모해 왔다.

▲이종남 신부, 박승화 목사, 현성 스님이 바자회장을 돌아보고 있다(좌로부터).
난치병 어린이 돕기 종교 연합 바자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수유1동 성당 사목협의회 사회복지분과 위원장(양순묵 요셉), 송암교회 친교 봉사 위원장(왕희재 장로), 화계사 교무 현성 스님을 실무책임자로 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세부사항에 대한 검토와 준비에 들어갔으나 회의일자 조정등이 여의치 않아 충분한 협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개신교와 불교측에서는 책정된 목표액을 어떻게 달성하느냐보다는 연합바자회에 참여한다는 데에 더 의미를 두는 듯하여 생각보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성당측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당 설립후 크고 작은 바자회를 여러 차례 열어본 경험이 많아 필요한 준비나 봉사요원 선정 등 별다른 걱정은 없었으나 그동안의 바자회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종교 연합 바자회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그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할 것인지는 전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은 흘러 바자회 날짜는 가까워 오고 각 종교별로 배정된 먹거리 준비에 바쁜 가운데 흐뭇한 일도 적지 않았다. 화계사의 불자가 주류 판매에 쓰라고 동동주 5말을 성당에 보내왔는가 하면 송암교회 신자는 닭갈비에 쓰일 원료 닭 50마리를 기증해 오기도 했다. 또한 주임신부를 통해 동원참치 500세트, 라면 100상자, 한복 등을 기증해 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다 천주교 신자는 물론 아니었다.
종교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스스로 자기 마음 속에 쌓아 놓고 벽이 높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사랑’을 역설하는 스님과 ‘부처님의 자비’를 말하는 신부와 목사, 서로 웃음을 주고 받으며 정을 나누는 세 종교의 신자들을 볼 때 소위 종교간의 벽이라는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이 작은 출발이 첫 걸음이 되고, 작은 불씨가 큰 불길을 타오르게 하듯 저마다의 종교와 신앙을 넘어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사랑의 실천과 자비행이 요원의 불길처럼 이 땅에 퍼져 나갔으면 하는 것이 비단 몇몇 사람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이종남 신부는 “이번 행사를 통해 3개 종교가 화합과 일치의 실마리를 찾고 이웃간의 사랑이 모든이들의 마음에 강물처럼 흘러가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이웃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때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화계사 성광 스님은 “공히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종교간에 오히려 갈등과 반목이 컸던 게 사실입니다. 이 행사를 통해 종교간 화합은 물론 모든 민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종교적 합의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송암교회 박승화 목사는 “종단 대표들이 만나 대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관계를 형성해야만 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일을 위해 앞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당초에 목표액 일천만 원을 초과한 이 날 바자회의 총 수익금 전액(₩20,068,370)은 강북구청의 추천을 받아 선정된 백혈병, 루프스병, 근육병, 신경아세포증 등 난치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 7명에게 전달되었다.

▲막걸리 한 잔에 보쌈에 맛보고 있는 이종남 신부, 장정식 강북구청장, 현성 스님(좌로부터).
지난 10월 20일에 같은 곳에서 수유1동 성당의 주관으로 난치병 어린이 돕기 제2회 종교연합 사랑의 바자회가 열렸다. 김원길 보건 복지부 장관 등 각계 인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주민들과 신자들이 참여하여 오천여 만 원의 수익금을 모았으며 1회 때 보다 더 많은 수의 난치병 어린이 환자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뜻을 세우고 우리의 가진 바를 나눌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게 채워 주신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는 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