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생활2001/빛이 된 사람들(김종기 신부/예수성심전교수도회)

2002. 1. 3. 오전 9:48:55

글자

빛이된 사람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창립자

 

쥴 슈발리에

                                                                김종기 신부/예수성심 전교 수도회

 

  쥴 슈발리에는 1824년 3월 15일, 프랑스의 옛 도시인 이슈뎅에서 가난한 가정의 세 자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어머니의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다소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어린 슈발리에는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성장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난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슈발리에는 어린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슈발리에는 곧바로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 이로인한 그의 실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슈발리에는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소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육체적 노동을 했다. 특히 구두 만드는 견습공으로서 일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이를 잘 극복해 나갔다.

  이처럼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육체적 노동을 깊이 체험한 후, 슈발리에는 아주 늦은 나이인 17세 때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슈발리에는 보우즈 교구의 대신학교 시절 동안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전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과 신앙의 부족, 시대의 악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 성심의 기사단을 만들어 선교사로서의 미래의 꿈을 키워 나갔다. 슈발리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제가 되어 신앙의 부족으로부터 오는 온갖 형태의 무관심과 무절제라는 악과 싸워 승리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찼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의 업적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알리고 나누도록 불리움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 마음 안에 신앙의 응답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예수 성심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다.

  예수 성심께 대한 슈발리에의 봉헌은 단순한 신심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성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갈바리아 산,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이 사랑을 발견하고 이 사랑 안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가 되고 생명을 주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래서 슈발리에는 이러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선교 사제단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한국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초창기 시절, 길반석 신부와 재단일 신부

 

  1851년 사제서품을 받은 슈발리에 신부는 1854년 이슈뎅 본당의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았고 그 곳에서 신학교 시절 동료였던 세바스티안 에밀리 모지니 신부를 만났다. 슈발리에 신부는 그 만남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신학교 시절부터 미래 예수 성심의 선교사제로서의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슈발리에와 모지니 두 보좌신부는 예수 성심께 봉헌될 선교 사제들의 단체 설립에 대한 확신은 있었으나 눈에 보이는 분명한 징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 비오 9세에 의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한 날인 1854년 12월 8일을 수도회 창립일로 정하고 11월 30일부터 9일 기도를 바쳤다. 9일 기도 목적은 수도회의 창립이 성모님을 통해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9일 기도가 끝나는 마지막 날인 1854년 12월 8일, 대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바로 직후 쥴 슈발리에는 수도회 창립을 위해 익명의 신자로부터 20,000 프랑을 기부 받았다.

  그러나 미사 예물 이외에 보다 실제적인 충분한 재정지원이 필요함을 깨닫고 두 신부는 동정 성모님께 두 번째 9일 기도를 1855년 1월 28일에 시작하여 다음달 2월 6일에 마쳤다. 9일 기도를 마친 그날, 한 사람의 익명의 신자로부터 해마다 1.000 프랑의 기부금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보우즈 교구 두봉 추기경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두봉 추기경은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교구 참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슈발리에와 모지니의 두 젊은 사제의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창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마침내 두 젊은 신부는 수년 동안 버려진 낡고 초라한 집을 사서 수리하여 수도원으로 사용했다.

  슈발리에와 모지니 신부는 창립 첫해를 수련기로 정하여 묵상과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이슈뎅 주변 본당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했다. 그 다음 해인 1856년 성탄때 슈발리에 신부와 모지니 신부는 그해 입회한 찰스 피페롱 신부를 증인으로 하여 사적으로 하느님 앞에 첫 서원을 했다. 그러나 모지니 신부가 보우즈 대교구 주교좌 성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떠나자 슈발리에 신부는 선교 수도회 창립을 위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 피페롱 신부와 함께 여러 성지를 순례했다. 또한 1858년 초에는 예수 성심의 성전이 있는 파레이 레 모니알을 방문했고 마리아 마가렛 알라콕 성인의 무덤도 참배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 성심 안에서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기도와 예수 성심의 증인인 마가렛 성인께 전구했다.

  슈발리에 신부는 이처럼 초창기 수도 공동체의 어려운 순간들을 잘 극복해 가면서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에게 봉헌하는 새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사실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라 붕괴의 위험이 있어 두봉 대주교로부터 경당 사용을 금지 당하기도 했지만 예수 성심의 기념 성당을 세우고자 하는 영감과 대주교의 동의, 신자들의 희사금으로 낡은 건물의 일부를 헐고 마침내 1959년 6월 26일에 수도원 새 성당을 짓기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슈발리에 신부는 친구 사제의 권유로 1859년 7월 중, 두 주간의 순례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연로하고 병 중에 있던 아르스의 성자 쟌 비안네 신부를 만났다. 슈발리에 신부는 초창기의 선교 수도회를 위해 그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성자 쟌 비안네 신부는 슈발리에 신부에게 선교 수도회 창립은 매우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겪기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크신 축복이 내릴 것이 확실하다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순례를 마치고 이슈뎅에 도착한 7월 16일부터 시작되는 슈발리에 신부의 9일 피정에 비안네 신부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피정을 마친 바로 며칠 뒤에 비안네 성인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슈발리에 신부는 새 성당을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에게 봉헌했다. 이 칭호는 1855년 이래 슈발리에 신부가 오랫동안 묵상하고 생각해 온 칭호였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어머니인 마리아와 아들인 예수와의 깊은 사랑과 신뢰, 일치의 관계가 담겨 있다. 슈발리에 신부는 예수 성심의 빛 안에서 마리아를 예수 성심의 어머니로 보았다.

  19세기 마리아의 신심 시대에 크게 영향을 받은 슈발리에 신부는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슈발리에 신부가 생각하는 마리아 신심은 단순히 성모님을 통해 예수께로 나아가는 신심을 넘어 예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부를 발견하기 위한 보다 헌신적인 신심이다. 이것은 그 당시 종교적인 무관심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영성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다.

  슈발리에 신부는 1861년 6월 7일에 성당의 일부 건물 축성식을 가졌고 또한 같은 해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의 상이 담긴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었다. 1863년에는 수도원 본 경당을 헐고 성당의 두 번째 부분이 완성되고 마침내 1864년에 성당 전체 축성식을 가졌다.

  1869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정되고 1874년 교황청의 최종적인 승인을 받은 가운데 슈발리에 신부는 1874년 대주교로부터 인가를 받아 ‘예수 성심의 우리 어머니 딸회’의 창립 미사를 봉헌했다. 1879년 9월까지 사제 29명에 불과했던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는 1876년 4월 20일에 미국 워터 타운에 첫 해외 선교 파견을 시작으로 1881년에 멜라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 바르셀로나, 1882년 파푸아 뉴기니에 예수 성심의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또한 1900년 쥴 슈발리에 신부의 정신과 명령에 따라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가 창립되었다. 슈발리에 신부는 자신이 세운 전교 수도회의 발전과 융성한 활동을 지켜보며, 1907년 10월 21일 주님의 품으로 떠났다.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한국 진출은 1985년 2월 17일 필리핀 관구로부터 길 반석 베드로 신부의 파견으로 시작되었고 한국의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는 창립자의 정신과 “예수 성심이여, 온 세상에서 영원히 사랑 받으소서!”라는 수도회의 좌우명에 따라 예수 성심의 사도로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모이랑&선교생활&선교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