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본 모습을 찾아서

2009. 4. 22. 오전 6: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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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영혼의 본 모습을 찾아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magnificat)하며"
“가톨릭 교회 교리서” 중심으로
 
                                                                                                                                                                2009년 4월
                                                                                                                                                       유병일
 
들어가는 말
1. 영혼에 대한 개관
2. 가톨릭교회의 영혼
3.영혼의 성장
4.영혼의 영(힘)
5.영혼의 손상과 치유
6. 영혼이 해야 하는 수행.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영성생활을 위한 여러 수련을 모색하다 보니, 예전에는 많이 다루었지만, 요즈음엔 좀 소홀히 했던 ‘영혼’의 중요성이 새삼스러이 생각되었다. 그동안 육와 영이 하나라는 생각에, 자아(自我)라는 개념에만 머물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아와 ‘영혼’에 대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이것저것 찾아보며 영신수련에서 영혼의 한 위치를 마련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만들어 보았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영혼에 대한 묘사를 보니, 영혼이 하느님을 위해 살고(시편 22), 하느님을 받들고(토빗 13,7), 찬미하며(토빗 13,15), 자신을 주님께 들어 올리고(시편 25,1), 주님께 피신하고(시편57,2) 주님께 희망을 두는 영혼(시편 130,5)이 때로는 근심하고(2마카 3,16), 쓰라리고(욥 3,20; 10,1), 고통에 숨이 막히고(욥 7,15), 슬퍼하고(욥 30,25), 떨고 번민하고(시편 6,4; 13,3), 기가 꺾이고(시편 57,7), 육신에 짓눌리기도 하고(지혜 9,15) 부패되고(지혜 14,26), 메마르게 되지만(집회 14,9), 하느님께서 찾아오시어(지혜 3,13), 지혜를 넣어주시고(지혜 10,16), 생명을 주시고(66,9)곤경에서 살펴주시고(31,8), 지키고 구하시고(시편25,20), 기쁘게 해 주시어(시편 86,4) 생기를 얻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워하고(시편 42,2,) 목말라하며(시편 42,3),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시편 35,9), 주님을 자랑하고(시편 34,3), 기뻐하며(시편 16,9), 행복을 느끼는 영혼(시편 25,13)은 스스로도 깨어있고(시편 57,9) 자신을 가다듬어(시편131,2), 훌륭하고(지혜 8,19), 올바르게(지혜 9,3), 명예스럽고(집회 1,30), 교양 있고(집회 26,14), 절제하는 영혼(집회 26,14)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성격과 성품이 그 영혼 안에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글을 만들어 보려한다. 첫째로는 ‘영혼의 개관’으로 영혼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와 다른 종교의 여러 학설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둘째로는 ‘가톨릭교회의 영혼’이란 주제로 신약성경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다룬 영혼을 살펴보고, 셋째로는 ‘영혼의 성장’이란 주제로 한 인격과 성품이 이루어져나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성장을 담았다. 넷째로는 영혼의 영(힘)이란 제목으로 영혼의 상태와 기능을 살펴보고, 다섯째로는 ‘영혼의 손상과 치유’라는 제목으로 영혼을 진단하고 영혼의 위치와 영혼이 알아나가야 할 것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여섯째로는 ‘영혼이 해야 하는 수행’이란 제목으로 영혼이 하느님과 만남을 다루고 영혼이 하느님의 빛을 향하여 나가 하느님과 합일하는 여정을 다루어 보겠다. ‘나가는 말‘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시 ’어둔 밤‘을 결어를 맺었다.
     어떤 내용은 그 출처가 너무 공통된 부분이 많아서 밝히지 않았다. 그 중에서 많이 인용된 부분은 마이스터 에카르트,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영혼을 주로 다루었으나, 많은 부분이 공통된 의견들이었고, 이미 초기 교회부터 내려오는 학설들과 서로 통하거나 좀 더 세밀하게 발전되었다.
 1. 영혼에 대한 개관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은 육신과 영혼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기본 교리는 변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오랜 역사를 거쳐 전해내려 오고 있다.
     ‘영혼’이란 말은 이 한 사람의 인격과 인간성(性品)으로 의미되기도 하며, 때로는 정신이나 자아(自我)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인간 생명이나 존재의 비물질적인 근본을 영혼으로 생각하여,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현세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모든 생물들 안에 영혼(魂)이 있다고 본다. 이런 사고는 인간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육신 안에 있는 영적인 부분을 육신과 구별하여 왔다. 여러 종교와 철학은 영혼의 존재를 시인하면서도 그 본질, 육신과의 관계, 기원 등에 대해서 다양한 이론들을 발전시켜왔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을 인간생활의 원칙으로 보았으며, 그 중에서 영혼을 불멸의 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바오로 사도는 ‘영과 혼과 몸’(1테살 5,23)을 인간의 삼부구조로 보며, 이 중에서 영(spiritus)은 영혼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서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후 여러 이론들이 역사를 거쳐 내려오는데 예를 들면 부모의 영혼이 유전적으로 전승된다는 전승설(傳承說, traducianism)도 있고, 영혼이 영혼을 낳는다는 생식설(generatianism)도 있었고, 절대자인 한분에게서 나와 사물의 형상을 이룬다는 유출설(emanatism), 하느님의 안배 하에 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진화론과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창조설 등 유물론적, 범신론적, 이원론적 여려 다른 의견이 나오는 과정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영과 육의 이중의 인간관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혼의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육신과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 유대교에서는 영혼에 관한 구약성경의 언급들은 숨(호흡) 개념과 관련이 있으며, 영적 형태인 영혼과 물리적 형태를 가진 육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육신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그리스도교 개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했었다.
      힌두교는 '개별적인 영혼'이 태초에 창조되어 있다가 태어날 때 육신에 갇히게 된다고 보았다. 육신이 죽을 때, 이 영혼은 인과응보에 의해서 결정되어 '존재의 사슬' 가운데 각자의 새로운 육신으로 들어간다. 어떤 힌두교 분파는 죽음과 환생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분파들은 영혼이 인과응보의 완성에 도달하게 되면 절대자와 융합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개인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의식은 모두 환상이라고 말하고, 개인의 영혼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다루는 면이 있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육신과 동시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혼은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며, 육신과의 연합은 일시적인 상태라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영혼이란 개념보다는 혼(魂) 또는 넋이란 개념으로 알려져 있고, 죽은 사람의 혼-넋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조상의 혼((祖靈)에게 후손을 보살펴달라는 기도나 조상에 대한 후손의 예를 행하는 제사를 드린다. 또 죽은 혼(魂) 중에서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혼(怨靈)을 위로하는 제사나 굿 등 무속신앙의 행위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혼(魂-넋)대한 신앙은 일상의 삶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가끔 꿈을 통해서 만나는 정도를 이에 대한 신앙행위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2. 가톨릭교회의 영혼
 2-1.신약성경에서 영혼
     가톨릭교회의 신약성경에 묘사된 영혼을 보면, 영혼은 주님을 찬송(magnificat)하며(루카 1,46), 하느님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가(히브 6,19) 하느님 앞에 선다.( 묵시 6,9)
     영혼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반대를 받아(마태 10,28) 그 고통이 칼에 꿰찔리는 듯 아픔을 느낀(루카 2,35)다.
     그러나 하느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1베드 2,25), 죽음에서 구원되는 영혼(야고 5,20) 영혼을 구하시고(사도 2,27), 목자를 시켜 영혼(히브 13,17)을 돌보신다.
     영혼은 스스로도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데, 진리에 순종함으로서 영혼 자신을 깨끗하게 (1베드 1,22) 하고, 자신 속에 심어진 말씀으로 구원(야고 1,21)되도록 해야 하는 영혼이다.또한 영혼은 자신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을 거슬러 자신을 지킴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복음이 되고(1베드 2,11), 믿음을 지켜 자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1베드 1,9)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영혼(1베드 4,19)은 평안하고 건강을 누리는 영혼(3요한 1,2)이 된다,
이렇게 영혼은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차리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기도하며, 어려움에서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를 돌보는 모습으로 묘사 되어 있다.
 
2-2.“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영혼
 
2-2-1.영혼과 육신의 단일성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라고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상징의 언어로 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창조주에게서 비롯되는 기원의 단일성과 물리적인 육신과 영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본성의 단일성을 통하여 전인(全人)적 존재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영혼은 ‘인간의 생명’, ‘전체적 인격’,을 의미하기도 하며 인간의 내밀한 부분과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은 ‘영혼’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영적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 역시 창조주를 찬미하게 하는 ‘하느님 모습’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이다.
이렇게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통하여 생명을 주는 영혼으로 변모되어, 영혼은 물리적인 육신이 인간의 육신으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육신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며,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 형성된다.
 
2-2-2.그리스도의 영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년시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 하여갔다.”(루카 2,52)고 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한계를 지닌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마리아를 통하여 육신과 영혼을 취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히브 2,9)을 알게 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안에서 당신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도록”(1고린 15,3)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맛보도록’, 곧 죽음의 상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과 부활하신 순간 사이에 그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도록 하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26 항에서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인께서 죽임을 당하신 “생명의 주관자”에 대하여 인용한 글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다 해도, 그 신성이 육체와 영혼에 따로 따로 갈라져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위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영혼은 처음부터 ‘말씀’의 위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죽음으로 서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 영혼과 육신은 각기 동일하고 유일한 말씀의 위격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그분의 영혼과 육신과의 관계의 신비는 우리 존재를 생각하게 해 준다.
 
2-2-3.교회와 영혼
「가톨릭 교회 교리서」 797항에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를 우리들의 정신, 곧 우리들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가지는 관계와 같다.”라고 설명하며 이레네오 성인의 글을 인용한다.
 
과연 하느님의 선물은 교회에 맡겨졌다.……그리스도와 이루는 친교, 곧 불멸의 보증이며 우리 신앙의 확인이요 하느님께로 오르는 사다리인 성령이 교회에 주어졌다.……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고, 하느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과 교회의 관계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신과 가지는 관계처럼 본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온전히 그 몸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각 지체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고린 6,16)으로 만드신다. 교회를 인간의 영혼처럼 이해하는 모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몸과 성령의 궁전인 영혼의 비유로 보면, 교회는 한 영혼과 한 마음으로 온 세상 곳곳에 퍼져있지만, 한 집안에 사는 것과 같이 다양성 안의 일치와 풍요로운 선물과 은사를 누린다. 이렇게 교회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화해시키어 하나으로 일치를 회복시킨다.
교회는 죽음으로 나눠진 죽을 몸(로마 8,11)은 썩게 되지만, 예수 부활의 능력으로 그 몸을 다시 그의 영혼에 결함시키어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준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2-2-3.육신을 구하는 영혼
교회는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의 인장을 새겨주어 하늘의 능력을 갖게 하여 하느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또한 성경과 교회의 전승은 인간은 자기의 ‘존재의 심연’인 “그들의 가슴 속에”,(예레 31,33)에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전해 내려온다.
아기 예수의 테레사 성녀는 영혼이 머물러 힘은 얻는 것에 대한 글을 보면,
 
기도 중에 내가 머무는 곳은 무엇보다도 복음서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내 불쌍한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복음서에서 나는 늘 새로운 빛과 감추어진 의미와 신비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영혼은 육신과 긴밀한 결합으로 전인적 인격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겨나는데, 이 갈등은 육신의 덧없는 것을 갈망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욕망과 하느님을 향하려는 영혼과 관계에서 육신과 영혼이 하나가 되려는 갈등이다.(1베드 2,11) 영혼이 이 갈등에 대처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는 첫째 현세 사물에서 떠나고, 둘째로 헛된 명예나 영광에서 떠나고, 셋째는 감각의 쾌락에서 떠나서 넷째로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만 머물러 육신을 이끌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영혼이 몸을 돌보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한 줄기 빛으로 육신이 하느님을 섬기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영혼이 할 일은 몸의 오관을 정화하여 성령을 따르게 하여 생명-활력을 갖게 하는 일이다. 이 세상 것은 육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육신은 세상 것에서 도움을 받고 인간이 세상에 살게 한다. 그러나 세상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몸을 기도하는 몸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도하는 몸(肉身)을 위한 수련은 다가오는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고, 다가오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도록 하는 단련이 요구 된다.
 
 
3.영혼의 성장
하느님을 향하여 성장하는 영혼의 모습은 마치 한 인간의 인격성장과도 유사하게 변모되어 간다. 공통적인 점은 한 영혼이 어둠에서 벗어나와 인식의 밝음 빛을 향한 영혼의 움직임이고, 이 과정에서 사막의 고독 속에서 하느님의 빛에 의해 하느님의 영혼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1단계: 여정을 시작하는 단계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벗어나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 비유해, 영혼이 첫 여정(방랑)을 시작했다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영혼이 앞으로 나가면서 통과하고 머물 곳(모습)과 처신해야할 자신의 모습을 알기 시작하는 단계다.
2단계: 외적 내적으로 궁핍한 지경을 아는 단계다. 여정을 시작하고 보니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덕을 닦아야할 필요성을 아는 단계다. 편안할 때보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그 고생을 극복함으로 덕(힘)을 갖추게 되는 단계다.
3단계: 위험과 두려움을 느끼는 과정으로 홍해와 마실 물도 없는 곳에 다다른 이스라엘이 그 상징이다. 이 단계에서는 시련과 유혹의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할 지혜를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배우는 과정이다.
4단계: 유혹의 단계다.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의 모습을 알고는 있지만, 이 희망 속에는 환상도 있게 마련이다. 이 환상 속에 있는 유혹, 특히 천사의 탈을 쓴 사탄의 유혹을 식별하는 식견을 배우는 단계다.(2코린 11,14 참조)
5단계: 하느님을 찬송하는 단계다. 이제 영혼은 건강해 져서 영적 존재가 되어, 식별 능력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송하는 단계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끌어주고, 치유해 주심을 알고 더욱 하느님께 섬기게 된다.
6단계: 수고의 단계다. 하느님에 의해 건강해진 영혼은 수고를 받아들이고, 매사에 감사하고 불평하지 않는다. 성숙한 어른처럼 자기가 하는 일이 하느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
7단계: 비평이나 비난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분별하는 영혼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1코린 2,15 참조)
8단계: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단계다.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영광을 알고, 이에 따른 자신을 희생하는 여정을 계속하는 수양修養-discipline)능력을 가지게 된다.
9단계: 열정(compassion)의 단계다. 열정은 상황이 아닌 선택능력에서 나오는 열정은 부질없는 욕망이 사라지게 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육체의 욕망이 함께 죽어버린 것을 의미한다.(로마 7,4 참조)
10단계: 질서정연한 상태(affectio ordinata)에 이른 단계다. 자신의 밖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이 이제는 자신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짐을 아는 복된 단계다.
11단계: 칭찬과 긍정의식 안에 있는 유혹에 투쟁하는 단계다. 지속되는 칭찬 속에 있는 유혹에 대처하는 단련을 통해 영혼이 나약해지거나 부패하지 않게 하는 단계다. 바오로사도는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 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2고린 12,7)
 
12단계: 무아지경에 이르는 단계다. 자신을 잊고 영적인 기쁨으로 가득 차는 단계다.
13단계: 새로운 죽음에 이르는 단계다. 이것은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죽음을 의미한다.
14단계: 분리의 단계로 세상을 벗어나는 단계다. 세상에 살지만 자신은 세속적인 행동 속에도, 육체적인 요소 속에도, 허영과 감각적인 말 속에서도 머물지 않는다.
15단계: 마지막 하느님께 들어가는 단계다. 영혼은 지혜로 가득차고 하느님 안에서 정화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자격을 갖춘 단계다.
 
 
4.영혼의 영(힘)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
 
하느님을 담는 그릇(空)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대표하며, 하느님의 영광이 있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空), 가장 가치 있는 곳(空)이다. 그리고 사람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몸(肉身)은 영혼을 통해서 생명력을 얻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전인적(全人的)으로 성령의 성전이 된다. 그리하여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하여 자신들의 창조주를 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신의 ‘형상’이라 할 만큼 심오하며, 영혼과 육신은 하나의 자아가 되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영성 또는 영적이란 말은 감지하가 어렵고 애매모호에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 영을 감지하고 알아차리려면, 영혼의 움직임에 머무는 일이다. 영혼의 움직임은 자신의 영혼이 향하는 곳, 다른 사람과의 연결 선(線), 역사와 자연 세계가 이루어져 나아가는 힘(力), 내 안에 일어나는 느낌(現動), 삶의 신비 등을 직면할 때 알아차릴 수 있다. 자신 안에서 자신의 영과 다른 영의 현동(現動)을 알아차리는 것을 영성 또는 영적차원이라 할 수 있다.
영혼의 힘은 영과 의지와 열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영은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깨닫게 해준다. 둘째로 의지는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수양(discipline)의 모습을 갖게 한다. 셋째로 열정은 깨달음과 의지 즉 지성과 감성에 의해 선택한 열정이 열정(召命)을 일으키는데, 이들이 하나로 모일 때, 영혼의 힘이 된다. 이런 형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모범이 그리스도의 영혼이다. 시공(時空)의 역사적 조건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모습과 태도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과 의지와 열정을 다해서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영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놀라운 권위와 힘 있는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選擇)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의지(뜻)와 일치해 있었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능력과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열정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에 현존하여, 영혼은 영의 힘과 욕구와 신념(召命)의 힘으로, 삶을 창조해 내는 추진력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된다.
영혼의 차원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 보면, 첫째 차원에서는 매일의 일상에서 하느님을 찾는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는 영혼이 사물을 오감을 통하여 감지하는 차원으로 하느님을 대략 인지할 뿐이다. 둘째 차원은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차원이다. 하느님을 자유로이 선택 했지만 아직은 자신과 일상에 매여 있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예로는 베드로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l6,l7)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도, 그는 예수님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단계에서는 단지 신비의 주변을 맴돌 뿐, 다는 알아듣지 못한다. 셋째 차원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지만, 영혼이 자기 안에 머무는 상태이다.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의 영혼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삼의 신비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차원이다. 이 경지에서는 영혼은 하느님을 외부에서도 또한 내부에서도, 알아듣기도 하고 알기도 하며, 보기도 하고 스스로 보이기도 하며, 자신 안에 현존을 알기도 하고 동시에 이웃 안에 현존도 알아차리는 차원이다. 이것이 바로 완성이다. 그러나 어느 한 차원에만 머무는 것을 고집해서는 안 되고, 세차원이 하나의 차원이 되어,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전인적으로 일상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이루어야 한다.
영혼이 자타(自他)를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이를 세 과정으로 보면, 첫 과정은 타자(他者)를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셨다. 둘째 과정은 자신을 알아차리는 자아의식의 과정으로 예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알고 계셨다. 세 번째 과정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고 아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영혼은 자신 깊은 곳에서 이런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영혼이 자기의 존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창조(現動)를 이루시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침묵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인간의 영혼은 천사들보다 못하게 만들어 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공(時空)을 넘어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시공의 한계의 제약을 받고는 있지만, 모든 제한적인 지성을 넘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의 현동(現動)이 이루어진다.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에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나,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에 영혼의 힘인 하느님을 향한 깨달음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이 불꽃이 꺼지지는 않지만, 생성 소멸하는 외적인 것에 대한 감각적이고 이성적 지식인 표상의 언어들로 인해 이 영혼의 불꽃은 가려지기도 한다. 이 불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영혼 깊은 곳에서는 성령의 현동(現動)으로 하느님의 찬란한 빛을 꺼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달음의 길에 이르고 본래의 형상인 아버지 하느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다.
이렇게 영혼은 영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과 하느님을 향하는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선택하여 수양하려는 의지와 깨달음과 수양으로 소명의식을 주는 열정이 하나로 이루어진 삶의 힘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혼이 이 영과 의지와 열정, 이 셋이 함께 할 때면 하느님의 현존(現存)의 결실을 얻게 되지만, 참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현세에서 육신의 갈망에 따라 방황하게 된다.
 
 
5.영혼의 손상과 치유
영혼의 순수(純潔)함: 영혼의 순수함을 진단해보는 몇 가지 기준을 보면, 첫째 영혼이 자기의 소명의식을 점검하는 일이다. 그 순수함이란 사물과의 관계에서 산만하게 분열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서, 영혼이 자기의 소명을 확인하고 투신하는 일이다. 둘째는 영혼의 소명의식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게 하는 집착된 상태를 보는 일이다. 즉 자신의 삶을 살펴서 투신하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하게 하는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수련을 해야 한다. 셋째는 영혼의 결단력의 상태를 보는 일이다. 결단력은 영혼의 기우러진 모습을 보는 일인데, 자기의 영혼이 하느님과 자신의 육신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 지를 살펴 하느님께 나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영혼의 수양(修養): 영혼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수양(修養)의 상태를 진단해 보면, 첫째는 영혼 자신의 소속감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자기의 삶이 자기를 향하여 나가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성찰이다. 둘째로 자신의 삶의 태도나 행동양식이 완전히 하느님 안에 자리 잡고 하느님께 속해 있는 의식의 상태를 점검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것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인 점검을 하여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는 자신의 영혼을 만지고 느끼어 의식할 수 있도록 자아의식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즐기고, 자기의 영혼이 하느님을 즐기는 장소(空)를 잘 돌보아야 한다. 이 때 자신의 영혼은 잠심(潛心)하여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혼의 각성: 다음으로 영혼과 육신은 그 관계에 있어 육신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 또한 육신을 간직하는 하여, 서로 하나가 되어 자아의 현동(現動)을 이루어 나간다. 육신은 자신의 오관으로 세상 사물을 인식하고, 영혼은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은총-사랑을 알아차리어 육과 영이 함께 전인적으로 하느님을 향유한다. 이런 과정에서 영혼이 자신의 하느님을 향유(享有)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리(空)를 마련하기 위한 수련이 필요하다. 영혼은 육신에게 생기-활력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육신의 생기(生氣)의 흐르는 방향은 서로 다르다. 영혼은 하느님을 향하고, 육신은 땅을 향하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식별하는 방법은 그들의 진동에서 그 차이를 알라볼 수 있다. 육의 진동은 크고 욕(慾)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영혼의 진동은 그 진동이 고요하고 생동감이 있다. 자아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육신의 생기를 따라가면, 영혼은 자기 본연의 생기를 잃게 되나, 영혼을 따르면 육신도 하느님을 향유하게 된다. 그러나 영혼(自我)이 보고 이해했다고 믿는(의식) 것이 모두 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없기에 영혼은 자신을 무조건 의존(愛着)하지 않고, 하느님의 현동(現動)을 따라가는 수련이 필요하다. 즉 자신의 영혼(自我) 안에서 하느님과 그의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빛(空)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과 영혼이 한 음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련이다. 영혼이 처음부터 순수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수련과정에서 자주 점검(省察)을 해야 할 것은 의식(靈魂)의 수준이다. 자신의 의식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지 또는 땅을 향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6. 영혼이 해야 할 수련.
영혼은 영원한 영의 세계와도 교감을 갖고, 물리적인 시간과도 교감을 갖는다고 본다. 영혼이 하느님과 닿아 있을 때는 본연의 모습을 가지게 되지만, 물리적인 것에 닿아 있으면 물질에로 기운다. 그러므로 영혼은 하느님을 깨달아 알고,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서 하느님의 은혜로 영혼이 점점 더 커지고 선명해져서 하느님의 더 많은 은총을 수용하게 된다. 이렇게 영혼의 눈이 하느님의 빛을 향유하도록 수련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담은 영혼은 하느님의 영원성으로 인해 멈춤이 없는 현동이 이루어진다.
 
6-1.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현동(現動)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충만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흘러나오기에 모든 것 안에서는 하느님의 현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성삼의 엘리사벳 성녀의 글을 보면,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그 무엇도 저의 평화를 뒤흔들거나,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순간마다 당신의 심오한 신비로 더 깊이 데려가 주소서. 오, 나의 변치 않는 분이시여!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소서. 제 영혼을 당신의 천국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거처, 당신의 휴식처로 삼으소서. 제가 결코 당신을 그 곳에 홀로 두지 않고, 온전히 그 곳에 머물러 온전히 깨어 있는 신앙으로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며, 당신의 창조 활동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하소서.
 
엘리사벳 성녀는 이 글에서 자기의 영혼이 이미 하느님 안에 있고, 또한 자기 영혼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그 기쁨은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깨닫는 즐거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영혼에게 주는 충만함이다. 하느님의 모든 빛과 선물과 은총이 당신의 창조 활동인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영혼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물들을 통하여 흐르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주시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므로 영혼이 이 신비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신다면 영혼은 무(空)와 같을 것이다. 이렇게 영혼은 깨어 있어야 한다.
 
6-2.빛을 향하는 움직이는 영혼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발현(發顯)하기를 바라고, 하느님도 당신 안에 영혼이 생동하기를 바라신다. 영혼은 이를 갈망하고 하느님을 이를 행하신다. 하느님의 힘(現動)과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인 의지의 만남은 하느님의 영혼의 빛 안에서 하느님의 현동(現動)으로 영혼은 하느님의 빛이 되고, 하느님으로 인해서 모든 피조물은 빛이 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느님의 빛으로 인해 하느님의 빛의 형상이 되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고, 아버지의 아름다움과 자비는 바로 우리의 아름다움과 자비가 된다. 이런 움직임은 “마라나 타”(Maranatha), 곧 “오소서, 주 예수님!”이라고 주님을 부르는 음성은 우리의 영혼에서 성령과 신부(新婦)의 사랑의 새로운 창조가 이룬다. 이렇게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는 마치 물과 물결처럼, 빛과 어둠처럼, 존재와 무(無)처럼 하느님과 영혼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진다.
 
6-3.영혼이 깨닫는 하느님 안에서 동일성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4-45)
 
비오 12세의 회칙에서 하느님의 단일성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에서 다시 단일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열림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창조주에게서 비롯되는 우리 기원의 단일성 안에서……,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본성의 단일성 안에서, 모두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세상 삶에서 이룩할 사명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사람이 천부의 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대지, 곧 주거의 단일성 안에서, 하느님 자신, 곧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초자연적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모든 것 안에서 인류를 바라본다는 것은 놀라운 장관입니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단일성과 동일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느님 안에서는 지혜도 선도, 선도 악도, 삶도 죽음도 하느님의 섭리에 해당되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영혼이 얻게 된다. 그리고 세상 삼라만상은 모두 하느님을 향하고 있고, 영혼은 그 갈망을 알아차리는 특권과 창조주에게서 비롯되는 단일성을 향유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6-4.하느님과 합일하는 영혼
영혼이 위와 같은 여정을 거쳐 하느님의 현존에 머물면, 영혼은 영혼의 희망과 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혼의 이런 요구들이 사라지면, 영혼은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말씀하시는 전무(全無-todo y nada)에 도달하게 된다.
영혼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단계를 구분해 본다면, 첫 단계에서는 영혼의 희망과 갈망과 두려움이 약해진다. 다음 단계에서는 희망과 두려움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진다. 셋째 단계에서 영혼은 이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넷째 단계는 이들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않게 되는 망각이다. 그저 하느님의 현동이 뿐이다. 영혼이 자기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빛은 미약하고,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혼이 이 현존에 자주 머무르면, 하느님과의 합일은 어느 순간 저절로 이루어진다.
 
 
나가는 말
‘영혼의 본 모습을 찾아서’란 주제로 글을 만들면서, 내 손안에서 영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영혼은 사람이 자아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듯이, 내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magnificat) 하며”하고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을 향하는 내 영혼의 모습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혼을 성찰(의식성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혼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하고, 언제나 영혼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 기뻤다.
또한 이런 영혼이 자랑스러워지는데, 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빛으로 창조(다바르)를 이루심에 머무를 때, 영혼은 새롭게 힘을 얻고, 내 영혼이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느끼기 위해서, 먼저 와 닿는 것은 영혼 안에 있는 어둠이다. 이 어둠에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빛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영혼의 침묵이 더욱 기도하는 내 모습을 만들어 준다. 허공에 머무는 침묵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주는 영혼의 자리(空)가 언제나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이루신다.
본고 “영혼의 본 모습을 찾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어둔 밤’시 보다 더 좋은 글을 만들 수 없어서 이시(詩)로 마무리한다.
 
1.
어둠에서 기다리니,
그리움이 빛이 되었네!
아! 드디어.
 
 
나도 모르게
 
 
 이뤘네!
 
 
내 영혼은 고요해
 
 
 
 
 
 
2
 
.
어둡지만 명료하네,
 
 
나도 모르게 이르렀네,
 
 
나는 변모됐네!
 
 
아, 드디어!
 
 
아직은
 
 덜 명료하고 가려져 있어도,
 
 
내 영혼은 편안해졌네!
 
3.
이 기묘한 밤!
나를 봐도,
내가 봐도 알 길이 없네!
나도 모르게
어느 빛도 안내도 없이,
 
가슴에 이는 불꽃만으로.
 
4.
나를 인도하는 이 빛!
한낮의 빛보다 더 밝은 빛!
내가 잘 알고 있던 분이,
나를 기다리던 곳.
아무도 모르는 그 곳으로.
 
5.
아! 나를 인도하는 이 밤!
새벽보다 더 상쾌한 밤이여,
이 밤은.
사랑으로 맺어 준 밤.
사랑으로 변모되어 사랑이 되었네.
 
6.
피어나는 내 가슴에,
그분만을 간직하고,
고요히 계신 곳에서,
그분을 만지며,
속삭이듯 불렀죠.
 
7.
산들바람 스치니,
그분의 잠금 쇠가 열리고
부드러운 그 손길!
내 고집에 상처내시니,
드디어 내게 이루어졌다.
모든 감각의 멈춤이.
 
8.
나는 그대로 나인데,
잊힌 것도 잊으니,
그분과 얼굴을 맞대었네,
모든 것은 떠나갔고, 나도 잊으니,
나를 돌보는 것도 잊고,
청초한 가운데에.
 
 
 
 
Anima Christi, Sanctifica mae. Amen.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원문: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Città del vaticano,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메튜 폭스 해제 주석, 김순현 역. 분도출판사, 2006.
로욜라 이냐시오. 「영신수련」
아빌라의 데레사. 「자서전」. 「사랑의 산 불꽃」. 「영혼의 성」
십자가의 요한. 「어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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