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름, 영국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그해 6월부터 두 달 반 동안
나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칼라일 병원의
중환자실에 머물고 있었다.
한순간의 사고는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생의 차선이 크게 변경되었다.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지켜
보며 나는 마치 눈물샘이 고장난 듯 흐느끼고 있었다.아마두 평생 흘릴 눈물
을 그때 다 흘렸으리라.
늘 낭만과 신비로 가득찬 '백야'를 동경했지만 내가 현실 속에 맞닥뜨린
'백야'는 고통과 슬픔의 '백야'였다.밤11시가 넘어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새벽 3시가 되면 뿌옇게 밝아왔다.
1주일째 내리는 여름비는 한국의 장마처럼 하염없이 중환자실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아내는 벌써 3주일째 혼수상태. 사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2년
간의 유럽생활을 마치고 맞이하게 될 한국 생활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리워하던 친지들을 만나고 고국 음식을 맛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귀국을 한달 남겨놓고 나는 추억을 만들자며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제안했고 아내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폭풍의 언덕이 펼쳐진 스코틀랜드가 우리의 최종 여행지였다. 런던을 출발해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거쳐 우리는 다시 런던으로 향하고 잇었다.이제 집이
있는 독일 뮌헨으로 돌아가면 이삿짐을 배로 부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순간 예고 없이 불행이 찾아왔다. 자동차를 길거에 잠깐 세운 일이 이렇게
큰 결과를 불러올지 누가 상상이나 햇을까?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물건을
찾던 아내에게 다른 자동차가 돌진해 왔다.
피의자는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날도 그는 두통약 여러 알을
먹은 뒤 운전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한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달려온 자동차 밑에 깔려 온몸으로 자동차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한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자동차를 번쩍 들어 그 아래 깔린 나를 끌어냈다.
쓰러져 있던 아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는 바지에 많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잇었다. 딸애는 다행히 튕겨져 나간 우리 자동차 안에서 창문에
매달린 채 울고 잇었다.
"당신, 살이 있어? 정신차려 봐!"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내는 알아
들었는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핏기 가신 얼굴이 평온했다.
"하느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내는 살아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서울 생활은 24시간만으로 부족하다. 나는 늘 일에 쫓겼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지만 늘 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재충전과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도망치듯 독일 대학에 연수를 신청했다.
하지만 서울시 전문직 공무원이었던 아내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아내는
직장생활을 하다 넉 달 전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간 동생이 마음에 걸렸고,
홀어머니만 덩그렇게 남겨놓아 발길이 덜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서 쓰러져 있다니!
아내는 구급차에 실리면서 "나는 괜찮아요 민주가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한다. 오히려 딸애를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그렇게 신비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두 시간이면 끝날거라는 수술이 여덟 시간을 훌쩍 넘기고, 혼수상태로
실려나오는 아내를 발견한 나는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아내의 왼쪽 다리가! 움녕이 뒷걸음질치는 것 같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하느님이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주실 수는
없어, 내가 뭘 잘못햇다고 아내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는 건가?'
나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원망햇다. 그러나 아내의 다리 절단은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아내는 태중교우였다. 학창시절 성가단원과 교리교사를 맡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우리 집안도 어머니와 형수, 누나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독일 뮌헨에 도착하자 한인성당을 찾아 나섰다. 나는 매주 아내
를 성당에 태워다 주고 교민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로 성당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에서 신앙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독재에 맞서 사회주의 이론이
범람했던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유도 있지만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일부 고위 성직자들, 특히 일부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의 이중적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모습이 가정과 교회 밖에서 얼마나 탐욕
스럽게 변하는지 목격하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기에 그들이
믿는 이상한 하느님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당시 뮌헨에는 신부·수녀·목사들이 많았다. 교구와 수도회, 교회에서
선발돼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러온 분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서관 주변 비어가르텐에서 만나 현안
을 토론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다.
이들은 한국에서 만난 성직자들과 전혀 달랐다. 특히 유학 온 신부님·
수녀님들의 소박한 소습은 종교와 성직에 편견을 갖고 있던 나를
놀라게 했다.
로만칼라와 베일 속에는 소박과 정결뿐 아니라 한국 가톨릭의 진보성
과 합리성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들이 사는 기숙사와 성당내 숙소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한결같이 책 수십 권과 옷 몇 벌,
컴퓨터 1대가 이들이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이에 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것ㅇ르 가졌는지. 이들이 믿는 빈손의
하느님,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성가대에 계신 예수회 김용해 신부님을 만나면서 나는 가톨릭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그리고 이듬해 2월,뮌헨 프라우엔
대성당에서 독일 추기경님한테서 세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빗줄기에 내 눈물도 합쳐졌다. 첫번째 수술 후 고비
를 넘기는가 했더니 다시 수술 부위가 감염되면서 아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사고의 충격으로 양쪽 신장이 기능을 멈추자 체온이 42도를 넘어섰고
혈압도 270도까지 치솟았다. 인공호흡기와 인공신장기,각종 약물장치
등 10여 개의 호스를 몸에 꽂고 있는 아내는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해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사람이 과연 내 아내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주일 뒤 아내는 한 번 더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수술 부위가 감염되면서 아내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아!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나는 하느님께
아내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아내의 주치의는 마지막으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아내가 48시간
을 넘길 수 없다고 말하며 대퇴부까지 절단하는 수술에 동의하여
수술 중 아내가 사망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아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사고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달려온 장모님은 주치의 말을 듣더니 오히려 냉정해지셨다. "이제
자네게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네. 죽음을 준비하게."
여섯 살 된 딸애는 나와 외할머니 눈치를 살피며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내 입에서는 쉼 없이 성모송이 나왔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소서….' 묵주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깨어나 쓰러져 잘때까지 손가락을 묵주삼아 성모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잠결에도 성모님께 '당신도 그렇게 수종하게 아끼던
외동아들이 눈앞에서 숨져가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이 외면해도 당신은 그 고통을 알고 계신 분이 아닙니까?
나에게 당신의 기적을 보여주십시오.나의 고통을 거두어 주십시오.'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는 항의하며 성모님께 매달렸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실려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침대에 40대
스코틀랜드 여성이 입원했다.위암 환자였던 이 여인은 혼자 정원을
산책하고 책을 소리내어 읽을 정도로 건강해 왜 응급실에 들어왔을
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3주 후 갑자기 이 여성은 숨을 거둿다. 환자를 둘러싼 가족
들은 임종 직후 울음을 삼키며 손을 잡고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
같으면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발버둥치고 통곡을 한텐데'하는 생각을
하는데 한 사람씩 나에게 다가왔다.
"비록 내 아내는 숨졌지만 당신 부인은 젊고 할 일이 많아요.
반드시 하느님이 당신의 부인을 살려주실 겁니다.". "우리 언니가
못다 한 삶을 당신 부인이 살아가길 바랍니다." 슬픔에 잠겨 있어
야 할 이들이 오히려 나를 포옹하며 위로했다.
나는 또다시 바보처럼 그들을 껴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그래,
나는 감정 표현에 솔직한 동양인이잖아' 하고 말이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칼라일 병원 성당의 성공회
신부님도 아침저녁으로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찾아 기도를 올려
주셧다.
48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주치의 말을 듣고 독일에 계신 김용해
신부님한테도 전화를 했다. 독일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계셨던
김 신부님은 정말 산 넘고 강 건너 다음날 스코틀랜드와
북잉글랜드의 국경지방 오지의 병원을 찾아오셨다.
아내의 상황을 설명드린 뒤 종부성사를 부탁하자 신부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런던의 한인성당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유럽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시간을 정해 아내의 소생
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고 한다. 한인 교인들의 기도소
리가 하느님께 전해진 까닭일까?
마지막 수술을 받고 희망이 없을 것 같다던 아내에게 며칠 뒤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혈압이 떨어지고 신장기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대퇴부로 감염되면 몇 시간을 넘길 수 없다던 영국인 의사는 장례
절차는 필요 없을지 모른다면 조금씩 희망을 전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몸에 붓기가 빠지면서 아내는
사람 몰골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정말 기적처럼, 거짓말처럼 아내의 의식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야, 아니, 엄마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나와 딸애 그리고 장모님은 사지에서 돌아온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독일 땅을 밟았다.그리고 1년 동안 독일병원에서 가혹한 재활
치료를 받은 뒤 귀국했다.
귀국한 뒤 우리 나라가 장애인과 장애환자들에게 지옥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됐다.많은 사람들이 독일이나 미국에 살지
않고 왜 귀국했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곳이 우리가 자라나고 살아갈 곳인데 왜 외국에 살지 않고
귀국했냐고 묻다니?' 하고 말이다.
우리 가족이 두 달 반 동안 영국 오지의 작은 병원에서 느꼈던 애를
끓을듯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따뜻했던 영국 의료진의 친절함과 환자를 위해 모든
것이 설계되고 움직이느 병원 시스템이었다.
가끔 나는 하느님 아내에게 죽을 듯한 고통을 주시고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되새겨보곤 한다. 그때마다 나처럼 신앙심 없는
사람이 나서서 한순간에 교통사고나 뇌졸증 같은 후천적인 이유로
평생 장애를 알고 살아갈 환자들을 위한 일을 해보라고 하시는 것
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님과 강지원 변호사님, 김용해 신부님,
김성구 샘터나 사장님, 박원순 변호사님 등이 힘을 합해
정말 이 땅에 우리 가족이 경험한 것과 같은 아름다운
병원을 지어보자고 '푸르메 재단'을 만드셨다.
하느님을 믿는 많는 분들이 '푸르메 재단'에 뜻을 모아
하루빨리 아름다운 병원을 세웠으면 좋겠다.
아내는 병원이 세워지면 절망에 빠진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나처럼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도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는데 당신도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겠단다.
'하느님! 하루빨리 제 아내의 꿈이 이뤄지게 해주소서.'
* 푸르메 재단(www.prume.org)
전화: 02-720-7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