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떠난 소록도 두 천사 /
오태진/조선일보수석논설위원(착한 이웃2006/1월호)
남도의 끝자락 ‘작은 사슴섬’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ㆍ주민들은 새해 들어서도 성당과 치료소에 모일 때마다 두 천사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43년 동안 환자들을 보살피다 지난해 11월 귀국한 오스트리아 수녀 두 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다.
그렇지만 주민들이 겪은 이별의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일흔한 살의 마리안느Marianne Stoeger 수녀와 일흔의 마가렛Margreth Passarek 수녀는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ㆍ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몰래 섬을 떠났다.
두 수녀님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주민들에게 감사했다.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대학병원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님은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광주대교구를 통해 소속 수녀회까지 전해오자 1962년과 19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다.
인도에서 반년 동안 한센병 교육을 받은 두 분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 없이 ‘마리안느&마가렛’이라고 표찰이 붙은 방에서 환자를 보살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환자들에게 분유를 타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병원에만 머물지 않고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어 들고 마을을 돌았다. 환자 씻기고 머리와 손 발톱 깎아주는 일은 기특한 요즘 젊은 간호사들 덕분에 면했다.
1943년 전 마리안느 수녀와 같은 해에 소록도에 온 어느 여자 환자는 수녀님의 어머니와 인상이 비슷했다. 그래서 마리안느 수녀는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는 20년 뒤 나이 아흔셋에 마리안느수녀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몽땅 떨어져나간 손들과 표정 없는 얼굴들을 어루만지며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온 한평생, 꽃다운 20대는 일흔 할머니가 되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님을 ‘할매,라고 부르며 따랐다.
두 분 얘기를 전해 듣고 감동 받은 대구의 한 정상인 여성은 마리안느 수녀를 자주 찾아왔다가 수녀님의 소개로 완치 단계 환자와 결혼하기도 했다.
두 분은 그러나 세속의 찬사를 받는 헌신은 진정한 헌신이 아니라고 믿었다.
숨어 행하는 손의 기적과, 주님 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풂이 참 베풂이라고 믿었다. 두 분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히 물리쳐 상을 주려는 쪽이나 기자들을 고생시켰다. 10여 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가 마련한 훈장도 “받으러 갈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
훈장은 주한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 측이 작으나마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두 할머니는 일제 때 지은 단층 벽돌집에서 함께 살았다.
TV도 없고 눈에 띄는 가전제품이라곤 오래된 냉장고 한 대, 선풍기 한 대, 카세트플레이어 한 대가 전부였다. 두 분은 줄 줄만 알고 가질 줄은 몰랐다.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 봉사자 식비도 마다해 병원 측이 “식비를 안 받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고 으름장까지 놓은 끝에 간신히 손에 쥐여줄 수 있었다.
두 수녀님은 이 돈은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로 썼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 돈으로 나눠줬다. 두 수녀님의 귀향 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소록도 공원에는 별 모양 공덕비가 서 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리고 두 분보다 몇 년 앞서 귀국한 오스트리아 수녀 마리아를 기리는 기념비다. 세 분 모두 이름이 ‘마’로 시작해서 소록도 사람들은 ‘세마비’라 부른다.
마리안느 수녀는 10년 전쯤 소록도로 찾아간 조선일보 기자를 내내 피하다 병실 계단에서 마주치자 스치듯 비켜가면서 말했었다.
“여기서 죽으면 여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죽으면 그곳에 묻히는 거죠. 하느님이 부르시면 그저 죽은 자리, 그곳 풍습대로 묻히고 싶습니다.”
두 수녀님은 그렇듯 ‘세마비 아래 육신을 누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소록도엔 묘를 쓸 수 없다. 국유지이기 때문이다. 숨진 한센병 환자들을 화장해 모신 ‘만령당’과, 그곳이 비좁아 옆에 만든 봉분 하나가 있을 뿐이다. 결국 두 수녀님은 소록도에 묻히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디에 묻히느냐를 떠나, 늙고 쇠약한 육신이 행여 환자ㆍ주민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을 것이다.
주민들은 두 분을 ‘살아 있는 성모마리아’라고 부른다. 두 분이 외로운 섬, 상처 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위로한 헌신과 희생은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다. 박애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용기라는 말처럼 두 분은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이다.
두 분이 뿌린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