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치유의 은사 (퍼온 글)
우리 생활들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인간들은 무척이나 사랑에 약하면서 사랑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하며 갖은
희노애락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사랑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무엇을 위해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무조건 결과만 쫓아가려고 하는데 결국 이러한 결과에만 쫓아다니다 보면 삶은 즐거움 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 속에 빠져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과 시련의 아픔을 털어 버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시련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서슴없는 행동을 자행하면서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만을 피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들을 피하려 하는 마음 때문에 미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무당을 찾아가서 푸닥거리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우매함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창조주는 불쌍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서 권능과 권위를 가지기는 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애처롭고 불쌍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신다면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을 참으로 오묘하게 만드셨고 또 많은 배려를 하고 계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 속에서 고통이 없게 된다면 과연 내 자신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불행이 없다면 행복하다는 것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죽음이란 말이 없다면 현재 삶의 가치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한 마디로 생의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도 필요가 없는 생활이 되겠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적인 삶 속에서의 변화적인 발전은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고통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무엇인가 변화시켜야 하는 치료가 필요한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되겠고 긍정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문제를 발견하는 체제에 결함이 발생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변화에 도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썩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누구나 완벽해 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항상 완벽에 대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 자신이 처한 상태가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일시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불안해하며
또 다른 차원의 안정을 추구하려 하는 급급해진 마음으로부터 발생되는 행동이 그나마 현재 주어진 일시적 안정감 마저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불안정성은 인간의 유한성과 이 세상의 한계를 깨닫는 데 도움은 되고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한 인간의 불안정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세계의 유일한 안정적인 영역을 초월해서 크리스천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과 평화가 지배하는 곳을
숙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삼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미성숙하고 유아기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이 하느님께서 기적적으로 인간이 처해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치명적으로 믿음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일반적인 예를 들어 우리들은 기적에 대한 것이나 누가 어떤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그 신적인 계시가 내 자신에게도 내려주실 것을 갈구하고 그에 대하여서만 신들린 사람들처럼 쫓아다니게 됩니다. 또 그 때엔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잊고 무조건 외부로부터 무엇인가 받으려고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어 옛 말에 사돈이 땅을 사게되면 배아파 어쩔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과 같이 나도 땅을 사지 못할 때, 죄 없는 조상을 탓하고 원망하여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않는 것과 같이 지금 많은 성령의 은총이 나에게 내려지고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에게 주어진 그 신적 계시가 나에게도 똑 같은 은총을 내려지지 않을 땐, 실망과 허탈로 냉담을 하던지 종교를 원망하고 떠나게 되는 잘못된 신앙인들을 볼 수 있게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에게 각각의 능력을 부여하시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골고루 분포하시고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 다 같이 조화를 이루게 하셨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하여 인간들을 인도하시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강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가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지주가 되어 주시고 힘을 주시며 삶의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종교는 인간들에게 평화의 기쁨, 희망, 평안 그리고 위로를 가져다주는 것이지 결코 삶의 불행을 감소시키거나 가중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고통과 혼란,
번민과 두려움, 그리고 무의미한 죄의식 등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라는 명목 하에서 인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을 하셨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종교라는 명목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있으며
또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종교를 찾으면서도 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모순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더한 큰 문제점은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종교를 타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는 반드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삶의 문제와 고통, 그리고 난국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힘을 주기 위하여 살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의 삶 속에는 비크리스쳔 적이고 병적인 죄책감이 큰 자리를 잡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소유자이시며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무지와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우리 스스로가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병적인 자학 관념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복음적 요구는 미성숙의 증상인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회개와 회심은 아직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교관의 심층으로 들어가서 참된 신앙을 쇠약시키고,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들추어내어야 하고 자신의 속과 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러한 왜곡된 관점과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무지의 잔재를 끊어 버리기는 정말 어렵지만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 믿어라, 두려워 말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이들을 보살피고 계시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들도 돌보실 것이다.】
◈용서는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이자 사명의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을 하다가 들킨 여인에게
【 아무도 너를 단죄할 사람이 없으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임종을 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용서의 손길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란 것을 깨닫고
우리 신앙인은 참된 종교적인 신앙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는 우리 삶 안에서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를 힘겹지 않게 할 것이고 우리의 잘못된 신앙에서 참된 신앙으로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어른스런 신앙으로 다시 말한다면 미성숙한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어릴 적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며 어린이의 판단을 하였지만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어렸을 때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어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건강한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이나 정서적으로 많은 건강과 도움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지나온 세월들 속에서 살아온 혼란과 절망.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변화를 깨우치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시고 사랑으로 돌려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더욱 다듬질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심리학적으로도 우리 자신의 영적인 발전을 깊게 하고 정화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확히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참된 인간 행동을 강화시키고 이를 동기 부여해
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의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는 비전인 또 다른 영역을 더 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의 생명입니다.】
【 나는 부활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비록 죽었다 할지라도 살 것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도 모른 채, 목적 없이 방황을 하기도 하며, 고통받고 있는 정신적 쇠약은 노이로제나 정신병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고통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우리 삶 전체에도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풍요로운 통찰이 가져다주는 인간 행동과학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깊이를 분석하고 밝히는 데 더한 도움을 주고 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서적인 면과 영성적인 면의 두 영역을 동시에 함께 성장하여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 가르침의 초석이라 하겠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알 수 있고 하느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내가 지금 어떠한 조건에 처하여 있든지 내가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내 자신을 사랑할 때, 아버지께서도 나를 사랑하여 주실 것이며, 내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내가 그것을 이겨나가려 한다면 아버지께서는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혜와 인내와
슬기롭게 해쳐갈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