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놓는 열정!

2010. 6. 15. 오전 7:39:07

글자

엘 그레코 「성전의 정화」  1595년  106.3x129.7cm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6월의 말씀

뒤집어 놓는 열정!




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수님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열정적인 눈빛입니다. 그러나 그 눈빛은 누군가를 향해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출신의 한낱 목수의 아들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이스라엘 전체의 권위를 대변하는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릅니다. 오른쪽 사람들은
“이 자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라는 표정으로 서로 쑥덕거리고 있습니다.  
성전!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현존하시며 인간은 그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곳.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인간은 자기자신 외에 더 이상 합당한 봉헌물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 해도
목숨을 바칠 수는 없으므로 무엇인가를 대신 바치는 곳입니다.
 
또한 바쳐야 할 자기자신이 죄 투성이이므로 그것을 속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그 봉헌물이 양이나 소, 비둘기, 곡식과 술이었지만
현대에는 그것이 돈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이 지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하느님스러운 곳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성전에서조차 거래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곳이 아니라, 준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거래장소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즉 그들의 장사행위를 향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한 채찍질은 더 근본적인 것을 향한 상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 아니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오직 유일하게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온데 간데 없고 인간 서로의 이익과 실리추구,
가장 종교적인 행위 안에 깃든 더 교묘한 자기중심성과
명예욕 그것이 성전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의 드러남인 성전의 장사치들,
이들에게 장사를 허용하는 댓가로 장사꾼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이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이 채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향하고 있지나 않을까요?
성전 안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도 예수님의 채찍으로
뒤집어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지 않으며 굽은 듯 꼿꼿한
예수님의 몸 자세는 결코 누군가 혹은 성전 자체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뒤집어 놓고자 하십니다.
우리를 꽉 채우고 있는 하느님 아닌 그 무엇을 사랑의 하느님 아빠로 대신
채우시고자 하는 열망이 지금 예수님의 온몸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이 열정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꺼지지 않고 고요히 타올랐습니다.
그 열정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릴 수 없고 버려서는 안되는 열정인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것은 이렇듯 온 생을 바쳐 응답해야 마땅한 것이라는 사실이
성전을 정화하는 열정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채찍질에 당황하고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진 이들,
도대체 이자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이들,
모두 몸을 펴지 못하고 구부러진 군중 가운데
오직 예수님만이 당당하고 곧은 자세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헛된 열정도 가끔은 예수님의 채찍으로 뒤집어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지요?

그 채찍질을 당해낼 힘이 있는 이는 복됩니다.   
 

함께 기도하는 곳에 사랑이 움틉니다.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젊은이들은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그들이 올바르고 희망찬 가치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헛된 길에서 헤매는가는 많은 부분 우리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으로 다가가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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