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 이른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공휴일과 겹쳐 봉사자와 예비자가 약간 빠져 참석자는 35명이다. 우리 인생 자체가 순례이지만 성지순례에서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여러 번 받았기에 성지순례를 위한 9일기도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비자와 성지로 향한다.
예비자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백 일 동안 부모에게 평생 갚아야 할 은혜를 그때 한꺼번에 다 갚는다는 말처럼 영적으로 순수하고 예쁘다. 하느님은 이미 예비자들을 찜해놓고 은총을 주려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신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비자 봉사는 내게 가장 좋은 몫으로 주님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충북 진천 배티성지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고개라서 배티(순수한 우리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배티를 향해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가 점차 굵어진다. 그래도 걱정은 안 된다. 예비자와 함께 하는 순례는 주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예비자들과 묵주기도와 성지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창 밖 하느님의 창조물을 감상하다 보니 성지에 도착했다.
성지는 숲속 가운데 계곡으로 정말 숨어 지내기 좋은 장소였다. 순교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산속 깊은 곳에서 주로 옹기를 구워서 살 수밖에 없었다 한다. 어떻게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까? 커다란 주차장과 현대식 건물은 한적하고 조용하였다.
성당 안에는 처절한 고통을 받는 십자고상이 인상적이였다. 길동 형제님 반모임과 신내동 예비자반이 함께 미사를 하고 수녀님의 간단한 성지소개가 있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사제이며 백색순교를 하였고 12년 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순회하며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죽은 땀의 순교자이며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활동의 보금자리요 중심지라 했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비가 그치고 산천이 방금 그려낸 하느님의 수채화를 보는 듯 하였다. 십자가의 길을 하고나서 점심 식사는 가마솥에서 지어낸 밥과 깻잎지, 김치, 된장찌개 반찬이 무공해라 그런지 정갈하고 맛있었다. 식사 후 자유시간을 갖고 성지 안에 있는 14인의 무명 순교자묘로 출발하였다.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선상에 있는 14인의 무명 순교자묘에 도착하였다.
고개를 경계로 이쪽은 경기도 안성 저쪽은 충청도 배티여서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고개를 근거지로 숨어서 활동하다가 포졸들에게 쫓기게 될 때는 얼른 경계선을 넘으면 관할이 틀리기에 포졸들이 더이상 쫓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피신처로 활동하며 피해 다니다가 그 시대는 천주쟁이 목만 따오면 순교자의 모든 재산과 포상을 주기에 포상을 노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목만 잘린 14명의 목 없는 시체가 언덕에 나뒹굴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묵주를 손에 들고 있어서 신자인 줄 알게 되었고 순교자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 하나 없이도 그 당시 님들의 생활과 생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고통의 순교 성지는 예수님께서 달밤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교자들을 어머니처럼 뜨거운 정과 배려로 보살폈겠지. 아! 사랑과 은총의 땅이여!
주님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슬픔에 어쩔줄 모르고 헤맬 때 나에게 찾아오시어 깃털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게 배려하며 보살폈던 체험이 떠오른다. 주님의 돌봄을 받아본 이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가슴이 뜨거운 열기와 설렘으로 가득하여 성령과 함께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너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14개의 묘비와 나리꽃들, 서로 의지하며 어우러진 풀잎들, 고향과 집을 떠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생명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른 무명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현대는 피 흘리지 않지만 땀 흘리며 이웃에 봉사와 기도하는 평신도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고통의 땅은 은총과 축복의 땅으로 바뀌어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마치 은총이 쏟아지는 듯 했고 언덕 묘지 옆 주홍빛 하늘나리 야생화들이 만발하여 더욱 평화스러웠다.
무명 순교자들에게, 숨어서 미사 드리지 않아도 되고, 숨어서 주님을 찬미하지도 않고, 피흘리지 않고 선교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노형성당 예비자인 아버지와 신내동 예비자 모두 한 명도 빠짐 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간구하여 달라고 다시 한번 기도 드리고 평화로운 정경을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혼자 왔더라면 차 세워놓고 앉아서 하루 종일 피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성지를 다녔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며 일치감을 느끼는 성지였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예비자들에게 오늘 느낀 소감을 묻는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씩 느낌과 신앙에 대한 각오를 들을 때마다 예비자들의 예쁜 마음에 나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며 기도 드렸다. 예수님이 왜 어린아이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 오늘도 함께 하여주시고 깨달음과 사랑을 나누어주심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