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 (교구연령회 임원 성지순례 자료)

2005. 11. 1. 오전 9:23:53

글자

                                 갈매 못 성지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지점에 주포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나가 광천만(光川灣)이 깊숙히 흘러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성지 갈매 못 한국 가톨릭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제일 먼저 개발된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번 순례해 볼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갈매 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불뤼 안 주교, 오메트로 오 신부,위앤 민 신부 황석두 루가 회장,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더섯명과 5백여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불뤼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 5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4일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포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다불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 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불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네명은 갈매 못으로 향하는 250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기에 배론신학당의 집주인인 장기주가 합세하여 모두 5명이 함께 자진하여 죽음을 향해 떠나 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 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복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 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이들 5인의 순교 성인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충북 괴산군 소재)에 안장하였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 되었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끼'로 이장 하였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에 안치하였다 그 후 1960년대에 시복시성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갈매 못이 순교성지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 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신부이었던 정응택(요한)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 복자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 졌고 그 후 아담한 성당을 세워 순례자들의  미사 봉헌과 기도소가 되고 있다

               -주평국 지음 "하늘에서 땅 끝까지'-에서 발췌

댓글 1

  • 2005년 11월 1일 오후 6:20

    새로운것 배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