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건강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나비가 조용하게 지나가나 했더니 울릉도는 나비가 지나간 흔적이 너무 깊게 남았답니다.
나비가 지나간 다음 날은 하늘이 너무 고왔는데, 빨리 나비의 흔적이 매워지길 기도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립니까?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용서에 조건이 붙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이 줄곧 베풀어주시는 용서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전반에 흐르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의 주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과 계약으로 맺어진 백성 역시 남을 잘 용서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말씀으로 남을 용서함에 있어 그 한계를 없애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누구나 “감정을 가진 인간이 남을 무한히 용서해 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우리의 의문을 미리 다 아신 듯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왕에게 1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루 인건비를 40,000원으로 계산하면 종이 임금에게 탕감 받은 빚은 2조4천 억 원이고 친구가 그에게 진 빚은 4백만 원입니다. 그러니 비유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무자비한 종에 대해 의분을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욕하는 내가 무자비한 종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은 하느님 앞에선 우리 인간의 처지를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데나리온 정도 빚진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는지요?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는커녕 마치 자기가 하느님이나 된 듯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집회서 28,18절에 보면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성당에 나오노? 저런 사람이 우리 성당에 있다니 내가 남사시럽데이. 차라리 내가 성당에 나오지 말까?” 등등의 말을 많이 하고 듣습니다.
만일 그런 이유로 성당에 나오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은 성당을 떠나야합니다. 성당이라고 해서 잘못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용서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바울로 사도는 옛 세례찬미가의 한 부분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생명의 주인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다시 났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4,10에서)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무자비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형제적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꽁하고 가지고 있다면 나만 병듭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베풀 때, 내가 비로소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몇 년 전 뉴스에 나왔던 미국인이 떠오릅니다. 미국에서 날아와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의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탄원서를 냈습니다. 그 미국인은 가해자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검찰에서도 가해자를 석방했답니다.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입니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런 용서는 작은 용서를 베푸는 것이 몸에 베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 옥산 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