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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예수님께서는 자주 상징이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깊고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그분께서는 이를 통해 진리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번 달 생활말씀에 담겨있는 양떼를 모는 목자의 모습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 친근한 일상의 삶을 기억시켜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탐욕스런 늑대처럼 양떼를 약탈하는 도둑과 강도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참으로 양떼를 사랑하고, 이끌어주고, 보호해 주며, 필요하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목자에 비유하십니다. 그러나 비유를 넘어서서 예수님 안에서 이것은 현실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도록(요한 I서 4, 9 참조) 참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성부께서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주도록 예수님을 보내셨기에 그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실 만큼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으며, 그분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한 3, 16 참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생명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내적인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를 전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곧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기”(요한 1, 16)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삶이 사랑임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면서 사랑을 사셨고 그분 안에 불타오르는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불타는 무한한 사랑의 그 불꽃을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그분 생명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생명을 소유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기에, 우리에게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시는 것처럼(요한 17, 13 참조) 이 생명을 풍성하게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전혀 한계가 없으며 무한하고 하느님처럼 관대합니다. 이렇듯 그분께서는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간절한 열망을, 충만하고 끝없는 삶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고자 하십니다. 단지 그분만이 무한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켜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며 단지 미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생명은 지금부터 이미 시작되며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실현된 그리스도인인 성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 주위에 이 삶을 흘러넘치게 하는 풍성한 생명으로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들을 포용하고, 터키제국의 술탄을 향해 나아갔으며,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보았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런 보편적인 사랑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요? 버려진 모든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가 되었고 홀로된 모든 이들을 위해 자매가 되었던 마더 데레사의 결실 가득한 사랑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요?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선물하신 놀랍고도 특별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그럼 이 생활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와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우리 안에 이미 살아 있는 이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이 생명은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비례해서 자라나게 됩니다. 바로 사랑이 이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요한 I서 4, 16 참조) 하느님의 삶에 참여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하느님의 생명이고 존재 방식이라면 사랑은 또한 인간의 생명이고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설득력 있는 증거로 하늘나라로 떠난 레나타 보를로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한 포콜라리나(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공동생활을 하며 포콜라레운동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였으며, 최근 그녀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소식을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을 다해 받아들였고, “죽음이 곧 생명”이며 부활임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다짐했습니다. 그녀는 애도의 사건인 죽음을 부활의 순간으로 변화시키면서 그 사실을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끼아라 루빅 ---------------------------------------------------------------
4월 생활말씀(포콜라레에서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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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즉시, 기쁘게!
2005. 4. 1. 오후 2: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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