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를 상기 하자는 뜻에서, 상이 용사인 나의 친 형님 이야기

2011. 6. 23. 오후 12:59:32

글자

 

 

 

상이용사인 나의 친 형님 이야기

 

 

 

 

 

 

 

 

 

6.25를 상기 하자는 뜻에서

상이 용사인 나의 친형님 이야기

 

       동생 걸풍이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우리 형인 형님은

1933년 2월 23 일생으로

1951년 1.4 후퇴 때

대구 까지 피난  내려 간 대구에서

1951년 1월 27일

온양중학교 4학년 때

당시 나이 18세로

육군 제 5차 학도병으로 입대를 하였다. 

 

0713709

위 번호는

형님의 군 번이다.

나는 형님의 군 번을 60년이 지나도록

지금 까지 외우고 있다.

 

어린 학생들로 급조를 한

훈련이 들되어 총 다루기도 미숙한

어린 학생 군대들이

지리산 공비 토벌로 배치 되기도 하고

최 일선으로 배치 되기도 하였다.

 

우리 형님은 지리산 공비 토벌 쪽으로

일단 배치 되었다가

다시 강원도 중동부 전선으로 재배치 되어

서화리 854 고지 공격에서

전진 후퇴 전진 후퇴를 반복 하다가

1951년 8원 12일,

적군 수류탄 파편을 맞고 부상

고지에서 산 밑으로 굴러 내려와

정신을 잃었고,

경주 육군 제 18 육군병원에 입원케 되어,

(당시 경주 황남 초등학교)

 

육군 하사(지금의 상등병)로

1951년 10월 15 일자로

명예 부상 제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후 학교에 다시 복학

공부를 계속 하였으나

부상 당한 그 충격 여파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당시의 억울한 대우에 대해

말로 어찌 다 표현을 할지

잘 모르겠다.

 

우리 형님은

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되어

초등학교 5 학년 때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중학교에 입학을 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아주 총명 하였다.

하여,

지금도 초등학교 졸업장은 없고

5 학년 수료증만 있을 뿐이다.

 

보훈의 달

유월을 맞아 

지극히 형식적인 행사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 비쳐 싸우다

저 하늘로 먼저 가신 영혼들을

위로 하고 그 유가족들에게

극진한 보살핌이 있어야만 한다.

 

요즘 이 나라는

구석 구석 어디 썩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부패 되어 있다.

눈만 뜨면

신문 보도나 TV 뉴스에

썩어 가는 부정 부패 비리들로

넘쳐 흐르고 있다.

짜증 스럽다 못해 구역질이 난다.

어쩌다 이지경 까지 되었는지

한심 스럽다.

 

부정 비리를 적발하기 위해

존재 하고 있는 감사원의 감사원들이

향응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고 있으니

더 말 하여 무엇 하겠는가,

 

지금 이 나라의 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전교조의 좌익 사상 교육으로 인하여

남에서 먼저  북쪽을 향하여 북침을 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낮 대 낮에 당당하게

붉게 물들어 있는 좌익분자들이

거리를 활보 하고 있다.

 

해방 이래

가장 혼잡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인사동 주점들엔

좌익 분자들이 간첩들과 공공연하게

술을 퍼 마시고

이나라 정부를 비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당국은 다 알면서도

아에 손을 놓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대학교 교수들이나

명예 퇴직 교수들이 자주 모임을 갖고

종북적인 행위를 서슴 없이 저지르고 있다.

 

진보 세력들의 힘 집결로

제 2의 노무현 시대를 열기로 하고

야권 단합을 외치고 있는 중이다.

내년 총선과 다가올 대선에

기필코 승리를 해 보자는

야망에 불타고 있다.

 

집권당 한나라당은

현재 내부 사정이 한심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내부가 분열 되고 갈등이 날로 더 심하게

갈라지고 있는 가운데

저들은 결속에 혈안이 되고 있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우다가 포탄에 산화된

호국 영령들이시여!

님들이시여!

지금 남남 갈등으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북측에선 호시 탐탐

총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어지러운 조국을 지켜 주소서.

 

 

다음은 나의 친 형님이 작성한 글이다

 

★  피난 생활과 학도병 입대  ★

 

나는 1950년 6. 25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온양중학교 4학년 학생으로 당시 내 나이 18세였다.

쏘련제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은

3.8선 전 지역을 동시에 일제히 공격하여

물밀듯이 계속 남침하여 3 일만에 서울을 점령 하고

이어 주력 부대는 아산만 지역 까지 인민군이 점령

불과 몇일 만에 공산화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 피난을 하지 못하여

지방 적색분자들에게 무자비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으면서 반동분자로 추방 까지 당한바가 있다. 

 

그러다가

9.28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우리 국군은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 까지 진격 하였으나

뜻밖에,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로 다시 전세가 악화 되어

1. 4 후퇴 작전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수원 밑 오산 까지 내려옴에 따라,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3 방향으로 나누어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기 위해

각각 피난 하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동생들과 같이 충남 보령 대천으로,

아버지는 부산을 향해 남쪽으로,

나는 학교에서 단체 행동으로 피난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헤어져 부모형제의 품을 떠나

산천초목이 꽁꽁 얼어 붙은 낫설은 길을

학생복을 입은채  아버지가 메워준 이불 한채를

등에 달랑 메고 작별 인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 볼 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눈보라 치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길을 밟으며

학교에 집결 하였다.

5 - 6명씩 조를 짜서 온양을 출발 남으로 남으로 걸어 갔다.

가다가 배가 곺으면 길거리에서 파는 팥죽 한 그릇으로 때웠고

주먹떡 한 덩어리를 사 먹고 끼니를 굶으면서도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이 그렇게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전쟁과 빨갱이,

왜?

무엇 때문에

6. 25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을까,

누가, 어떤 놈이 전쟁을 일으켰을까,

이 세상 원망을 많이 하기도 했다.

 

심한 고통과 원망,눈물괴 비관,

터질듯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스스로 달래 가면서

무서운 추위를 이겨 내면서, 피난 가고 비어 있는 집에서

등에 질머진 이불 한자락을 깔고 한자락으로 몸을 덮고

벌벌 떨면서 밤을 지새웠던 그 시절을 그 누가 알아 준다는 말인가.

백성들의 비참한 피난 생활 그 속에서 함께 겪었던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서언 하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들은 대구로 집결 했다. 

대구 역전에,

육군 제 5차 학도병 자원 입대 광고가 붙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 하자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나라가 위급할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자고 결의를 하고

모집 장소로 갔다.

대구 역전 모 성당 광장이였다.

광장에는 이미 다른 학생들도 꽤 많이 운집해 있었다.

우리 일행은 결심 하고 다짐을 했다.

 

부모 형제는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고

입대 소식을 연락 할 곳도 없고

이 얼마나 비통하고 원통하고 슬픈 일인가.

이 모든 것은 6. 25가 만든 것이 아닌가,

수많은 이산 가족들,

6. 25를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북침을 했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전교조들로 하여금 그렇게 배운 젊은 학생들

정신을 똑똑히 차려야만 한다.

 

1951년 1월 27일,

육군 제 5차 학도병으로 입대

군인 생활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입대선서를 하고 학생복을 입은 채

단독 무장으로 부대 편성을 하여

당일 대구에서 야간 행군으로

상주에 있는 이안면 국민학교에 도착 하여

주위 고지에 배치 되었고 몇 주 후에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투입 되었다.

 

3 월경,

지리산에는 눈이 녹지 않고 몹씨 추웠다.

나는 2 중대 1 소대로 편성 되어

장군봉 고지에 배치 되어 공비 토벌이 시작 되었다.

낮에는 인구 능선을 타고 산과 계곡 험한 골짜기를 수색 하고

작전에 따라 이동 하면서 매일 매일 토벌 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4 월경,

전방으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 부대는 중동부전선으로 이동 하게 되었다.

전주 기차역에서 제천으로 이동 하여

중동부 전선인 강원도 창촌지역에 투입 되었다.

이어서 현리 지역으로 3. 8선을 넘어 인제지역에서

인민군이 후퇴 하고 있는 뒤를 추격 하여 

원통 고개를 넘어 인제 지역에서

인민군이 후퇴 하고 있는 뒤를 추격 하여

원통 고개를 넘어 서화리 지역으로

진격 하고 있었다.

 

각 전선에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 하시지 여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어

몸은 물론 무장을 하여 천근 무겁고,

구슬프게도 나의 마음을 울리고 있을 때

천둥번개가 치듯 아군의 공중폭격과 중화기 포격이

번쩍 번쩍 벼락 치듯 불덩어리가 고지를 진동 시키고 있었다.

 

내가 공격할 목표 고지다.

전투 태세로 배치된 우리 중대는 공격을 개시 하였다.

나는 용감하게 기어 올라 7 - 8부 능선 까지

공격 하여 총격과 수류탄으로 타격 하였다.

적도 직사포와 방맹이 수류탄으로 맹렬히 대응해 왔다.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었다.

우리 군도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 되고

인민군과 맞 붙어 중화기로 계속 퍼부었다.

 

마침 인접 부대이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 중대도 적의 연락호를 점령 하고

고지를 탈환 하였다.

때로는 후퇴도 하였고 적에게 포위도 당하였었다.

이런 격전 속에서

나는 불행하게도 8월 12일,

서화리 854 고지 전투에서 우측 대퇴부등에

파편창으로 부상을 당하여 고지 하단부

전방 초소에 옮겨졌다.

통증과 출혈이 심한 상태로 응급 처치 후에

사단 의무대를 거쳐 원주 후송병원에서 3 일간 응급 치료를 받고

상이장병 후송열차로,

경주 황남국민학교에 임시로 자리 잡고 있던 

제 18 육군병원으로 후송 되었다.  

 

이 때가,

8월 중순경 18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끝내고

부산에 있는 839 부대 (원호대)로 이송

그 해 10월 15 일자로 육군 839 부대에서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로 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2000년 1월 31일자로, 참전유공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2001년 9월 5일자로, 국가 유공자로,

국로 부터 보훈 대상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상은,

그냥 생각 나는 대로 기억을 더듬어

내 친 형님께서 직접 작성 하신 글이다.

6.25를 상기 하자는 뜻에서

형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직접 생과 사를 들랑아며

실제로 산 경험담이 필요로 하는 시기인 것만 같아서

아직,

지금도 정신을 못차리고

6. 25는,

남측에서 먼저 북침을 한 것이라고

속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저 함이다.

 

 

 

 

 

 

 

1951년 9월 8일,

부상을 당한 형님을 경주 황남초등학교 임시 육군 병원으로 면회를 가신 아버님과 형님

 

 

 

 

 

 

 

 

 

 

 

요즘 트위터 더보기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감동, 글/그림/음악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