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4,08,2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04. 8. 20. 오전 9: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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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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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에제키엘 37,1-14
그 무렵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주님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 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이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하고 아뢰니,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주님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하느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하느님이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붙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하느님이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주님인 내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복음 마태오 22,34-40
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 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인터넷에서 보게 된 유머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립니다.

왕비병이 심각한 엄마가 음식을 해놓고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엄마는 얼굴도 예쁜데 요리도 잘해 그치? 이런 경우를 사자성어로 하면 뭐지?”

엄마가 기대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금상첨화(錦上添花)’이지요. 하지만 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화자찬(自畵自讚)”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다시 말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아들은 다시 다른 답을 말합니다.

“과대망상(誇大妄想)이요?”

엄마는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힌트를 줄게. ‘금’으로 시작하는 사자성화야.”

아들은 알았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말해요.

“금시초문(今時初聞)”

어머니와 아들의 대결(?)이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 글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좋은 평가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면 할수록 결국 앞선 그 어머니처럼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올바르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율법을 613개의 세부 조항으로 확대시켜서 지키고 있었기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부 조항이 너무 많다보니 두 개의 조항을 동시에 실천할 경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느냐 라는 고민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이 모든 율법의 골자라는 것이지요.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계명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하느님의 말씀을 낭송하는데, 그때 낭송되는 내용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은 세부 조항만을 강조하다보니 중요한 계명 자체를 잊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세부 조항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주력하다보니, 정작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지금 나의 모습을 평가하면 어떤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나만을 세상을 드러내려다보니 정작 중요한 사랑을 놓치고 있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유를 가지고 산책을 해보세요. 그리고 혹시 나의 무관심으로 소홀히 했던 부분을 살펴보십시오.



조촐하면서 넉넉한 삶(정도일, ‘참 나’ 중에서)

나는 어렸을 때, 초콜릿을 너무나 좋아했다. 어른이 되면 초콜릿을 원껏 먹어보겠다고... 그렇게 만 된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초콜릿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결혼과 집, 그리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집도 만족을 주지 못했고 자식들도 문제가 생겼다. 이런 것들도 결국 행복이 아니었다.

나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한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하고 또 안전하게 한다고 믿었다. 눈에 보이는 물상에 사로잡혀 나 자신의 내부를 살펴보려는 생각조차 못했다. 왜, 내가 눈에 보이는 물상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의심조차 품어보지 못했다.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가 나빠지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 육체와도 전혀 상관없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이제 그런 마음을 살피는 일에 나는 절대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나는 내 욕망을 쫓아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 끝없는 욕망의 대상을 따라 정신없이 가고 있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에서 얻어지고 길러진다. 여린 들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고, 작은 개울 물속에도 모두 잠기는 해와 달,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그런 조촐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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