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8월 14일 성 말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
|
|
재생 클릭!!
|
제1독서 에제키엘 18,1-10.13ㄴ.30-32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을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주 하느님이 말한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너희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어떤 사람이 옳게 살아서 죄가 없다고 하자. 산 위에서 젯밥을 먹지 않았고 이스라엘 족속이 섬겨 온 우상들에게 눈을 돌리지도 않았으며 남의 아내를 범하지도 않았고 월경 중인 아내를 가까이하지도 않았다고 하자. 또 남을 억울하게 하지도 않았고 담보로 받은 것은 돌려주었으며 남의 것은 빼앗는 일도 없었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옷을 주었다고 하자. 또 물건을 세놓지도 않았고 돈놀이도 하지 않았으며 나쁜 일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 생긴 사건을 공정하게 재판해 주었다고 하자. 그래서 내가 정해 준 규정대로 살고 내가 세워 준 법을 지켜 그대로 하였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 정녕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가 살인 강도가 되어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이런 온갖 역겨운 짓을 하고는 결코 살 수 없다. 그런 자는 자기의 죄를 쓰고 죽을 수밖에 없다.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돌려라. 그래야 올가미에 걸려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 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죽으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 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
복음 마태오 19,13-15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거북이는 참 약해 보이고 온순해 보입니다. 그러나 거북이에게는 무척이나 강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가 그렇게 강할 것 같아요? 물론 거북이의 등껍질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그 등껍질보다도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바로 거북이의 목이라고 해요.
일반적으로 거북이의 체중은 13-l8Kg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70-9OKg 나가는 사람도 목을 움츠린 거북이의 목을 결코 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우습게도 거북이의 목을 빼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를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면 거북이의 목은 자연스럽게 나온답니다.
우리는 이솝우화에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태양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거센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하지요. 그런데 태양은 그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것은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리니까, 더위를 느끼는 그 나그네가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게 되는 것이지요.
거북이의 모습, 그리고 이솝우화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열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내 식대로 해라'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강압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북이의 목을 나오게 했던 그 따뜻함과 같은 온유한 마음, 그리고 나그네의 옷을 벗게 했던 따뜻한 햇빛과 같은 이웃을 이해하는 마음씨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어린이의 머리에 손을 대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손길을 막습니다.
그 당시 어린이들은 미천한 존재, 그리고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는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어린이들은 소외 계층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이처럼 약하고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약해 보이는 아이, 그리고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을 돌볼 만큼 예수님께서는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이렇게 바쁜 예수님께 하찮은 아이들이 다가와 불편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강압적으로 막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제자처럼 외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외적인 힘으로 제압할 때, 그 순간은 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유한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갈 때 오히려 이웃의 마음을 열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강압적인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어린이처럼 순수함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다가갈 때, 하늘나라도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늘 하루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부드러움을 내 마음 속에 새겼으면 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생활합시다.
승자와 패자 이런 글을 어느 책에서 보았습니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실패를 거울로 삼으나, 패자는 휴지로 삼는다. 승자는 돈을 다스리고, 패자는 돈에 지배된다. 승자의 주머니 속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안엔 욕심이 있다. 승자는 차라리 ‘용감한 죄인’이 되지만, 패자는 ‘비겁한 선인’이 된다. 승자는 새벽을 깨우고, 패자는 새벽을 기다린다. 승자는 지그시 듣지만, 패자는 자기 말할 차례만 기다린다. 승자는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패자는 길은 하나뿐이라 생각한다. 승자는 자기보다 못한 자를 만나도 친구가 될 수 있으나, 패자는 자기보다 못한 자를 만나면 즉시 보스가 되려 한다. 승자는 꼬리가 되어도 의미를 찾으나, 패자는 1등이 되어야만 의미를 느낀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부(神父)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에서조차 세속적인 기준을 스스로 메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즉,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그래서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또한 각종 욕심을 간직하려 합니다.
진정한 승자가 되고 싶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는 승자가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승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새벽에 그런 승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물론 잠자리에 들어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또 한 명의 패자를 만들었다는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패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할 겁니다. 그리고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계시기에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패자와 승자…….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의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힘냅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