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교의형성의 역사 *
'성모 승천'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 이 교의의 바탕은 회칙에서 밝힌 대로 성서 '안에'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염시태의 경우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서 '안에' 있다는 것은 승천교리가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전해주는 증언에 그 교의가 전적으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초대 교부들의 증언은 전혀 없다. 4세기말에 가서야 에피파니오(Epiphanius of Salamis)가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여러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라 5세기말부터 이와 관련된 축일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6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마리아 축일의 명칭은 '하느님 어머니의 기념일(Mneme Theotokou)'이었다. 이어 황제 마우리치우스(Mauricius, 582-602)는 자신의 통치 전역의 모든 교회로 하여금 '마리아의 잠드심(Koimesis)'이라 명한 축일을 8월 15일에 지내도록 했다. 이는 나중에 '하늘에 오르심(Analephsis)'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교황 세르지오 1세(Sergius I, 687-701)는 이 축일을 서방교회의 축일표에 포함시켰다. 이때부터 축일이 되면 강론가들은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크레타의 안드레아, 다마스커스의 요한 등의 성모 승천에 대한 강론은 매우 유명하다.
마리아의 '승천(Assumptio)'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8세기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니코메디아의 Giorgio,†880)는 마리아의 무죄성에 관련하여 육체의 승천을 주장했고, Teodor Studiat(†826)는 마리아가 천상에서 우리의 위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황제 레오 4세(†912)는 Giovanni Geometra(†989)와 더불어 마리아의 육체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다른 죽은 모든 이들의 승천의 중간 상태라는 점을 암시한다. Giovanni Furnes(†12세기초)와 Michaele Glicas(1204), Gregorio Palamas(†1359), Nicola Cabasilas(†1396)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을 주신 어머니로서 예수의 육체와 유사성을 들어 승천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명-예로니모], [가명-아우구스티노], [황금전설] 등과 같은 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성모 승천 교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랜 동안 이 교의는 특별히 논의되지 않다가 '무염시태' 교의 선포를 계기로 재조명되었다. 1869년 라벤나의 대주교는 교황 비오 9세에게 승천 교의를 선언하도록 격려하였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 113명도 마리아 승천 교의를 청원했다. 20세기초에 많은 국제 마리아 회의가 열려 신학적 기초를 다졌고, 전세계로부터 80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서명한 3000여건의 청원서가 교황청에 답지했다. 또한 쉐벤(M.M.Scheeben), 페쉬(Christian Pesch), 추기경 알렉시오 레피시에(Alessio Lepicier) 같은 146명의 신학자들이 성모 승천 교의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재의 교회 신앙 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신앙의 계시적 성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예수회의 휠로그라씨(G.Filograssi)의 주장이 교의 선포에 힘을 더해 주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기초로 주교들, 신학자들, 그리고 신자들의 동의를 묻고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1950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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