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방송교리문제집- 16. 한국 교회사

2006. 10. 25. 오전 9:38:35

글자

16. 한국 교회사


1.한국 최초로 입국했던 성직자는 누구일까요?

  ① 샤스땅 신부  ② 세스페데스 신부   ③ 주문모 신부  ④ 베르네 범 주교

☞ ② 세스페데스 신부.

  주문모 신부로 생각할 수 있으나, 주문모 신부는 1791년 신해 발개 이후, 윤유일과 지황 등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입국하였고, 세스페데스 신부는 정유재란(1597)당시, 일분 침공군들 중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1593년 곰개성(지금의 진해시 응천동의 남산성)에 도착하여 약 1년 2개월 정도를 머물렀습니다.


2.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과정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특징적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에 의해 전교 된 것이 아닌 스스로 학문적 탐구에 의해 찾아서 얻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벽 등이 참여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던 단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강학회.

  강학회는 주어사, 천진암에서 열렸으며, 그 중 1783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드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성세를 받았습니다.


3. 다음에 제시되는 사건들과 관련된 교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1784년경 겨울부터 시작된 지금의 서울 명동, 즉 명례방에 위치한 이 교우의 집에서였습니다.

② 대부분은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부자(父子)등 양반이었으나, 이 교우만 중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양반집 자제는 훈방되었으나. 이 교우만 중인 계급이어서 구속되었습니다.

③ 그러나 권일신 부자 등은 압수된 물건을 요구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이 교우처럼 천주교를 신봉하니 같은 처벌을 받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형조판서는 이들을 다시 훈방하고 이 교우에게 배교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형벌을 가한 후에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④ 이 교우는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조선 정부 문헌에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曺摘發事件)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⑤ 이 교우는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 김범우.

  이 을사추조적발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첫째,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계기가 되었고, 둘째, 양반 집안에서는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키기 위하여 위협을 가하게 됩니다.


4..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에는 성직자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성사를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 있어 교리 지식에 대한 부족에서 나온 선의의 과오로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은 스스로 성직자의 교계 체제를 설정하여, 성사를 집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가(假)교계제도’라고 합니다. 당시 고해 성사에 있어서 죄에 대한 보속은 일반적으로 남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선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죄를 범한 경우, 그 보속이 무엇일까요?

☞ 조선시대의 관습을 적용하여 신부에게 직접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당시 고해 성사는 그 외에도 세 가지 모습으로 더 발견됩니다. 즉 ① 성사를 보는 방법에 있어 신부끼리는 서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으며, ② 성사의 대상에 있어서, 처음에는 부녀자가 제외되었으나 후에 풀렸으며, ③ 신부는 나이에 상관없이 웃어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5. 초창기의 한국 교회는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 출신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역관(譯官)출신으로 한국 교회에 있어 첫 회장이 되었는데 그는 누구일까요?

☞ 최창현,(요한).

  최창현(요한.1759-1801)은 한양 입정동에서 살았다 하여, 교우들은 그런 관천(冠泉)이라는 호를 붙여 불렀습니다. 그는 책을 베끼는 솜씨가 남달리 뛰어 났으며, 초창기 가성직 제도의 신부로 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6. 다음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일까요? 

① 공식적으로 우리 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입니다.

② 회원들은 소수로 구성되어 집회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신앙의 진리를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였습니다.

③ 황사영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모임이 여섯 군데에서 열렸다고 해서 육회(六會)라고 불렸습니다.

☞ 명도회.


7. 우리 나라에 천주교 설립 년도는 1784년이고, 교구 설정은 1831년입니다. 그러면 초대 교구장은 누구일까요?    

① 뵈르네장 주교    ② 삐레스 주교   ③ 브리기에르 소 주교   ④ 까벨라리 주교

☞ ③ 브리기에르 소 주교.


8. 한국에서 최초로 선발하여 파견한 세 명의 신학생을 누구일까요?

☞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9.

O/X 문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용산 신학교입니다.

☞ X.

  최초의 신학교는 1857년경 충청도 제천의 베론에 위치한 성요셉 신학교입니다.


10.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주교 성품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김수환 추기경     ② 노기남 주교      ③ 김남수 주교       ④ 김옥균 주교

☞ ② 노기남 주교.


11. 1770년대 후반기에 와서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학을 연구하게 됨으로써 이 천주학을 종교로서 받아들이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 때 남인 학자였던 권철신을 중심으로 이 벽, 이승훈, 정약종 등 10여명이 주어사 천진암에서 천주교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이 모임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요?

☞ 강학회.


12. 1783년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던 이승훈은 1784년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종교 서적과 성물 등을 가지고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후 그는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고,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로서, 이 초기 교회 공동체가 종교 집회를 갖던 곳은 어디일까요?

☞ 한성 명례방.


13.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의 순교 사실을 ꡔ기해일기ꡕ에 첨가하여 ꡔ기해, 병오 순교자전ꡕ을 프랑스어로 편집하였는데, 이것을 한 조선인 신부가 라틴어로 옮겨 로마에 보냄으로써, 로마에서는 이 문헌을 토대로 1857년 기해및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 82명을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였고, 이들 중 79명이 1925년 복자위에 올랐다가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같이 많은 순교 성인들을 모시는데 크게 기여한 이 조선인 신부는 과연 누구일까요?

☞ 최양업 신부.


14. 을사사건 이후 교회를 재정비하고 신앙 강화를 위해 ‘가성직자 제도’를 마련하지만, 그 제도가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된 초기 천주교 공동체는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여 성직자를 요청하게 됩니다. 결국 몇 차례의 노력 끝에 결실을 맺게 되는데, 1794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입국한 최초의 성직자는 누구였을까요?

☞ 주문모 신부.


15.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주문모 신부에게 바오로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로 33년 동안 ‘목자없는 시대’에 들어서자, 북경을 여러 번 왕래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여 결국 한 명의 중국인 신부와 세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를 모시는 등 평신도로서 신앙을 증거하고 결국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 분은 누구일까요?

☞ 정하상(바오로).


16.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권기인의 편지와 정하상의 편지 등이 교황청에 도달하자 로마 교황청의 포교성성은 프랑스의 한 선교회에 조선 선교를 부탁하게 됩니다. 결국 1831년 브뤼기에르 신부를 시작으로 이 선교회에 의한 선교가 본격화되고,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치명 순교하였는데 이 선교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파리 외방 전교회.


17. 한국 최초의 성직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솔뫼에서 태어나 15살의 어린 나이로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1845년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귀국한 지 약 8개월만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심문을 받고 결국 순교하게 되는데,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 당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 한강 새남터.


18.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로 천주교인들은 ‘사학죄인’이란 미명아래 숱한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 나갔습니다. 많은 박해 중에서도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4대박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대 박해중 1846년에 발생한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말미암은 박해는 어느 박해였을까요?

☞ 병오박해.

  1846년 일어난 병오박해 중에 체포된 천주교인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것은 기해대박해의 참상을 겪은 신자들이 서둘러 교회 서적과 성물을 숨겼고, 포졸들이 들이닥칠 때에 즉시 피신할 수 있는 준비를 하거나 또는 고향을 떠나 깊은 산촌으로 생활터전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9명의 신자들이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형을 받았고, 8명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치명하였습니다.


19.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분으로서, 1849년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한 이후, 12년 동안 사목 활동을 벌이다 급환으로 선종하여 베론에 묻히신 분으로, 한국의 두번째 성직자인 이분은 누구일까요?

☞ 최양업 신부.


20. 이 박해는 1866년 2월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일어난 대박해입니다. 이 박해로 9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양화진 등에서 순교하였으며,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박해는 무슨 박해일까요?

☞ 병인 대박해.


21. 1873년 11월 10년 동안 집권하던 흥선 대원군이 하야하고 왕비 민씨 일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조선의 내외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는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나라와의 조약들 중에서 신교(信敎)의 자유와 전교의 보장 등 종교문제가 취급된 것은 어느 나라와의 조약이었을까요?

☞ 프랑스.

  1886년, 프랑스는 자국의 국민들이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 왕조와의 수교에 있어서 선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안전을 보장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22. 조선 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블랑 백 주교는 교회의 자선 사업을 위해 수녀회의 조선 진출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 결과 1888년 4명의 수녀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지금의 명동 성당 안에 수녀원이 자리잡게 됩니다. 한국에 최초로 들어와 자선 활동과 교육 사업에 큰 역할을 담당한 이 여자 수도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23.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를 책임 맡은 이후로 항상 조선인 사제 양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초로 베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이후, 강원도 지방의 부엉골, 다시 지금의 용산 자리로 신학교가 이전하게 됩니다. 1887년 3월 개교한 용산 신학교는, 지금의 혜화동에 위치한 신학교로 이전하기 전인 1940년대까지 우리 나라의 방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지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용산 신학교의 공식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 예수 성심 신학교.


24. 조선 교회의 발전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역사적 사건은 방인 주교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2년 1월 3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당시 종현 성당의 보좌 신부였던 조선인 사제를 주교로 임명하게 됩니다. 1942년 12월 20일, 명동 성당에서 최초의 방인 주교로 성성된 그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노기남 주교.


25. 샬트로 성 바오로 수도회에 이어 많은 여자 수도 단체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창설된 방인 수도회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창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방인 수도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26. 일제 강점 시대에 교회 당국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였지만, 평신도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에 입단하여 일제의 조선 침략자를 제거하거나 국외 독립군 모금 운동을 벌이고, 항일 시위에 가담하는 등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감옥에서 순국한 이 사람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안중근 토마스.


27. 이승훈이 1783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은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창설일로서,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200주년 기념행사를 여의도 광장에서 전국의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한 바 있습니다. 한편 한국 교회는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도 80년대에 여의도에서 개최하였었는데, 그렇다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교구가 설정된 해는 몇 년도일까요?

☞ 1831년 (9월 9일).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북경 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로 하여금 조선 교회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28.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는 그 원인에 있어서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박해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조선의 국교(國敎)로서 정치, 사회, 가족 등의 제도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던 이 ‘종교’와의 마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종교’는 무엇일까요?

☞ 유교.

 천주를 만유 위에 받들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천주교는, 과연 당시 국교의 성격을 띤 유교사회의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천주교의 근대적 평등 사상은 충효(忠孝)를 숭상하는 가부장적 봉건윤리와는 충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교(政敎)가 합일된 조선왕조의 유교사회에 있어서 종교는 사사(私事)일수 없고, 어디까지나 국사(國事)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생활면에서 천주교와 유교간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조선왕조의 정치, 사회, 가족 등 제도가 유교의 관습, 제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만큼 그 대립은 일층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29.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큰 시련의 역사로 장식된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와 또 다른 하나의 박해를 포함해 우리는 4대박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4대박해 중에서 1846년에 일어났던 박해는 무엇일까요?

☞ 병오박해(丙午迫害).


30.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기세가 하늘을 치솟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주요 요지에 비석을 세웁니다. 거기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 싸우지 않으면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입니다”라는 글귀를 써놓았습니다. 이 비석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척화비(斥和碑).


31. 병인박해를 직감해서인지 1857년 3월 25일, 베르뇌 주교는 앞으로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교구장이 순교하더라도 그를 대신해 교회를 영속시킬 주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다블뤼 신부를 그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기 위해 교구회의를 소집합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과 소수의 평신도 회장들이 모여 3일에 걸친 토론 끝에 성직자들의 행동지침과 활동계획,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향상과 교세확장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을 수립했습니다. 이 회의의 결정사항은 사목교서로 발표되었는 데, ‘교우들끼리 서로 돌려보라’는 뜻의 회람성격을 지닌 이 사목교서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


32. 1864년 1월에 철종이 선왕과 마찬가지로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두고 외척간에 암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풍양 조씨 가문으로 왕위 계승자 지명권을 갖고 있는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국왕으로 간택하였는데 그가 바로 고종(高宗)입니다. 그러나 고종이 나이가 어려 정치적 실권은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몰락한 왕족으로서 정치적 사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방탕한 생활을 가장하여 정치 무대에 등극한 대원군은 조선 천주교회에 또 다른 대박해의 피바람을 몰고 오는데요, 그러면 흥선 대원군의 본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이하응(李昰應).


33. 흥선 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신자인 남종삼과 토론하면서 조상 제사 금령 이외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수긍하였습니다. 또한 대원군의 주위 인물들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고종의 유모였던 이 여인은 대원군의 아내이며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왕가에 천주교를 전파했습니다. 이 여신자는 누구일까요?

☞ 박마르따.


34. 이러한 왕가의 호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에 대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교회 지도층은 기해박해를 일으킨 풍양 조씨 가문의 재등장과 득세를 목격하고 대원군의 난폭하고 과격한 성격과 학정(虐政)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장래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염려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호의와 적의가 혼합된 정치 상황 속에서,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이 완산항에 나타나 조선정부에 통상을 강요하였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침 의도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한 교회의 몇몇 신자들은 ‘삼국 동맹안’을 제시하면서 종교 자유 획득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삼국 동맹’은 조선과 그리고 다른 어떤 두 나라를 지칭할까요?

☞ 프랑스와 영국.


35. ‘삼국 동맹안’에 대한 대원군의 면담 수락 소식을 듣고도 신자들은 즉시 지방에 있는 주교들을 모시고 오기에 필요한 재력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후에 대원군의 사위인 조기진이 여비를 보태어 주는 동시에 교군을 보내어 1월 25일 이유일은 다블뤼 주교를 모셔왔고 5일 후에 베르뇌 주교가 김면호의 안내로 상경합니다. 이에 따라 남종삼은 주교들의 상경을 대원군에게 품고(稟告)하였지만 대원군의 태도는 의외로 냉담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한 대원군은 자기 요청에 천주교측이 2주일이나 지연한 사실을 무성의와 불경으로 속단해 구정이 가까이 왔다는 이유를 달아 면담을 연기합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북경에 간 동지사 일행의 편지가 불에 기름을 당기듯 병인박해의 화근으로 작용하였는데요, 중국에서 날아든 소식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 중국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소식(洋人殺戮).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한 북경함락은 종교자유에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그들은 무서운 보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여러곳에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지방은 더욱 심했습니다. 폭동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1862년서 부터 187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간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시하여 많은 중국인 신부와 신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36.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대원군과 면담을 위해 입궐 대기 중에 주교 댁에 있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면서 병인대박해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3월 4일에는 전국에 천주교 서적 압수령과 소각령이 선포되었고, 3일 후에는 천주교인 색출을 위해 상벌제도를 실시하라는 훈령이 내려졌으며, 배교자들이 묘사한 선교사들의 인상 착의에 대한 기록을 전국 관청에 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당시 정부가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통주를 두고 통내에 천주교인이 있으면 통주까지 처벌하는 연대 책임법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오가작통법(吳家作統法).

  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주민 사찰을 위해 제정된 주민조직법의 하나입니다. 원래는 흉년에 기근을 방지하기 위해 동리에서 음식물을 공동 관리하던 공동체적 상부상조의 전통에 기원을 둔 듯하나 실제로 납세나 부역, 징용의 의무를 강제하기 위해 원용되었습니다. 오가작통법이 국법으로 제정된 것은 숙종 때 윤휴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인의 박해를 위해 적용된 것은 순조 때부터였습니다. 이로써 신유박해 이후 많은 교우들이 오가작통법의 피해를 받아 잡혀가 순교하였으며, 이 오가작통법은 천주교의 전교를 막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습니다.


37. 6월말에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에게 박해 소식을 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는 7월 13일에 중국 황제에게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선전 포고한 사실을 통보하였고, 중국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중재하였지만 대원군이 이를 내정 간섭으로 일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박해를 가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면 조선이 프랑스와 대결한 이 전쟁을 한국사(韓國史)에서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병인양요.


38.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은 9월 10일에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항하여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상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10월 14일에 다시 일곱 대의 군함을 이끌고 원정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3일 후에 조선 정부는 불법 입국한 선교사 처형의 당연성과 함대의 즉각 퇴각을 주장하면서 이에 맞섰습니다. 결국 강화도의 한 절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막강한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도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의 공격에 많은 부상자를 내며 11월에 퇴각하기에 이릅니다. 이 전투를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 전등사 전투.


39.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배외사상이 극도에 달했고 대원군은 기세 등등하여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해 교회 박해는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등지에서 순교하였고 조선 교회는 신유박해 이후 ‘제2의 목자 없는 시대’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당시(병인박해 떄) 순교장소 중에서 프랑스 함대의 첫 원정시에 침입한 곳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처형장이 된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 양화진.


40. 병인박해의 대표적 순교성지 중에서, 현재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인 다블뤼(Dabeluy) 주교, 오메트르(Aumaitri), 위앵(Huin)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인 황석두(루가), 배론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요셉) 등 다섯 명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 갈매못.

 

41.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난 조선 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치명일기」에 기록된 877명의 순교자중에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의 반열에 든 분들은 몇 분이일까요?

☞ 24위.


42. 병오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순교의 배경과 과정으로 보아 특이할 만한 치명자로 다음에 설명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먼저 천주교를 믿게 되어 세례 받기를 재촉 받았지만 입교를 뒤로 미루고 있는 사이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체포된 자식을 보기 위해 자수하여 옹진관가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한양의 포도청으로 송치되면서도 서로 볼 수가 없었다. 포도청 감옥에서 처음으로 김대건 신부를 대면했을 때 그의 마음이 움직여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고, 영세준비로 며칠동안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어 김대건 신부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옥중 세례를 받았다. 한 때 포졸이었던 그는 동료 포졸들의 배교회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모진 고문을 기쁜 마음으로 이겨내었다. 실례로, 포장이 십계명도 제대로 외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비웃자 그는 무식한 자녀도 효도할 수 있듯이 교리지식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만 믿어도 넉넉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혹독한 고문으로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관장은 한 마디의 신음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바로 배교의 표시라고 엄포를 놓자 뼈가 살을 에리는 고통 속에서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절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장살형(杖殺形)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임군집.


43. 병인박해의 폭풍전야와도 같았던 조선 철종시대에 교회는 비록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이 철회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 천주교회는 이 땅에 신앙을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으로 교계 체제를 재정비하고, 조선인 성직자 양성하는 한편 출판과 자선을 통한 대사회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특별히 성모 신심을 강화하기 위해, 베르뇌 주교는 1861년 성직자들의 담당구역을 다시 확정할 때 각 지역을 성모 축일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조선 교회의 주보성인은 성모님의 어떤 축일과 연관되어 있을까요?

☞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44.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다음에 설명하는 평신도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북경에서 세례 받은 충주 목사(牧使)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가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풍양 조씨 일파에 의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삼국 동맹안’을 조정에 건의하였다는 죄목으로 지명 수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천주교가 올바른 종교라는 신앙고백과 자신의 건의안이 매국의 계략이 아니라 우국충정에서 나온 행동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봉주(토마스)와 함께 모반죄인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에 복자로,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남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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