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도 바오로
1.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적 종교인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교를 이방인들에게 대대적으로 전교한 두 사도는 누구일까요?
☞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들은 만 일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일을 돌본 다음(사도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습니다.
2. 신약성서에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이 히브리서를 제외하면 모두 13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도 바오로가 직접 저술한 것과 비록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대에 사도 바오로의 사상으로 바오로의 권위를 빌려 저술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는 서간은 모두 몇 권이나 될까요?
☞ 7권.
데살로니카 전서, 고린토 전/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필립비서와 필레몬서 등 7권을 사도 바오로의 친서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는 끝에 저자에 대한 표기가 없으며, 이로 인해 예로니모 성인이 라틴어로 번역한 ꡔ불가타ꡕ 성서본에서는 그의 친저성을 의심하여 맨 마지막에 위치시켜 놓았습니다.
3. 신약성서에는 바오로 서간 외에도 사도 바오로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성서가 있는데,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과 활약상을 서술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서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 루가 복음사가.
이 사도행전은 루가 복음사가가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4. 사도 바오로의 출생 연도는 사도행전 7,58과 필레몬 1,9를 근거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 근거에 의하면 대략 몇 년도에 출생하였다고 학계에서는 보고되고 있을까요?
☞ 기원후 5-10년 사이.
사도행전 7,58에는 기원후 36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로 나와있고, 기원후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필레몬1,9), 사도 바오로는 “노인”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오로의 출생 연도를 가늠케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와 노인의 기준이 모호한 까닭에 이를 근거로 나이를 추정한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따라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학자들은 기원 후5-10년이라고 추측하나 이것도 단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합니다.
5. 다음은 어디를 설명하는 것일까요? 지명을 말해주십시오. “이곳은 지중해로 흐르는 키드노스 강 양편에 자리잡은 도시로써, 지중해에서 16Km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옛날에는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이곳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예로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64년에 이 곳은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57년에는 길리키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사도 바오로의 탄생지로도 유명합니다.” 이 곳은 어디일까요?
☞ 타르소.
참고(사도행전9,11; 21,39; 22,3)
6.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자신의 출생, 할례, 성장, 처신 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파로 처신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를 교육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누구일까요?
☞ 가믈리엘.
참조: 사도행전23,16. 또한 사도 바오로는 그의 아버지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로마 시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6,37-38; 22,25-29; 23,27)
7. 사도 바오로는 전도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하였습니다. 그는 성격적으로 신도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을까요?
☞ 천막 만드는 일.
참조: 사도행전18,3.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교우들의 신세를 지기 싫어했지만 필립비 교우들이 주는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무사무욕한 본심을 그들만은 늘 믿었기 때문입니다.(필립비4,10-20; 2고린토11,9)
8. 바리사이요 율사 후보생이었던 사도 바오로로는 개종하기 전에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는 율법을 심히 비판한 예수님(참조: 마태오5,21-48)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혈질적인 성격의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참조: 갈라디아1,13; 1고린토15,9; 필립비3,6). 그렇다면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어떤 계통의 그리스도인들일까요?
☞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
토박이(예루살렘계)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중시했기 때문에 박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개종하기 이전의 사울(바오로의 다른 이름)에게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9. 사도 바오로가 개종할 때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때의 연도는 대략 몇 년도일까요?
☞ 기원 후 34년 또는 36년경.
참조: 2고린토4,5.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는 세 번에 걸쳐 바오로의 개심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9,1-19: 22,3-21: 26,9-18). 그러나 여기서 나온 개심담은 실제로 사도 바오로 자신의 체험담이 아니고 루가가 교육자적 관점에서 극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10. 사도 바오로는 개종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개종한 다음 세 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사도행전22,16) 설교한 후, 아라비아로 떠났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왔다. 그 후 3년 뒤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 베드로를 만난 후 전도 여행을 떠났다.
11. 사도 바오로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지역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이 때 그는 전도 여행의 거점으로 어느 곳을 삼았습니까?
☞ 안티오키아.
또한 이곳의 시민들이 예수를 신봉하는 교도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참조 : 사도행전 11, 26).
12. 다음의 보기는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전도 여행에 있어 그 전도지를 기술한 것입니다. 다음의 괄호( )안에 들어갈 지명은 무엇일까요?
안티오키아 - 셀류기아 - 기프로스섬(살라미스 - 바포) - 베르게 - ( ) - 리스트라 - 데르베 - 아딸리아 항구 - 안티오키아
☞ 이고니온.
참조: 사도행전13-14장
13.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 여행의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였습니다. 이 때에 이들에게 예수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사도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2,1-10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세 가지 사항이 합의되었다고 하는데, 그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 ①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② 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다.
③ 예루살렘 모교회의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한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에 상주하던 토박이 유대계 사도들, 그리고 지중해 동부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해외 유대계 사도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행전 15,1-29에도 사도회의에 관한 기록이 전해오는데, 그 결정 사항들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루가의 기록보다는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디아2,1-10)이 더 신빙성 있습니다.
14. 갈라디아서 2,11-14에 기록된 안티오키아 사건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고 나서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 곳에는 유대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하였는데, 베드로 사도도 이를 좋게 봐서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집전하였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네 교회 총책임자인 베드로가,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베드로를 찾아왔다. 그러자 베드로는 겁을 먹고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였으며, 이 영향으로 바르나바조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끊었다. 말하자면 베드로 때문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바오로는 그 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한 사건입니다. 바오로는 그의 논리를 이방인 그리스도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규정에 따라 전개하였다.
15.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도 여행은 기원 후 50-52년경에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루살렘 출신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며 로마 시민인 실라(사도15,22. 32. 40: 16,37)와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2차 전도 여행 중 사도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는 어느 곳일까요?
☞ 필립비 교회.
참조: 사도행전18장. 필립비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사랑하던 교회로서,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물론 바오로는 교우들의 신세를 지기 싫어했지만 필립비 교우들이 주는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무사 무욕한 본심을 그들만은 늘 믿었기 때문입니다(필립비4,10-20; 2고린토11,9).
16. 사도 바오로의 제3차 전도 여행은 기원 후 53-56/57년경에 있었는데, 그는 에페소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내려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행전20,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 해서 이 곳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이곳에 보낸 편지는 지금의 신약성서에서 어디에 해당할까요?
☞ 로마서.
로마서는 사도 바오로 신학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으며, 비록 로마에 있는 교회는 그가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장차 로마 교회를 방문한 다음, 스페인으로 가서 전도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알리는 뜻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그런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로마서15,22-29).
17. 로마서에는 사도 바오로 신앙의 핵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의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지 짧게 설명하십시오.
☞ 우리의 구원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즉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선사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18.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는, 그의 개혁의 토대를 ꡔ로마서ꡕ에 두고 “오직 신앙만으로,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라는 사상 아래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ꡔ로마서ꡕ가 오히려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서간 중에서는 ꡔ교회론ꡕ을 집약시켜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론의 종합은 현재 신약성서 중 어느 곳에 해당합니까?
☞ 에페소서.
교회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데, 사도를 통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이 이 에페소서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9. 사도 바오로는 세 번째 전교 여행을 끝낼 무렵에 신변을 위험을 느낄 정도로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사도행전20,22-24: 21,4: 21,10-14)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때 그는 해외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의 위해 거두어들인, 헌금을 가지고 갔는데(참조: 로마서15,30-31), 예상과는 달리 예루살렘 모교회에서는 헌금을 감사로이 받았고 또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출신 해외 유대인들이 군중을 선동하여 그가 율법과 성전 및 유대인들을 반대하고 이방인들까지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고발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를 계기로 순교를 하였는데 그는 어디에서 순교하였습니까?
☞ 로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