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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것만으로도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이 되셨고,
왕의 권위를 버리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함구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버림”에 대해 가르치신 분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4 제자도 과감하게 배와 그물과 부모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와 배를 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그들을 불렀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진 것을 버렸기 때문에 그분께 선택된 걸까?
아니면 우리가 그분께 선택되었기 때문에 버린 걸까?
정답은 당연히 후자다.
은총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12사도의 선택은 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현실의 우리는 자주 우리의 노력으로 그분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니다.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에 보답하시는 분이시고 또 그러셔야 한다.
착한 일에 상 주시고 악한 일에 벌주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거짓에 가득찬 이 세상을 그나마도 버텨내는 것이다.
절에 가면 신부, 수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65세 이상도 공짜다.
얼마전 고종사촌 누이가 휴가 와서 함께 고모와 아버님을 모시고 감포 바닷가 구경도 시켜드리고,
회도 사다 드리고 마지막엔 불국사 첨성대 구경을 시켜드린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나도 신부라고 말하기가 어려운데 수도복 입은 수녀님이 같이 있으니 얼마나 당당해지는지!
“나는 신부고 이분은 보다시피 수녀고 이분들은 다 경로우대증 있습니다.” 했더니
다들 웃으시며 그냥 들여보내 주셨다.
수도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이루어 지는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신부도 마찬가지다.
신부라는 것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첫보좌 때 예비자 모집과 선교를 위해 가두선교 활동을 벌였을 때도 그랬다.
수단 입고 거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신자들에게 힘이 되고 열성이 더해지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비자 봉헌 숫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신자들이 보여주는 열성만으로도 이미 선교는 더 큰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선교는 신자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버릴 수 없었던 재물이었지만
예수님께 선택된 그 이유만으로 과감하게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나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도 그분의 은총을 바라고 희망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그분께 선택된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쌓을 수 있는 공로가 그만큼 주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께 선택된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가 가진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
아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선택해주신 그분을 따를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비단 재물만이 아닐 것이다.
비뚤어진 자기연민이나 자만심도 버려야 하고,
선의의 탈을 씌운 온갖 거짓도 버려야 하고
허황된 욕심도 버려야 할 것이다.
선택되었으니 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