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과 돌 - 이회진 신부님

2006. 12. 2. 오전 11:52:48

글자
연중 34 주간(화) 2006.11.28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예수님께서 성전을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요한 3,19-21 참조).

분명 하느님이 주신 우리 자신의 영혼만큼 아름다운 성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1고린 3,11) 위에 세워진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3,16)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뜻은 분명 금이나 은이나 나무 혹은 돌로 화려하게 성전을 짓기보다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룩한 곳을 찾아 기도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현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한계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싶어 하고 하느님은 그런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을 찾아갑니다.
어느 곳에서나 계시는 주님과 함께 하기에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좀 더 거룩한 장소, 기도하기에 더 좋은 곳, 성전을 찾아가 기도하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를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어떤 조직 안에 놓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유를 홀로 주체하기보다는 적절한 규율이나 규칙 안에 놓는 것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근원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과 내적 자유의 추구는 이렇게 사람의 한 몸 속에서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자유에 대한 열망과 추구는
때로 내적 갈등과 모순을 일으키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러한 갈등과 모순 혼란과 고통이 있기에 자신의 내적 자유의 추구가 잘못된 것이고,
하느님을 거스른 죄가 되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향한 여정 안에 있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이 두 가지 열망과 추구는 대립이나 한쪽에 대한 일방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갈 “조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죽음을 끝나야할 운명을 말하지도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운명의 때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과 전염병이 일어나는 때는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날 때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고 시작해야할 시간이 되었음을 말할 뿐입니다.

근원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과 자신의 내적 자유에 대한 열망이 충돌하여
마음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가 시작할 것은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두 열망을 자신 안에 통합하기 위한 조화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조직(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안에서 살며 자유를 꿈꿉니다.
그 안에 발생하는 갈등과 혼란과 충돌은 이제 끝을 내야할 종말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시간을 준비하고 시작할 종말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삶의 기준”이겠죠.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유일한 삶의 기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당신과 함께 이제 시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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