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들은 대체로 필요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자기가 사냥한 먹이를 먹다가도 더 힘센 동물이 다가오면 그 먹이를 버리고 돌아선다. 그런데 동물의 세계에서도 거의 드물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자신의 힘만 믿고 욕심을 부리다가 그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켜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까지도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언젠가 TV에서 이런 경우를 본적이 있다. 표범이 자신이 사냥한 영양을 나무위로 높이 끌어올려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쫓아온 사자가 발을 동동거리다가 그 먹이에 욕심을 부리며 나무 위를 기어이 올라가서 화를 당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사자도 고양이 과라 나무는 탈 수 있지만 나무타기의 명수는 아닌지라…. 표범이 사냥한 영양을 빼앗아 의기양양하게 먹고 내려오다가 안타깝게도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모습이 방영되었다. 동물의 세계를 가만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왕에 세상에 태어났으니 보다 더 잘 살아야한다는 명제는 인간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보게된다. 이렇게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왕성하게 펼쳐가기 위해 다양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동물들의 지혜를 보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만의 독특한 삶의 지혜로운 방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동물들은 사냥을 할때는 물론 포식자로부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위장을 하거나 의태(나뭇잎이나 나뭇가지, 혹은 꽃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몸을 변화시키는 방법), 허세와 위협, 공생을 하거나 무리를 지어서 살아간다. 그러나 동물들이 살기위해 보이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늘 위험의 그림자를 재빨리 인식하려고 하는 예민함과 또 그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것과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안전한 곳으로 죽을힘을 다해 줄행랑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훌륭한 삶의 지혜로 비쳐진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환경 속에서 생명으로 이끌어줄 것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구분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줄 아는 태도야말로 주어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알량한 재능과 능력, 힘만 믿고서 우악스럽게 덤벼드는 세상살이에 내포된 위험성을 깨닫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태도야말로 정말 경건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중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왕은 많은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늘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남을 섬겨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모습에서 당신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힘을 과시하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권위와 권세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보고서 예수님을 세속의 왕(요한 6장15)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번번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피해서 조용히 산으로 물러가셨던 분이심을 기억해본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며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고 희망하면서도 그분에게서 세속의 권력을 원하고 있다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조용히 물러가라’고 등 떠미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며 세속적인 기대와 희망을 물리치고 계시는 예수님. 그분의 나라에 함께 있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은 자신의 희망과 기대를 예수님의 희망과 기대에 맞추어야 한다. 이로써 예수님이 진정 왕중의 왕이심을 온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성휘 신부 | 도화동 성당 주임 |
[인천]그리스도 왕 대축일2006.11.26.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 김성휘 신부님
2006. 12. 2. 오전 10: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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