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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32 주간 목요일. 2006. 11. 16. 중계본동. 필레 7-20. 루카 17, 20-25.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하는 질문은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고쳐들어도 됩니다. 사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궁금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믿고 있는데, 그때가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아듣고 대처해야 하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다’ ‘저기다’라고 말할 수 없고, ‘이런 모습이다’ ‘저런 모습이다’라고 말하는 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에 영육으로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혹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데, 내가 적절한 장소에 있지 않아서, 적절한 시간을 놓쳐서 그 나라를 보지 못하거나 그 표징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하느님 나라는 예수와 예수를 믿는 우리의 삶에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있습니다. 이미 오늘 말씀 전에 있었던 나병환자의 경우처럼,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찬양을 드리고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이미 우리 가운데 그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을까? 어떤 모습일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느님나라를 보게 하고, 살게 한다는 것이죠. (어제 본당에서 성서강의를 끝내고 늦은 시간 방에 돌아와 내게 써 주신 편지를 읽었다. 피곤하지만, 다 읽고 잤는데, 그분들의 말씀은 하나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무엇인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곁에 있는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단 하루라도 볼 수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22절) 그들이 받고 있는 박해를 이겨낼 수 있기 위하여 무엇인가 보여지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보여진 그 무엇인가로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먼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았다는 데에서 힘을 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신다는 것, 그것에서 힘을 얻으며 그분과 함께라면 어떠한 것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삶, 그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번개가 치듯이 이 세상을 비추며 옵니다.(구약에서는 하느님의 현존, 역사가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어느 장소에 없다고 두려워 말 것입니다. 오히려 내 삶이 주님의 뜻에 맞갖은 삶이었나 그렇지 않나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 - 조성호 신부님
2006. 12. 1. 오후 8: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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