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 †
어제복음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두 인물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한명은 소외지역 나자렛 촌구석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마리아 처녀가 하느님(천사)를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이고, 다른 한명은 호사스런 집단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네모가 주님을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의 인물 중 가난한 영인 마리아는 즉각 반응하여 순명했으나, 지식계층 니고데모는 여러차례 주님께 반문을 하고 따지는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도 요한이 전하는 마지막 복음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몰약을 장사지내는 대열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거듭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 계층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데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그들만의 주관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시간이 많아 걸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새술을 헌부대에 담으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찢기우고 터지고 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두려움 속에서 거듭태어남의 영광을 얻으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란 무조건 부정적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두려움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생체활성화의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더 폐쇄적이고 아집적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수난의 역사에서 악한 역할을 해 온 대부분의 바리사이파 족속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완악하고 독선적으로 그들의 이기적 수구생활을 이끌어갑니다. 이와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느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은행에 갔다가 총을 들고 있는 강도를 만났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쪽이 낭떠러지인 벼랑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의 순간 우리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마하속도로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또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무조건 바닥에 엎드리는 수밖에. 또 한밤중에 벼랑 끝에서 길을 걸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나약하고 비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이나 위기 상황 앞에서 생명을 지속시키고 싶은 생명활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느끼는 두랴움 속에서 보다 영적으로 쇄신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속박시킬 뿐만 아니라 기도 제대로 못 피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 수도 있을텐데, 꼭 최악의 상황만 예견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한 것인지요. 그냥 바람같이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정말 아주 시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것 같이 밤잠을 설치면서 괴로움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지난 과거 안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분노 등등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맺힌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자기 쇄신의 길, 자기 정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사랑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당당한 직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깨끗한 포기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두려움에 대한 처방전을 주고 계십니다. 고가에 대한 깨끗한 포기와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성령론을 펴십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복음에서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영이 임하시면 마리아 여인과 같이 즉각 순명하는 변화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복음의 마지막 성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인간의 육적 생명인 유한한 생명과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죽음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어떤 면에서 볼 때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일터로 나가면서 나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 죽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문제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이 죽음의 문제는 수없이 제기되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만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해준 이는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죽음 다음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 분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나의 모습이 무한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행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아멘.........◆
-두올-
어제복음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두 인물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한명은 소외지역 나자렛 촌구석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마리아 처녀가 하느님(천사)를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이고, 다른 한명은 호사스런 집단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네모가 주님을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의 인물 중 가난한 영인 마리아는 즉각 반응하여 순명했으나, 지식계층 니고데모는 여러차례 주님께 반문을 하고 따지는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도 요한이 전하는 마지막 복음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몰약을 장사지내는 대열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거듭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 계층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데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그들만의 주관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시간이 많아 걸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새술을 헌부대에 담으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찢기우고 터지고 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두려움 속에서 거듭태어남의 영광을 얻으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란 무조건 부정적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두려움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생체활성화의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더 폐쇄적이고 아집적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수난의 역사에서 악한 역할을 해 온 대부분의 바리사이파 족속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완악하고 독선적으로 그들의 이기적 수구생활을 이끌어갑니다. 이와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느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은행에 갔다가 총을 들고 있는 강도를 만났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쪽이 낭떠러지인 벼랑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의 순간 우리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마하속도로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또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무조건 바닥에 엎드리는 수밖에. 또 한밤중에 벼랑 끝에서 길을 걸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나약하고 비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이나 위기 상황 앞에서 생명을 지속시키고 싶은 생명활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느끼는 두랴움 속에서 보다 영적으로 쇄신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속박시킬 뿐만 아니라 기도 제대로 못 피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 수도 있을텐데, 꼭 최악의 상황만 예견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한 것인지요. 그냥 바람같이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정말 아주 시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것 같이 밤잠을 설치면서 괴로움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지난 과거 안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분노 등등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맺힌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자기 쇄신의 길, 자기 정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사랑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당당한 직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깨끗한 포기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두려움에 대한 처방전을 주고 계십니다. 고가에 대한 깨끗한 포기와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성령론을 펴십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복음에서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영이 임하시면 마리아 여인과 같이 즉각 순명하는 변화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복음의 마지막 성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인간의 육적 생명인 유한한 생명과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죽음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어떤 면에서 볼 때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일터로 나가면서 나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 죽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문제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이 죽음의 문제는 수없이 제기되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만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해준 이는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죽음 다음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 분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나의 모습이 무한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행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아멘.........◆
-두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