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다해 2007. 3. 4 문정 2동 성당
*“흑백 인생”
예전에 보았던 어떤 모험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여러 개의 성작(성배)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최후만찬 때 실제로 쓰셨던 성작을 골라내야 살아남는 장면인데, 악당들은 앞을 다투어 화려하고 값비싼 성작을 골라 죽게 되지만, 주인공은 나무로 된 소박한 성작을 골라 살아남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점점 더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며 돈을 법니다. 좀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옷, 컴퓨터, 음식. 네온사인이 현란한 서울의 밤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갈수록 원색에 가까워지는 컬러 텔레비전. 이런 모든 것들은 가끔 저에게 어린시절 흑백 텔레비전 시대를 생각나게 합니다. 초가집과 보리밥, 타는 저녁놀 피어나는 굴뚝연기, 어두운 집집마다 하나 둘씩 켜지던 30촉 백열등. 모두가 그립습니다.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컬러이지만, 우리 인생의 진실은 여전히 흑백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세상이라 해도 결국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인생의 많은 시간들이 기다림과 슬픔과 고통들이니 말입니다. 학생시절 푸른 꿈도, 2십대 핑크빛 사랑도 시간의 흐름 속에 빛바랜 추억으로 남게 되고, 잿빛 머리 주름진 얼굴에 흙이 그리워지는 시기를 홀연히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현란한 색채의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모든 색의 근본인 흑백의 인생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려한 성공, 명예, 쾌락 이런 것들이 아니라, 정직과 성실, 보이지 않는 희생,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사랑,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끄럽고 미련 많은 죽음을 끝으로 땅 속에 묻혀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조용하고 평화로운 죽음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가는 그런 인생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부신 모습의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나누신 이야기는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고, 사실, 산에서 내려오셔서 본격적인 수난의 길을 가시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 눈부신 예수님의 모습에 반해서 산에다 집을 짓고 거기서 살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미련 없이 산을 내려와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한 인간 안에 드러나셨던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뿐, 고독한 수난과 죽음의 터널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위에 내리셨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신 하느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앞의 영광만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 모두가 편리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고독하게 희생과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재료로 부활의 기쁨을 만들어내는 역설의 주인공들입니다. 비천한 몸으로 죽어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새 생명을 얻는 하늘의 시민들인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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