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의 답답함을 눈뜬 사람이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만,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불편하기는 하나 그 세계에 적응해 있음을 봅니다. 보지 못함은 곧 어두움 입니다. 그러나 개안수술을 하면 맹인들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각에 의존하여 보는 것을 보는 것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소경을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장 손을 대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갑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와 관계를 맺고 마을 어귀로 잘 나가지 못하는 그를 데리고 간 것은 사로잡혀 있는 그의 좁을 사고의 틀을 넓혀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정성을 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내적인 바라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손 얹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마련해준 안경으로서가 아니라 환자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빛으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이 기적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수난 앞에 배치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지식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과의 영적인 만남일수도 있습니다. 맹인이 보기 시작한 첫 시선은 윤곽 정도일 뿐 만남에 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나기 위해서 사람의 얼굴을 바라 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제대로 바라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만남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2007-02-14 /빛의 눈 - 한창현 신부님
2007. 2. 14. 오전 9:25:06
글자

마르 8,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