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건이나 차별 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
제 1독서 : 창세 2,18-25 (하느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복 음 : 마르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생기고 돈이 많고 또 사회적 직위도 높은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니면 선교도 훨씬 더 잘 될 것 같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함께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반대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다닌다고 나오는 것인지 의아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차라리 안 나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고 저런 사람이 성당에 다니면 오히려 주위에서 말들이 많을 것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저런 사람도 성당에 다닌다면 그런 성당에 나는 다니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죄인일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을 탄다고 여겨서 상종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강아지’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데 실제로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개, 강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다른 민족을 지칭하는 당시 유다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나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계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들과는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방인 지역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티로’라는 이방인 지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부정을 탄다고 기피하여 발걸음조차 딛지 않던 이방인 지역이었지요.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생의 한 이방인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치유해 주실 것을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모정에 못을 박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거절의 말씀이시지요. 물론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이 표현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의 그런 단호한 거절에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구나 하며 모멸감에 발걸음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더욱 달려듭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이렇게 거듭 사정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악령 들린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생 자체가 그러셨지요.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 잘 생긴 사람, 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 지탄받는 사람, 부정 탄다고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과 행적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그 어려움들을 도와주셨음을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잘 알 수가 있고 오늘 복음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부유한 사람, 성공한 사람, 잘나 보이는 사람에 더 쏠리는 유혹을 느낀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지의, 그리고 그 누구의 기도도 물리치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죄인의 기도라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지요.
‘죄 많은 내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께 기도 드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의 기도,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간절한 기도도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이방 여인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칫 성당은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의 공동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 성당에 다니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지탄합니다. 그 지탄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신앙의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거룩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당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거룩하고 날개 달린 천사들과 같은 모습들이 아닌 것이지요. 부족하지만 서로 노력하고 믿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공동체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살던 사람이 어떻게 성당에 나올 수 있느냐며 한 식구로 맞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너무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신부인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 사람에게 세례를 주시려면 책임 또한 지셔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들추어내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미래를 막는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지요. 우리는 부족하지만 모두가 함께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서 덧나게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서로 상처를 싸매 주고 치료해 주며 감싸안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모습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상처받고 지탄받는 사람을 우선으로 싸안고 치료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이웃을 죄인이라고 단정지으며 상처를 들춰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우리 행동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자칫 저지르기 쉬운 죄이며 유혹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을 알든 모르든, 그 누구도 받아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감싸주며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희망하고 나아가야 할 우리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