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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5 주간 목요일.
.................................................................................................................................. 어제 우리는 음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외적인 형식을 중요시하는 논쟁의 마침표격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에 관한 말씀을 통해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말씀하셨던 예수님. 이제 사람의 문제에 들어옵니다. 오늘의 말씀은 믿음에 관한 말씀임과 동시에 사람의 차별,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즘 하인즈 워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거론됩니다. 한국인의 피를 가진 한국계 영웅, 그의 한국방문을 두고서 그에게 명예 시민증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 진중권 시사 평론가는 ‘낯간지럽다’라고 표현합니다. 평소에는 순혈주의에 빠져 혼혈에 관해 비방하고 무시하기 일쑤인 사람들이 영웅이 되자 대우를 운운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혼혈아들이 얼마나 좋지 않은 시선으로 괴로워해야 했습니까? 이것은 현재라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을 강조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을 비꼬거나 비하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하나의 사람, 하느님 안에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 그들에게 있어 순혈주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개나 돼지 취급을 할 만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유명한 랍비 엘리에젤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은 개와 식사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마치도 예수께서 이 시각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의 발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 27)
예수님의 이 발언은 지켜보는 유다인들의 박수를 자아냈을 것입니다.(그것이 속으로든 겉으로든) ‘역시 이 분께서도 구원의 선민의식에 손을 들어주시는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혹시 함께 있었을 이방인들, 죄인들은 이 분도 역시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가? 라며 한숨을 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뛰어넘어 지속적인 믿음을 보이는 여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십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렸다고 여길 때 다시 일어서는 방법,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살려내는 방법, 이것이 주님의 방법일까요? 어쨌거나 이 극적인 반전은 유다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효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이분은 다른 분과는 다르다. 구원은 어디 한 쪽의 것이 아니라, 어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부편적인 것이고, 열려 있는 것이다.
이쯤 돼서 다시 시선을 돌려보면 우리가 따라온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깔보는듯한 눈빛과 침묵. 그리고 대화. 그러나 실상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신뢰가 오고 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우선 믿음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즉 하인의 병을 고치고가 했던 저 유명한 백인대장의 믿음이나 손을 대기만 하면 나으리라 생각했던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뛰어넘는 믿음이 이 여인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보고 계셨고, 그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이 여인과 아무도 모르는 싸움(긍정적인)을 하고 계신 것이고 둘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 믿음을 고백할 때에도 이렇게 했는데, 당신께서는 당연히 들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거래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여인의 믿음 정말 순수하고 강합니다. 그런데도 예수께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내가 이렇게 봉사했는데, 다른 이들은 봉사한 것에 자랑하며 우쭐대도 나는 정말 순수하게 봉사하면서 그것을 낙으로 여겼는데…. 그것으로 내가 복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내가 이렇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이지? 내 기도가 이렇게 메말라 보이고,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한 때에 주님께서 부재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그토록 많은 위안을 주셨는데, 나도 그것을 보아왔는데, 그렇게 믿음을 가진 나에게 다가오는 이 느낌은 무엇이지? 이 현실에 처하지 않은 이들이 어찌 이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강론을 하고 있는 사제조차도 말씀 속에서 묵상으로 생생하게 이 예수님과 여인을 만나지만, 내 현실 속에서 이런 체험은 없었기에 자신 있게 사실을 강론하면서 자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을 배우고 살아갑니다. 본받고자 다짐을 하는 것이죠. 불난 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불에 맡긴 채 아이를 보호해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 내가 그 상황의 아버지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 상황의 아버지를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와 사랑의 표현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같을 수는 없어도 말이죠.
이 여인의 모습. 그런데 믿음을 가진 이 여인은 예수님 안에서 그 능력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디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안된다’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그런 착각에 빠져들며 쉽게 포기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안된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자식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말씀 속에서도 가능성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것을 잡았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눈빛을 보면 압니다. 상대의 기운을 보면 압니다.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겠구나, 아니겠구나, 알 수 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 데도 실패하는 이유 대부분이 우리의 그 자존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있는 믿음을 아셨습니다. 그 믿음의 강함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통해 구원을 주십니다. 자그마한 노력이 아니라 그가 끌어낼 수 있는 믿음을 다 보임으로써 주님의 능력을 얻는 결과를 낸 것입니다. 믿음 대 믿음의 싸움. 전에 주님과 싸워야 한다는 예로 야곱을 들었습니다만, 이 여인은 주 예수님과 믿음의 싸움을 한 것입니다. 주님도 이 여인을 믿고, 이 여인도 주님을 믿는 싸움. 묵상하면서 놀랍고 감탄스러우면서도 과연 나는 이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끌어내지 못하고 포기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 믿을 수 있는데, 그런 나를 아시는데, 나는 그것을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내 안의 믿음을 깨우고 그 믿음을 더 강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더딘 순간에도.
구약의 욥을 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기에 더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생에서 그것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분께 응답(내가 원한 응답- 비록 그것이 순수한 바람이었다 해도)을 얻지 못할 때, 그때에도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그토록 선한 일을 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알고 그분의 뜻만을 좇았던 예수의 비참한 죽음을 보면서 그분이 말씀하신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고 알게 되는데,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왜 저를 버리시냐고 울부짖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께 나를 맡긴다는 고백으로 마감할 수 있을지, 내가 바란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할 때에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상호 믿음은, 믿음 대 믿음의 싸움은 결국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과 믿음 싸움을 벌여 봅시다. ‘그래 뭐 해보십시오. 그래도 저는 당신을 믿을테니.’ ‘아무리 나를 괴롭히신다 해도 그것이 괴롭힘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합니다’라고. ‘당신이 나를 믿고 불구덩이에 처 넣는다 해도 당신을 믿고 들어갑니다. 불을 죽도록 싫어하는 저 동물이 조련사를 믿고 불 사이를 뛰어들듯이’ 당신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할 때 조금이라도 끌어주십시오. 당신의 은총이라면 가능합니다.
부스러기 : 정말 부스러기입니다. 혹시 빵만 바라보는 거 아닙니까? 이 여인은 부스러기라도 충분히 당신의 능력이 나옵니다. 그것으로도 당신을 모시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나는 완전한 빵 형태만 바라는 것은 아닌지. ‘그것으로도 됩니다’라는 여인만은 못하더라도, 온전한 빵으로도 안 먹여 준다고 칭얼대는 나는 아닌지. |
연중 제 5 주간 목요일./이생에서 그것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 조성호 신부님
2007. 2. 8. 오전 8: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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