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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금
| 마르코 복음 2장 1-1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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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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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죄는 극복되는 것 이중섭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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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5-11) 하며 용서와 해방을 설파하십니다. 지나간 죄와 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지워버리지 않고 용서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전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해방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몇 가지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중대한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유머감각을 잃지 마십시오. 셋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용서하고 언젠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넷째, 정신적으로 격려와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실패담을 나누십시오. 다섯째,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실패한 후에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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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혹은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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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색다른 정의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의 저자는 “달리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어도, 다시, 여전히,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하였다. 그리고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시련을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사랑’과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껏 사랑해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무차별한 고통으로 상처를 주시는 하느님을, 여전히 태연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분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믿음을 확고히 간직할 수 있을지, 욥이 도달해야 할 내면의 진심은 바로 이에 대한 답 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욥에게 들이닥친 시련은 욥이 사랑한 실체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가 사랑한 것이 하느님(God)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행복 혹은 선(Good)은 아니었는지…. 돌아갈 다른 곳이 있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보상을 바라는 신앙이라면 그건 종교도, 믿음도 아니다. 기복과 기적만을 절대시하는 것이 하등 종교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Good’ 자체만을 사랑할 때, ‘God’는 실종될 수 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해온 것이 무엇인지, 정말 믿어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검증하게 하는 것, 고통과 시련이 가지는 궁극적 기능일지도 모르겠다.
김혜윤 | 생활성서사 | <생손앓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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