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주간 화요일2007.1.10.(히브 2,5-12/ 마르 1,21-28) 오늘 독서인 히브 2,5-12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8, 5-7의 인용입니다. 시편에서는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지닌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운명에 놓인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육신을 취하시고, 고난과 죽음의 비천함을 택하셨다는 것을 오늘 독서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겪고 죽음으로써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대사제가 되어 영원한 중개자가 되셨다는 사상이 히브리서에 일관되게 흐르는 신학 사상입니다. 남을 위해 대신 모욕을 받고 매를 맞고 죽음까지 자처하면 현대인들은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유대민족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도 대신 고난 받고 죽는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복하는 강한 힘과 지도력을 휘두르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유다 민족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였고, 그런 초라한 인간을 자신들의 메시아라고 소개하는 것이 민족적인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고 썼을 때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요한 19,21)라고 고쳐 써주기를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가 자신들의 임금이라고 하니 유다인들에게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수치이었겠습니까? 우리도 십자가의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이 과연 그렇게 수치입니까? 물론 그것을 수치라고 여긴다면 우린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생활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의 생활을 마음으로부터 거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면 주님과 교회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실천해야 합니다. 원래 희생이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행하는 것은 참된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이 세상에 인간으로 기꺼이 오셨고,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태어난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
연중 제1주간 화요일2007.1.10./참된 희생 - 하성호 신부님
2007. 1. 11. 오전 1: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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