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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매화, 목련, 벚꽃, 진달래등
화사했던 그 봄꽃들이 다 졌다.
꽃들의 향연이 끝난 뒤의 조용함이
마치 청중만 있는 텅 빈 연주회 무대 같다.
가슴에 남은 잔향 속에 봄이 깊어가고
꽃이 진 자리를 연둣빛이 곱게 메워가고 있다.
잎이 떨어진 거무튀튀한 가지마다
여리디 여린 잎망울이 나와 햇살에 반짝이더니
봄비 내린 뒤에는 제법 이파리의 모양을 갖추어 간다.
한껏 차오른 연둣빛이 너무 맑고 싱그럽다.
애기살처럼 보드라운 잎에는 실핏줄 같은 잎맥이 선명하다.
숲은 긴 동면에서 깨어나
소리 없는 생명의 몸짓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겨우내 칙칙했던 산의 모습이 밝아졌다.
산의 색깔이 달라지니
사람들 얼굴 색도 달라지고 옷 색깔도 달라졌다.
이맘때쯤이면
겨울 내내 검은 빛으로 갇혀있던 고향의 만경강도
연한 연둣빛을 띠며 저녁 노을이 살던 먼 곳을 향하여
갈대밭 사이를 흐르기 시작했었고
여느때처럼
눈에 익은 강둑의 느티나무와 싱그러운 앞산 그리고 파란 하늘을
연둣빛 가슴으로 수줍게 맞이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산을 아름답게 치장하던 고운 꽃들보다도
가냘퍼 보이는 이파리들의 맑고 깨끗한 연둣빛이,
그 작고 여린 빛들이 모여
산과 강을 생동감 넘치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는 것 같다.
연둣빛은 정말 멋진 요술쟁이다.
산을 오르며 둘러보니
숲의 속뜰에 내려앉은 봄이 참 공평하다.
어린 나무와 가지 부러진 나무
그리고 속을 비워낸 고목에게도 골고루 햇살을 내려
삭정이처럼 보이는 가지에 연둣빛 잎을 피우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운 꽃들을 다 볼 수 있도록
꽃이 진 다음에 어린 잎이 나오게 하는 것을 보면 사려 또한 깊다.
그렇게 꽃과 세월을 다투지 않는
그 인내심 있는 연둣빛이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오랜 세월 모진 풍상을 견디어 낸
연륜이 묻어나는 짙푸른 솔잎에 기대어 선 연둣빛 잎이
할머니 등 뒤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천진난만한 애기 같다.
두 빛깔의 농담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풋풋한 산내음이 풍기는 신록의 산빛이다.
산 아래 무성해진 숲을 내려다 보니
데굴데굴 굴러도 다칠 것 같지 않은
초록빛 바탕에 연둣빛 무늬를 수놓은 부드러운 융단 같다.
태고의 빛 같은,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고운 연둣빛은
어느 화가도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집 옆의
느티나무 잎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쳐 눈부시게 반짝인다.
살랑대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 연둣빛 잎들이
너무 아름다워 숨이 멎을 정도다.
화사한 꽃에만 정신이 팔려서인지
아니면 산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살아서인지
전에는 그 연둣빛을 모르고 지냈었다.
불과 몇 년 전에서야
그 빛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작은 소망들을 보았다.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도
나이 들면 때론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며 그 뜰을 빼앗아 가더라도
자연은 그 사람들에게
영원할 수 없는 생명 순환의 섭리를 깨우쳐 주며
여전히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그 연둣빛도 세월 따라
한여름에는 초록으로,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든 여러가지 색으로
사람들 마냥 바뀌어 갈 것이다.
많은 빛깔들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는 그 연둣빛,
이 산에 오래 머물것 같지 않은 그 빛깔을 마음에 담는다.
맑게 울리는 새 소리를 들으며 바위에 앉아 있으니
수락산을 내려오는 사람들마다 모두 연둣빛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상원이레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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