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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살아가심은 사람들 안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우리 삶 속의 진리와 거짓, 진실과 겉치레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시고 참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평생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동참하게 되고, 전쟁, 소유욕, 이기심, 교만 따위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배척합니다. 또, 주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려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결단과 다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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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시며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신 모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던지십니다.
‘칼’ 하면 로마에서 공부할 때 가끔 방문한 성바오로 대성당 앞에 있는 대리석상의 바오로 사도가 들고 있는 쌍날칼과, 세종로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손에 있는 ‘칼’ 이 겹쳐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쌍날칼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 12) 라는 말씀에 따른 표상이고, 이순신 장군의 칼은 직접 지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시에서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생각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표상합니다.
자신의 삶 앞에 놓여 있는 유혹 앞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없는 얼버무리기 식의 적당한 평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하느님과 사탄과의 평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해야할 날카로운 쌍날칼이 더없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명옥 신부(살레시오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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