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을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어떤 이들은 공자나 석가모니라 하고, 어떤 이들은 단군 할아버지나 계백 장군 또는 강감찬 장군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군 또는 정 도령이나 미륵불이 환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에 주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바오로도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바오로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의 어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 * * * *
천국의 열쇠
◆‘열쇠’ 라는 말 속에는 뭔가 문제의 해결책, 정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쇠만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해 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단순하고 우직하고 벌컥 화도 잘 내고, 덤벙대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빛을 상상해 보니 묘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오래전에 읽은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가 떠오르는 이유와 같은 감동입니다. 주인공 치셤 신부의 삶을 통해 뚜렷이 기억하는 감동은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앎이란 우리 머릿속 이해이거나 왜곡된 앎일 때가 많습니다.
구원에 대한 앎도 그렇습니다. 마치 구원이 우리의 행동에 달린 것처럼 때론 죄책감으로, 때론 비장함과 엄격함으로 자신을 몰아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의를 우리의 행위라 한다면 사랑은 우리의 지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의도 사랑의 한 부분이지만 종종 우리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깊은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지향을 보시며, 우리 구원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치셤 신부처럼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명민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말이 행동에 앞서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관심하며 편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인간적 약점 가운데서도 천국의 열쇠를 받았듯 흔들리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서 우리도 천국의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남궁영미 수녀(성심수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