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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고을에서 제법 권위와 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딸의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권위나 덕망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지만, 회당장으로서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 놓고 인정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저 무덤덤하게 자기 직분이나 수행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청원을 드립니다.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벌써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을 탈까 봐 그녀를 멀리합니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러나 감히 나서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자기 곁으로 지나가실 때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한 가닥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알게 모르게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주님의 은총이었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찮은 것에서도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언제나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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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 받으시는 예수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으시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가르치고 계실 때 중풍 병자와 그 친구들이 방해를 합니다. (마르 2, 4) 휴식도 방해받습니다. (마르 6, 33) 제자들이 기도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마르 1, 36)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시기 위해 서둘러 그 집으로 발걸음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병은 만성질환입니다.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녀를 격려해 주십니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주다가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제의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저의 발걸음을 막아서는 신자들이 가끔 있습니다. 별로 시급한 일도 아닌 “축성 좀 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새 신부 때는 그런 신자들에게 “지금 내가 미사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안 보이십니까 ?” 라고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면박을 줄 시간이면 충분히 축성을 해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방해하는 사람들을 환대하신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나는 생애 내내 내 일이 방해 받는다고 불평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알았다.
방해 받는 것이 바로 내 일임을” (헨리 뉴엔)
강신모 신부(의정부교구 화전마을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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