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다쳐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되면서
집에 혼자 있는 무료함을 덜어볼 요량으로
비디오 테잎들을 섭렵하게 되었다.
<usual suspect>, <only you>와 같은
한 5년 전쯤 상영했던 영화들이 대부분인 테잎들 속에서
우연히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혹 남동생이 빌려다 놓고 잊은
야한(?) 영화이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테잎을 돌렸는데,
그것은 94년 정도로 기억되는
<M>이라는 모 TV 드라마의 녹화 테잎이었다.
거의 신인이나 다름 없는
심은하의 약간은 어색한 연기와
지금으로 봐서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의상들,
거의 무기나 다름 없는 크기의 휴대폰 전화 등을 보며,
그 드라마가 사실은 납량 특집극임도 잊은 채
시종일관 즐거워했다.
녹화는 4부까지 되어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몇 개의 광고와
이문세, 이홍렬, 이휘재가 공동 진행했던 오락프로그램 하나가
중반까지 녹화된 것으로 테잎은 끝났다.
1센티는 낮아보이는 심은하의 코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젊어보이는 이창훈도
나의 즐거움에 한 몫을 했다.
각종 쇼 프로나 토크 쇼 진행에서
탁월한 말솜씨를 보이는 이소라가
그렇게 말을 못하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고,
군대 가기 전 이휘재가
상당히 잘생긴 사람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엔 갓나온 신인 같은 얼굴로 연기를 하고 있던 개그맨이
지금의 심현섭이 될 줄은
그 때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 테잎을 발견한 덕분에
모처럼 우리 식구들은
몇 년 전의 스타들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며 재미있어 했다.
오랜 만에 보는 인생극장
-이휘재가 맡았던, 2가지 삶을 다 살아보는 개그코너-
도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 당시엔 그 프로를 보며
매번 ‘나라면’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오랜 만에 어떤 삶을 택할까 고민도 해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옛날 모습을 추억하며
그리움에 잠기나 보다.
특히나 스타들의 옛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은 여유를 가진 대배우들에게도
저렇게 어색하고, 매사 조심스러워 하고,
약간은 촌스러운 모습의 신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은근히 삶에 힘을 주기도 한다.
그들의 변화를 쫓아갈 수 있기 때문일 거다.
무언가를 이루었건 그렇지 않았건
지난 시절의 나를, 사람들을 추억하게 되는 건
어린만큼 많이 가졌던 순수를 그리워하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있었던 곳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세월도 훌쩍 뛰어 넘어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때문에 자꾸 돌아가고 싶어하고,
추억에 잠기는 것 아닐까?
이제는 박제된 행복마냥
사진 속에서나 웃고있는 어린시절의 나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또 그토록 더 애달픈 것인지도..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가, 친구가, 혹은 텔레비전 속 스타들이
모두 가진 것 없고,
훨씬 부족하고,
무명의 신인에 불과했다 해도
그 때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일이
그렇게 가슴 아픈 기억만으로 남지 않는 것은
인간이 지닌 망각의 힘이
고통은 잊게 하고,
남은 아름다움만 더 과장시키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고통도 웃으며 추억할 만큼
내가 성숙하고 여유있어진 때문이겠지….
아직 내게는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은 생이 주어져 있겠지만,
그러리라 믿지만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이기에,
오늘 뜻하지 않은 테잎 하나가 가져다 준 옛 기억들이
새삼 마음에 행복하나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