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익 진영의 몇몇 역사학자들이 현대사를 쓰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좌우대결의 역사로 접근한 학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현대사는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이 주장하듯이“진보와 보수반동 사이의 대립사”이고“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모든 크고 작은 소요에는 반드시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의 폭로에 부합하는 역사다. 김용규 선생은 동료간첩 2명을 사살하고 귀순하여‘김일성 비밀교시“를 우리에게 선물한 애국자다.
필자는‘2011년 10월“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반란사건”(380쪽)에서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이래 일제의 탄압을 피해가면서 남한 사회에서 진행됐던 좌익활동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그 좌익활동들 중에 끼어 있는 4.3사건을 자세하게 조명했다. 현대사의 주요장면들을 영상처럼 정리한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인 2008.10월에 필자는 1995-97년 김영삼 시절 사회를 요동치게 했던“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수사 및 재판기록 18만 쪽을 정리하여 다큐멘터리 역사책“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1,720쪽(4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2010년 8월에는 수사기록, 북한의 대남공작역사책들, 북한의 정기간행물들, 통일부 분석자료 등을 모두 종합하여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온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낸“솔로몬 앞에 선 5.18”(280쪽)을 내놓았다.
이 책은 필자가 36명의 탈북인들이 펴낸 수기집“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힌트를 얻어 확실한 문헌들을 찾아 정리하고 분석한 것이다. 북한특수군은 분명히 왔고 규모도 600명 정도인 것이 확실하다는 분석이다.
5.18단체들은 필자가 탈북자들의“카더라”통신만 믿고 북한특수군이 왔다고 주장한다느니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600명씩이나 어떻게 올 수 있느냐느며 반발하지만 이러한 반발은 억지일 뿐 논리가 아니다. 5.18세력은 광주의 피해가 왜 꼭 최규하 정부와 공수부대에 의해 발생했다고 해야 5.18의 명예가 존중되고 북한특수군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주장하는가.
그들이 필자를 두 차례나 고소한 것도 바로 그러한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도대체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안보적 이슈가 어떤 이유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인가? 해괴망칙한 그런 주장은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일 때 할 수 있는 주장이고 5.18세력이 빨갱이 세력이라고 가정할 때만 성립하는 아주 불온한 주장 아닌가.
북한특수군의 광주개입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쟁은 일부 애국세력과 5.18세력 사이에서 국한돼 왔지만 다행히도 최근에는 젊은 애국자들에게도 널리 확산돼 가고 TV조선과 채널A에서도 자주 토론되고 있어 점점 더 사회적 이슈로 부각돼 나가고 있다. 그런데 출연하는 인사들의 준비가 부족하고 전문성을 갖추지 못해 자칫 모처럼 관심을 가진 시청자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중요한 주제에 대한 진실에 물타기를 하는 효과로 나타날까 필자는 그것이 불안하다.
전에 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주제에 대해 글과 동영상을 통해 발표를 했지만 이번에는 더 넓은 공간으로의 확산을 위해 패키지 형태로 요약 정리했다. 이 글이 애국자들에 의해 아무쪼록 널리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광주에 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확신하는 이유
1. 10만 명 이상이 동원된 야전군 규모의 도시게릴라 작전에 지휘부가 없었다.
5.18은 광주시만 해도 10일 동안 1개 야전군 규모에 해당하는 10만 이상의 시민들을 총동원하여 벌인 도시게릴라 작전이었고 전남지역 18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조직적인 게릴라 작전이었다. 제주 4.3사건의 경우 겨우 350명의 산(山) 게릴라를 지휘하는 데에도 김달삼과 이덕구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자들과 수많은 공산 프락치, 남로당, 민민전 간부들이 포진한 지도-지휘부가 있었다.
그런데 전남지역 전체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야전군 규모의 도시 및 지방 게릴라작전에는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지휘부가 없었다. 지휘부가 없으면 이 엄청난 규모의 도시 및 지방 게릴라 작전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 군사적 판단이다.
일반 국민들은 5.18폭동에 시민군의 지도부가 구성되어 처음부터 작전지휘를 했다고 믿고 있지만 수사기록에 의하면 전혀 아니다. 시민군 지도부로 알려진 조직은 5월 25일 처음으로 구성된‘학생수습위원회’이고 이 조직의 위원장은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김종배였다. 5.18세력이 그토록 존경하는 5.18의 영웅 윤상원(본명 윤개원)은 김종배 아래의 대변인이었고 5.18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 대령 출신으로 나온 박남선(안성기 배역)도 당시에 26세의 골재화물차량 운전사였고 그 조직의 상황실장을 맏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코너로 몰아넣고 몰살시키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5월 19일, 20일, 21일의 ' 화려'하고 대담무쌍한 도시게릴라 작전을 지휘한 시민-지휘부는 일체 없었다. 광주 시민들이 존재했다고 믿고 있었던 지휘부는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5.18역사책들을 보면 북한특수군들이 전남 각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고 심지어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춘 버스의 차량번호(광전교통 전남5아3706)과 폭도들의 감정까지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북한이 대남 모략목적으로 만든 5.18영화“님을 위한 교향시”의 주인공은 폭동기간 내내 10일 동안 도망가 숨어 있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다. 그리고 북한의 5.18관련 책에는 광주작전에 사용된 전략과 전술까지 기록돼 있는데 남한측 자료에는 도시게릴라전에 사용됐던 북한의 전략-전술이 일체 기록돼 있지 않다.
2. '광주민주화운동'의 1등 공신, 최고 유공자들은 누구인가?
5.18자료를 보면 초중고학생들이 23%를 차지한다. 그리고 사망했거나 유죄판결을 받아 1등공신이 된 사람들도 직업을 보면 90% 이상이 용접공, 석공, 목공, 껌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막노동, 미장광, 방위병, 양화공, 자개공, 샤시공, 도자기공, 식당종업원, 타일공 등등의 이른바 기층 서민들이다. 광주에서도 하찮은 일을 하며 천대받던 사람들이 바로 광주의 1등공신인 것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가장 '화려'했던 작전이 이루어졌던 5월 21일 이후에 사망한 광주시민들은 153명이다. 이 153명은 5월 21일 이후에 계엄군과 싸우다 사망했기 때문에 분명한 1등공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1등공신은 누구인가? 군법회의 제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은 283명이다. 사망한 1등공신 153명과 1심유죄판결을 받은 1등공신 283명을 합하면 436명, 이들이 바로 광주 1등공신의 전부다.
그런데 이들 1등공신들은 10대-20대 학생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각지에서 온 뜨내기들로 군중심리에 부하뇌동하거나 협박과 매수를 통해 행동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결속력을 갖추고 또 스스로 조직을 구성하여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두뇌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북한특수군의 개입을 설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는 것이다.
이들 1등공신 436명으로는 지휘부도 구성할 수 없고 결속력을 갖추어 조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5월 21일에 이루어진 세계 최상류에 속하는 '600명 정예군의 특공작전'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3. 5월 21일 수행된“600명 정예군의 특공작전”이란 무엇인가?
600명의 정예군은 광주폭동 작전의 키워드다. 당시 광주에서는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에 내려온다는 말이 유행했다. 북한 책(광주의 분노, 1985) 35쪽에는 "600명으로 구성된 특수군중의 한 집단”이 5월 21일에 현역부대인 199지원단 무기고를 포함해 수많은 무기고를 털었고 대량의 폭약과 뇌관을 탈취했다고 기록돼 있다.
1995년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 보고서에도 600명이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및 버스 300여대를 탈취하여 전남지역 18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오전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5,408정의 총기를 탈취했다고 기록돼 있다. 북한 책에는 무기고가 6개 더 많다. 모두 44개 무기고를 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기고 탈취에는 참으로 교묘한 전략이 있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담성이 있었다. 그들 600명은 무작정 아시아동차로 가지 않았다. 먼저 300명이 20사단의 지휘차량과 트럭이 그날 이른 아침에 광주에 진입하는 것을 미리 알고 매복 습격하여 빼앗았다. 그리고 빼앗은 20사단 표시가 돼 있는 지휘차량과 트럭들을 과시하며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이 항거할 수 없게 위협했다.
이런 기막힌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도의 전술에 통달한 군장교 아니면 일반 국민중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천대받던 기층 서민계층의 1등공신 436명 중에 이런 기막힌 발상을 한 사람이 있겠는가?
이들 300명은 5월 21일 오전 8시, 광주톨게이트에 20사단 지휘부가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톨게이트 부근에 매복해 있다가 20사단 지휘부를 기습공격했다. 300명이 화염병 등을 던지며 갑자기 달려들자 사단사령부 병력은 혼비백산했다. 300명의 정예부대는 20사단 차량 번호가 찍힌 지프 14대와 20여대의 트럭을 빼앗아 몰고 아시아 자동차로 가서 직원들이 순순히 복종하도록 위협했다.
자동차공장 직원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장갑차 4대와 300여대 차량의 키를 주었고 공장 앞에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300명과 합세한 정예부대 600명은 미리 작성된 약도를 가지고 44개 무기고를 향해 달려가 불과 4시간 만에 2개 연대를 무장할 수 있는 엄청난 량의 무기를 탈취했다. 외지 기층서민들이 대부분인 1등공신 436명이 4대의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고 또 4시간에 44개 무기고를 털 수 있겠는가?
4. 80만 광주시민을 날려버릴 폭탄을 광주시민이 조립했다?
북한 책과 남한 수사기록에 의하면 이들 600명이 탈취한 8톤트럭 1대 분의 TNT가 도청 지하실에 쌓여 있었고 폭탄전문가가 뇌관과 도화선을 조립하여 엄청난 폭발력의 폭탄으로 전환시켜 놓은 상태였다. 만일 누군가 지하실에 담뱃불 하나를 던지면 80만의 광주시는 히로시마 같은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광주시를 날려버릴 수 있는 이 같은 대담하고 극악한 짓을 광주시민 스스로 했다고 믿어달라는 말인가? 목공, 석공, 미장이 껌팔이 등등 직업의 기층서민들이 어떻게 이런 고난도의 폭탄조립 기술을 소유했겠는가? 그 당시 도청 지하실에 조립된 폭탄을 해체한 폭탄 전문가는 배승일이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당시 전라도 전체를 관할하던 계엄군 소속의 단 한 사람 뿐인 문관이었다.
5. 아래는 북한군특수군이 광주에 왔다고 보는 증거와 정황근거이다.
1) 전체 사망자 166명 중에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116명이며 이중에서 69%인 80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에 의해 사망했다. 당시 계엄군은 M16만 보유했다. 따라서 무기고 총으로 80명을 쏜 이들이 게엄군이 아닌 것이 확실한 이상 광주시민들과 5.18세력들은 80명을 쏜 이들이 광주시민인지 북한특수군인지 양자 택일해야 하고 둘 다 아니라면 어떤 근거로 아닌지 전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해명해야 할 것이다.
2) 광주시민군들은 1,700명의 일반 죄수와 170명의 좌익수들이 수용돼 있는 광주교도소를 장갑차를 앞세워 공수부대와 6차례나 대접전을 감행했는데 매우 위험하고 많은 피해가 예상되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오직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도소를 공격하여 죄 짓고 사회에서 격리된 죄수들을 시민군에 가담시키려고 한 이유가 뭔가?
3) 사망자들 중 12명은 분명한 한국인인데 신원을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우리와 똑 같은 모습의 사람인데 우리 국민이 아니라면 북한군 아니겠는가?
4) 광주사태로 실종된 사람은 최종 66명으로 확정되었다. 그들은 시체도 없이 사라졌고 그래서 5.18묘역에는 묘는 없이 66명의 이름만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어떻게 되었기에 몇십 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흔적도 없는 것일까? 추측하건데 그들은 틀림 없이 사망했고 산 속 어딘가에 암장되었을 것이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일부 시민군들이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특수부대원들의 능력 있는 행동에 매료되어 그들을 계속 따라다녔다고 했다. 북한특수군은 북의 지령에 따라 5월 23일경 전원 철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순진한 그들이 퇴각하는 특수군을 계속 따라다니려고 하니까 특수군이 산중에서 처분-암장한 것 아닐까?
5) 19세 때 북한 특수군으로 5.18 광주사태 당시 지휘관 호위 임무로 내려왔다가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고 지내다 탈북한 정 모씨가 현재 분당에 살고 있다, 그동안 계속 방송 출연을 사양했었는데 2013년 5월 15일 오후 4시30분 경 채널A에 나와 5.18 광주사건 때 북한 특수군이 내려온 사실을 증언했다.
6) 가장 먼저 공작 차원에서 황장엽과 접촉한 사람은 국정원이 아니라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김용상이다. 그는 1996년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5.18은 북한이 배후조종하고 계엄군에 뒤집어 씌운 사건이며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았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고 이 증언은 2013년 4월 22일 TV조선에 공개방송되었다.
7) 북한은 매년 5.18 때마다 1주일 정도 당정 최고 간부들이 주최하는 5.18 행사를 성대하게 기념하고 추념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통일부의 주간정세보고서가 증명하고 있다.
8) 북한정권은 최고인 일에 '5.18'을 명예로 하사하고 있다. '5.18영화연구소' '5.18청년호'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5.18땅크호' '5.18누에고치반' '5.18작업소' 등등 매우 많다. 통일부 주간정세보고서, 북한 책, 사진, 통일뉴스 등에도 등명되어 있다.
9) 전교조 초대회장 윤영규는 1980년 5월 23일 M16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36인무장조'를 도청지하실에서 직접 목격했고 그들과 긴 대화까지 나누었다. 5월 23일 당시의 시민군은 콩가루 같은 상황이라 36인으로 뭉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5월 23일 현재 시민군에게 탈취당한 M16도 7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36인무장조가 사용한 말도 시중잡배들의 언어가 아니라 고도로 자제되고 훈련된 말이었다.
10) 계엄군이 시외로 도망간 날은 5월 21일 저녁이었다. 계엄군이 빠져나가자 5월 22일 아침에 광주의 유지들이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했고 그 대책위가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이 무기반납사업이었다. 무기고를 광주시민이 탈취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빨리 무기반납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6. 600명 북한특수군이 어떻게 휴전선과 게엄군 경계망을 뚫고 들어왔을까?
북한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1968년 1월 21일 33명의 '대통령암살특공대'를 청와대 앞마당까지 침투시켰다. 또 그해 10월 말에는 123명의 무장특공대를 울진-삼척에 침투시켜 이승복 사건을 저질렀다.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다는 말은 나라를 지키는 군대니까 하는 말이지 국방 현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거짓말이다. 분당의 그 탈북자는 광주에 내려올 때 납북한 어선에 4개의 엔진을 달아 바다 위를 날아왔다고 했다.
김일성 종합대학 출신의 탈북 여교사는 그의 내연남 안창식이 부하 11명과 함께 10.26 직후 잠수함으로 목포로 잠입하여 어느 슈퍼 가게로 안내되었으며 그곳에는 부마사태에 투입되었던 간첩 7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작전지휘를 받았는데 그들 중 어떤 팀은 땅굴로 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수군 600명 중 일부는 10.26 직후부터 5.18까지 6개월에 걸쳐 소규모 단위로 내려왔고 다른 일부는 고첩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길 안내를 한 고첩들 중 한 사람이 비전향장기수 손성모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유로 5.18단체를 빨갱이 단체로 5.18세력을 빨갱이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2013년 5월15일 시스템클럽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