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전쟁 62주년

2012. 6. 25. 오전 12:01:17

글자

[6.25 전쟁 62주년] 6.25 전쟁의 원인과 배경/과정/결과①

오늘 6월 25일은 6.25 전쟁 6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민족상잔(民族相殘. 같은 겨레끼리 서로 다투고 싸움.)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는 6.25 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게 했고,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낳았습니다.
특히 수천만명에 달하는 이산가족들은 지금까지도 생이별의 아픔에 눈물짓고 있습니다.

 잊혀져서도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될, 허리가 끊긴 지금의 한반도를 만든 이 6.25 전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가고 있습니다.
6.25 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일부 청소년들은 6.25 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의해 발발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6.25 전쟁 61주년을 맞아 일부 잘못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로잡아지길 바라며
이 글을 준비했습니다.

6.25 전쟁의 원인과 배경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휴전협정)까지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으로,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箏. Korean WAR.)이라고 불립니다.
6.25 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직접당사자였지만 그 배경은 복잡합니다.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1943. 11. 25.

 

 일제치하에 놓여 있던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를 명목으로 북위 38°선, 즉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분할 주둔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를 위한 잠정적 경계로 생각했지만, 소련의 속내는 38선을 영구적 경계로 만들어 그 위 지역을 소비에트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계획대로 소련은 남북간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키고 통일정부수립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 정치적 분단을 강요했습니다. 한반도 통일을 시도했던 미국도 소련과의 합의에 번번히 실패하자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성급한 정책으로 방향을 틀고 맙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총선거 실시.

사진은 당시 투표소 전경.
 

 결국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UN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가 실시돼 제헌국회가 구성됐으며, 북한 지역에서는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찬성은 백색 투표함에, 반대는 흑색 투표함에 기표하도록 해 사실상 반대 투표가 어렵게 함)'에 의해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게 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 요인들. 앞줄 중앙이 김일성.

 이후 남북간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북한은 여러차례 남한에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계속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최종 수단으로 전면적 남침을 결심하게 됩니다. 북한이 전쟁을 결심하게 된 데는 소련의 막대한 군사적 원조도 한 몫 하게 됩니다.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조선인민군'을 창설하는 등 군사력을 양성하고 군 장비를 지원하는 등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북한의 막대한 군사력에 비해 남한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게다가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 군사력 균형은 급속히 무너지게 됩니다. 여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도 북한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한 외교적 사건이 잇따릅니다. 북한의 남침 의도에 불을 붓는 상황이 되버린 것입니다.

<1950년대 기준 남북한 군사력 비교>

 


 

 6.25 전쟁 61주년] 6.25 전쟁의 원인과 배경/과정/결과②

6.25 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북한의 대규모 병력에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가 있었음에도 군 수뇌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했고, 마침 주말을 맞아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습니다. 전방부대 사단장을 포함한 장교들도 이날 저녁 파티에 취해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은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했지만 위의 모든 상황은 남한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서울이 함락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서울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자신은 특별열차를 이용해 대전으로 피신했습니다. 서울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비로소 대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북한군의 한강 이남 진격을 우려해 하나뿐인 한강철교를 폭파하면서 대피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명 가운데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기 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뿐이었습니다.
한강철교를 폭파했음에도 북한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 피난가는 사람들.

 한편,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미국은 UN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고, UN 안보리는 결의문 채택을 통해 북한에 남한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게 됩니다.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 회원국이 UN군을 조직해 6.25 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관찰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 상륙하는 UN군

 UN군 참전 초반에는 국지전에서 북한군에 밀리는 등 패전을 거듭했지만,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한국군은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만인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고(서울수복), 계속 북진해 10월 26일 압록강, 11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했습니다.
한국군에 의한 한반도 무력 통일이 눈 앞에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9.28 서울 수복

 하지만 중국이 참전하면서 이같은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고 나면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에 북한을 지원하게 되었고,
인해전술을 바탕으로 한국군과 미군을 공격해왔습니다.
한국군과 미군은 다시 38선 이남으로 밀려내려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습니다(1.4 후퇴).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1월 말 다시금 공세를 가해 서울을 재탈환했습니다.
이후 남북 군은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방어선을 치고 치열한 국지전을 벌이며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1.4후퇴 당시 중공군의 모습




1.4후퇴 당시 꽁꽁 언 한강. 폭파되어버린 한강철교 아래로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밀고 당기기만 계속되는 성과 없는 전쟁이 고착화되자 미국은 휴전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침략자를 응징했다는 명분은 이미 세웠고, 6.25 전쟁이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습니다.
막대한 인력 및 국력 손실로 전쟁 수행능력 고갈 상태에 처해 있던 북한도 정전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휴전에 반대했습니다.




UN측 해리슨 장군과 북측 남일 수석대표가 3년간의 전쟁을 끝내는 휴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북한의 요청으로 UN군이 정전을 승인하면서 휴전협정이 시작됐고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간의 6.25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지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양측은 일단 휴전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해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로 했으나 지금까지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의 결과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쟁은 남북 모두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인명피해는 약 450만명(남한-200만, 북한-250만)으로 추산되며, 20만명의 전쟁 미망인과 10만여명의 전쟁 고아, 1천여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 22만8천여명, 미군 5만4천여명, 기타 UN군 3천여명 등입니다.
전쟁기간 중 한국은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교통시설의 80%, 가옥의 절반이 완파괴되거나 손상되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6.25 전쟁

휴전은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것으로, 남과 북은 아직 전쟁 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실제로 휴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있었습니다.
1968년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 외에 수 차례의 잠수함 침투 사건,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2009년 대청해전,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kjk1042/160473396


 

6. 25의 노래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굴러 땅을치며 의분에 떤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빌어 모조리 쳐부숴
흘려온 갚진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3.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것 이기고야 마는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싸워
다시는 이런날이 오지않게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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