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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사업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4년부터 시작되었다. 1985년과 1986년에 당시 전두환대통령은, 율곡사업
문제점들에 대해 몹시 신경질적일 만큼 큰 관심을 보였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의 육곡사업에 대한 모든 성과를, 낱낱이 재평가하라는 명령을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내렸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 한 율곡사업 성과에 대한 평가 과제를 모두가 교묘하게 희피하여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율곡사업에 대한 평가 명령은 오늘까지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 내렸고, 또 율곡사업을 총체적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와 나의 연구원들 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율곡사업에 초미의 관심을 가졌던 사업은, 공군의 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
7월 1일까지 공군은 그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방공자동화사업'을 추진했다. 공군은 그 사업만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대한민국 영공을 나는 새 한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다.
그래서 2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방공자동화장비를 구매했고, 1985년 7월 1일부터 그 장비가 가동됐다. 그런데
마침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세 번씩이나 날아왔다.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했고, ILㅡ28기가 이리 저리
남해안 지역 상공을 40분이나 헤매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MIGㅡ21기도 날아왔다. 이 사건들로 당시 전국이 시끄러웠고, 모든 매스컴들이 연일 톱기사로 여론을 들쑤셨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다 잡을 수 있다던 방공자동화 장비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세 대의 항공기
중에 한 대도 잡아내지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면 그 사업은 당시 국방비의 8%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한, 국군 역사상 미증유의 최대 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8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런 컴퓨터 로직으로 공중표적을
포착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2억 5천만 달러를 들인 사업이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다는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그 자동화 장비는 차라리 없는 편이 백번 나았다. 공군이 그 장비를 믿고 영공감시를 소흘히 하는 것도 문제이고
그 장비 유지비와 정비비가 엄청나고, 그에 따른 인력도 이중으로 늘어 났는데도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여
만일 공중전을 하게 되면 백발백중 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가 작업을 하면서 이 자동화 사업을 담당했던 오파상과 접촉하여, 미국 휴즈사 책임자 3명을 연구원으로
불렀다. 책임자는 대머리가 벗어지고 뚱뚱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연구실에 들어서자 마자 위엄의 폼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 희사에서 제공한 시스템에 하자가 있고, 이는 대통령에게 보고가 돼서 대책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거만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입니다. 휴즈사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휴즈사가 할 수 없는 일은 전 세계 어느
회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동안 공군에게서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결국 공군은 책임을 희피하기 위해 휴즈사에게 코치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기 싸움에 질 수 없었다.
"당신은 통계학에서 Typeㅡ1 에러와 Typeㅡ2 에러를 아십니까? 에러를 걸러내는 ThreshㅡHold(문지방:기준)를
얼마로 잡았는지 알려 주시오."
통계학에서는 잡상(Noise)을 실체로, 실체를 잡상으로 오인하는 에러가 있다. 기준(문지방)을 높이면 실상을
잡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문지방을 낮추면 잡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리고 전자를
Typeㅡ1 에러라고 하고, 후자를 Typeㅡ2 에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통계학의 이런 기본조차 알지 못했고,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다. 약점을 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가 세계 최고의 회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세계 최고가 아닙니다. 그리고 방공자동화는
휴즈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한 것 아닙니까?"
그에 그 책임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A/S 의무기간 1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미 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습니다. 내 동창생들이 미국에 많고 그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즉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이 Typeㅡ1 에러와 Typeㅡ2 에러도 모르면서
엉터리 시스템을 한국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휴즈사 일행 모두가 확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곧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굳게 약속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그들은 아무 시정도 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 달리 공군은 방공자동화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시스템의 주인은 공군이고, 공군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당사자입니다. 앞으로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부터 공군을 더욱 멸시했다. 장비는 분명히 잘못돼 있고, 휴즈사는 이를 고쳐주겠다고 약속
했다. 그런데 공군은 그들의 면책을 위해 애국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공군 고위 지휘관들은 왜 무엇 때문에
애국을 내팽개치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 주었는가? 나 한사람과 공군 전체의 명예가 충돌한 일대 사건이었다.
연구소 건물의 내 방은 항상 일요일도 없이 밤 1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연구소 경비병들은 내가 가족이
없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맡은 과제만 수행했다면 나도 얼마던지 여유 있게 생활을 엔조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문제들을 찾아 정리하여, 해당부서 장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몰두했다.
그래선지 더러의 장군들은 나를 국보라고 말했고, 더러의 장군들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문제아)라고 말했다.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수구 저항세력들이야 의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공군 지휘부의 그런 자세는
정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볼 때, 가장 나쁜 수구세력은 당시의 국방장관과 차관,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던 육사 11~12기였다.
합참 작전본부에 설치된 조사팀은 이틀간의 공개토론 끝에 현장으로 나갔다. 토의가 진행될수록 공군은 눈에
띄게 나의 이론에 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사팀에 있던 장군들이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면서 공군 편을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잘 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던, 육사 16기와 20기 작전계통의 장군들이었다. 그들이 토의는 그만 하고
현장에 나가자고 서둘렀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사명감에 불타는 것처럼 분칠을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했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나는 공군의 로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하구나 생각되었다. 당시 20기는 그 후 수경사령관까지
했다가, 김영삼 시대에 하나회 문제로 숙청됐다.
현장조사 첫 날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로 갔고, 다음 날은 대구 팔공산 레이더 기지로 갔다. 그러나 나만 쏙
빼고 자기들만 간 것이다. 내가 오산으로 갔을 때, 공군 헌병 중령이 정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들어가지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한마디로 막가는 세상이었다. 나중에 연구소 동료들 말을 들으니 결과는 이러 했다. 4대의 헬리콥터를 서쪽으로
띄워놓고 그 자동화장비가 어떻게 잡아내는가 관찰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동화장비의 화면에는 서쪽에 떠 있는
4대의 헬리콥터는 잡히지 않고, 떠 있지도 않은 비행체 84대가 동쪽에 나타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비행기 4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84대의 허상만 보여주는 엉터리 장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러면서 주한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나지 않는다며, 공군전투력 약화
보다는 책임추궁이 더 무서워 숨기기 바빴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비들이 많이 지출되었다. 예를 들면 '호크' 라는 방공포는 이동 장비이다.
전쟁이 나면 진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작전 개념이 정립돼 있고, 그래서 장비 모두가 이동 체제로 갖추어 있다.
그런데 300억원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장비가 붙박이 식으로 고정돼 있었다.
이동식 유도탄에 붙박이식 통신 장비를 설치하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인 것이다.
미국의 4C 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지만, 이는 모두가 겉 모양만 흉내 낸 불량품이었다.
공군은 이 회사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공군은 이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내가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하여, 공군참모총장을 필두로 수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섰다.
이 문제가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자, 처음에는 하나회 국방차관과 하나회 합참작전처장이 바로 잡겠다고 호언하며
나섰다. 바로 잡겠다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다짐할 때는, 그들의 온 몸이 사명감이라는 금물로 화려하게 도금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게 이 과제를 맡아 달라고 하면서,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기무사 간부들도, 갑자기
나를 보안 위규자라 위협하며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우리 군의 약점을 공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국방장관과 차관은 공공연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나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욕했다.
그들은 내가 군에서 나가 주기를 바랬고 실제로 이리 저리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군을
나오게 되었고, 제대 후 운 좋게 곧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제대하자 공군과 합동참모본부는 대통령에게
「방공자동화 사업 이상 없음」이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내가 1987년 2월 28일자로 예편원서를 내자, 이기백 국방장관과 황인수 차관의 입이 귀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다.
나는 연구소에 있는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온 장군급의 민간인 간부를 만난 일이 있었다. '바니 스미스' 라는 여성
보스였다. 그녀는 비용 분석 기법에 대한 토의에서, 나의 발표를 들은 후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예편하여 연구소를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한국에 있는 미군 대령을 나에게 보냈다.
"강 박사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고 싶다."
라고 하면서 나를 미국으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 가자, 그녀는 즉각 20만 달러의 과제비를 만들어
내가 다닌 모교 해군대학원 교수직을 부여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몇 달 동안의 행정시간이 소요됐다. 그동안
나는 하루에 햄버거 한 개로 연명하다시피 하면서 보냈다.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방위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제 수행과정 중 나는
펜타곤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그녀는 한마디로 주위를 휘어잡는 여장부였다. 펜타곤에
있는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고방식에 접할 수 있었고, 수많은 자료들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사실상 강제로 군에서 예편당했지만, 생각하면 그 강제 예편이 내 일생에서 전화위복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도와 주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두 여인이 있는데
한 분은
"지금부터 나는 네 누나야."
라고 한 천사였고, 또 한 여인은 공식석상에서 딱 한 번 만난 이후,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미국으로
불러 준 바니 스미스 라는 미국방성 여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들이라면 평탄하게 살았을 인생을, 나는 참으로 어렵고 힘들고 또 거칠게 살아왔다.
만일 절대자께서
"너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줄테니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즉석에서 거절할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꾼 나에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족감을 얻으려면, 내가 지나온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다시 반복하여 걷기에는
그 길은 너무나 험했고, 불확실했고, 아팠다.
1980년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처녀작을 냈고, 이어서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
라는 경영학 책을 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약 10년 동안 군사평론가, 경영학 초빙강연, 기업체 경영진단,
기타 기고 등으로 매우 바쁘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것이 곧 수입으로
직결했다. 그리고 그토록 바랬던 자유공간도 넓어졌다.
1990년대 중반 한때 모 초대형 그룹을 찾았던 VIP들은, VIP 브리핑룸에서 검은 커튼이 무겁게 열리면서 아래와
같은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신발가게가 하나씩 있었다. 하루에 10컬레씩 팔렸다. 떨어져 있던 가게를 한 곳으로
모았더니 하루에 100컬레씩 팔렸다. 떨어져 있던 가게를 단지 한 곳에 모았을 뿐인데, 10배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각각 떨어져 있을 때는 낱개의 합이었지만, 한 곳에 모으니까 신발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10배의 효과는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낸 에너지다. 줄여서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라 말한다.」
ㅡ 강성원 시스템공학 박사 ㅡ
ㅡ '오늘도 내리는 비' 는 다음 42회에 '옮긴이의 맺는 말'로 끝입니다.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