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가 말하는- 말씀의 봉사직

2008. 12. 16. 오후 6:14:54

글자

말씀의 봉사직

             저자: Charles Perrot

 

신약성서가 말하는 말씀의 봉사직

먼저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누가 우리를 해방하고 구원하는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답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모세 율법의 준수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던 옛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제 구원은 주 그리스도의 인격 즉 그분의 해방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의 말씀이 구원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를 받았다”(마르 2,5)고 선언하시자 그가 구원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치유 동작은 하느님 나라가 그분의 인격을 통해 이미 현재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그러기에 그분의 치유동작은 구원의 말씀과 하나를 이룬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점에서 세례나 성체성사와 같은 성사적인 동작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씀은 동작과 결합된 말씀 즉 행위와 함께 하는 말씀이며 말과 동작이 일체를 이루는 효과를 가진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베풉니다”내지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말과 행위를 반립시키거나 적어도 이둘 사이의 간격을 강조한다. 그 결과 말씀은 동작과 분리된다. 예컨대 복음 선포와 성사를 대립시키고, 말씀의 식탁과 빵의 식탁을 인위적으로 반립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서는 말과 사물을 이렇게 갈라놓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다바르는 말씀과 현실, 즉 말씀과 사건을 동시에 가리킨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말씀은 현실화되고 중요한 행동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리스적 사유에서 말씀은 개념의 숲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말씀이라는 단어를 가장 포괄적인 성서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에 놀라워하시지 말 것이다. 우리는 이 한 단어로서 오늘날 ‘말씀과 성사들’이라고 부르는 내용을 지칭하고자 한다. 요컨대 말씀이라는 단어는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데서 가장 심오하게 나타난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요한 1,1.14).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신약성서 안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아모스에서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을 거쳐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중심에 서있다.

 

신약성서에 이르러서도 말씀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위 하신 것을 전하기 위해 복음 말씀에 관심을 집중한다. 또 그 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오늘에도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골고타의 십자가는 어제도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대한 침묵의 말씀이다. 복음서에 이어 사도 서간들(바울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예수의 말씀이 언제나 새롭게 메아리칠 수 있도록 새로운 말씀으로 표현한다. 하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이 과정은 오늘에도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책으로서의 성서가 아니라 여기서 분출하는 말씀이요 그것은 과거의 말씀이면서도 늘 새로운 말씀이다. 그리고 이 구원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말씀의 봉사를 통해 전달되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구원의 말씀과 말씀의 봉사는 복음서의 중심에 서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기쁜 소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신앙인이 각자의 처지에서 넓은 의미로 말씀의 봉사를 수행해야하는 필연성이 제기된다.


봉사자(ministre)는 라틴어에서 minister 그리고 그리스어의 diakonos에서 비롯하였다. 디아코노스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부제라는 현재의 의미 외에도 봉사자를 지칭한다. 이 단어는 집주인의 시중을 드는 종(그리스어로 doulos), 하인 내지 노예라는 말과 다르다.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구원의 말씀에 봉사하고 이를 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점에서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이고 봉사자이며 통교자이다. 이는 마치 인터넷의 서버가 통신을 매개해주는 것과 같다. 그는 단지 주인 앞에서 최대한 봉사하는 굴종적인 종이 아니다. 그는 말씀을 간직하고 전해야 하는 봉사의 직무를 지닌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빵의 기적 때에(마태 9,35; 15,36) 생명의 빵을 전했던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의 힘과 중요성이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어서 바울로가 설립한 고린토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봉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이 구원의 말씀의 전달자들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들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유다인들)의 영역에서 사도 (예수께서 파견하신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그리스도인 예언자(예수의 대변인이라는 의미에서)가 이 새로운 말씀의 담지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이방인으로서 유다적 유일신 신앙에 귀의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단어가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그것은 말씀의 봉사와 빵의 봉사를 책임지는 봉사자(dialonos, 동사 dialonein)라는 말이다.


한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가 살펴보는 시대는 70년 예루살렘 멸망이전의 초대 교회의 매우 이른 시기라는 점이다. 이 시대에 주교, 사제, 부제 등의 단어는 아직 널리 통용되지 않았다. 예외(필립 1,1)가 없진 않지만 이런 어휘들은 70년 이후 특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시대(약 95년경)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들은 일찍이 초대 공동체의 사도와 그리스도인 예언자, 교사들이 맡아했던 말씀의 봉사직을 다른 모든 신자들과 함께 수행하였다. 구원의 말씀의 초기 증인이었던 이들에 대해 시선을 모아보자.

 

말씀의 봉사직(2)

1. 말씀의 힘
여러분은 말씀이 신약성서에 차지하는 비중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말씀에 관계되는 동사들, 예컨대 ‘말하다’, ‘이야기하다’, ‘선포하다’, ‘전하다’(그리스어 전하다는 동사 angelo에서 복음 euaggelion이 파생되었음)그리고 ‘증언하다’등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에 비해 탁월하게 말씀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말씀이 구약성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주님은 결정적이고 단호한 방식으로 당신의 말씀을 땅위에서 실현시킬 것이다”(이사 10,22 로마 9,28에서 재인용). 하느님의 말씀은 이처럼 효과적이시다.


요컨대 일세기 유다교에서 말씀의 신학은 이집트의 그리스어 권의 유다인들과 이스라엘의 에세네파 사람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 모두에게 중요했다. 히브리어로 토라는 본시 훈령을 포함하는 율법이라는 좁은 의미보다는 살아있는 말씀의 계시를 뜻한다. 특히 바리사이적 경향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말씀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오늘에도 계속 말씀하신다. 이 말씀(아람어로 Memrah)의 역할은 아람어로 번역된 창세기의 첫 부분에 잘 드러난다. 히브리어 성서는 단지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뿐이다. 그러나 회당에서 봉독되었던 아람어 창세기(따르굼 네오피티 창세 1,1)는 “태초에 하느님의 말씀이 지혜와 함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대 유다교의 중심부에서도 말씀의 중요성의 강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의 주님을 이 최초의 말씀과 쉽게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외경의 한 작품에서 들어보자. 이 책은 일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해진 설교내용을 반향하고 있다. 저자인 가명 필로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첨가하여 회상한다:


“태초에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암흑과 침묵이 있었다. 그러나 침묵은 말씀이 되었고 암흑은 빛이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성서 고사기 60,2).
만일 내가 한국적 상황을 오해하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형언할 수 없는 말씀에 담긴 무거운 침묵이라는 주제는 차라리 여러분의 의식구조에 더욱 부합한다. 이에 비해 서구적 사고는 침묵과는 거리가 멀어서 자주 언어에 취해버리고 만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바울로는 특히 말씀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였다. 여기에 관한 몇몇 본문들을 살펴보자. 먼저 로마서에서 “나는 과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다시 말해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 그것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로마1,16). 여기서 복음의 기쁜 소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말씀은 능력(희랍어로 dynamis)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효과적이고 역동적이며 선포된 구원을 실현시킨다.

 

사도는 이 복음이 부활하신 분의 십자가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다(1고린 1,23). 그것은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뼈아픈 말을 던진다.” 사실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할 자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그러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그러기에 바울로가 비록 당대의 현인과 설교가들의 수사학적인 기교도 없이 연약하고 겁이 많고 두려움에 떤다고 고백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이 모든 것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에게 더 이상 속해있지 않다. 그 말씀은 성령과 하느님 능력을 증거한다(1고린 2,3-5.13). 사도는 2고린에서 말씀의 봉사자들이 (그리스도인 전체를 대상으로 넓은 의미로) 하느님의 능력(2고린 6,7)이신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해 받았을 적에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믿는 여러분 안에서 효력을 내고 있습니다“(1데살 2,13).


이런 상황에서 사도는 이 복음의 말씀이 퍼져나가기를 얼마나 다급하게 바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태가 매우 긴박하기 때문이다. 로마 10,13-15에서 사도는 요엘(3,5)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이 들어보지 못한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선포하는 이들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받은 말씀을 전하도록 파견된 자 곧 사도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언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저 대변인일 뿐이다.


이 말씀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아울러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선교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 자체로 관계 개념이기 때문이다. 말은 다른 사람에게, 곧 타자에게 건네 진다. 그리고 말씀은 개인적인 차원에 있지 않다. 비록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이 “나”는 교회전체를 끌어들인다. 말씀은 이를 선포하는 자의 인격과 그를 둘러싼 공동체를 형성시킨다. 이처럼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말씀을 통하여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선교가 꽃을 피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설교가들은 광장이나 길모퉁이에서 가르쳤던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을 모방하지 않고 일세기의 유다교 회당과 같은 곳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바울로가 한번은 아테네의 광장에 가서 선교를 시도하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사도 17,16-34). 성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그 말씀을 살고 있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성령의 역동성안에서 선교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 이르러서야만 완성되는 지속적인 확장의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를 관통하는 생기 넘치는 활력이다. 그리하여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지배받기에 이른다(요한 1,1.3.10).


그러나 이처럼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는 이 말씀은 정확히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것은 알다시피 새로운 철학의 용어로 구성된 새로운 개념과 이성적인 담론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 즉 십자가에 다리시고 부활하신 분의 사건 안에서 집약된다. 물론 이점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대해 길게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이 고린토 교회의 상황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초대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말씀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

[출처] 말씀의 봉사직(2)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3)

2. 고린토 교회에서의 말씀의 기능
기원 54년 생기가 넘치던 도시 고린토로 가보자. 이곳은 펠로포네수스 원로원이 있는 지방이었고 고린토 지협의 양쪽에는 두 개의 중요한 항구가 있었다. 즉 레게는 아드리아해 쪽에 있었고 겐크레아는 에게해 쪽에 있었다. 로마 16,1에서 푀베라는 여인은 부제요(글자그대로 말씀의 봉사자)겐크레아 교회의 보호자로 불린다. 고린토는 6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로서 새롭게 단장된 로마식의 도시였다. 그리고 인구의 절반은 고고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대한 로마식 집의 노예였거나 아니면 해방된 노예였다.

 

주로 그리스인(희랍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고린토 교회는 어느 정도 도시의 이미지에 따라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노예들과 가난한 거류 이방인들 그리고 해방된 노예들과 새로 등록된 시민들이 소수의 상류층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였다. 예컨대 가이우스의 집은 로마서를 집필할 때 바울로를 맞아들였다. 그리스도인들 모임에 질서가 있기를 바랐던 바울로가 보기에 고린토의 이 젊은 공동체에는 동요가 적지 않았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14,40)”. 한편 말씀은 고린토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못했다. 일부 방언(공동체 기도에서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 예언자(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인이라는 의미로)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차단시키기에 이르렀다.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구원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이를테면 각자의 역할을 구별하고 그 봉사 직능을 구체화함으로서 질서를 회복시켰다.


여러분은 사도가 열거한 세 가지 중요한 직능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로 말하면 첫째로 사도들이고 둘째로 예언자들이며 셋째로 교사들입니다”(1고린 12,28). 이 세직능은 모두 말씀의 봉사에 관련된다. 이것들을 정의하기에 앞서 다소 복잡한 앞의 문장을 읽어보자. “어떤 이에게는 영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베풀어지는가 하면, 다른 이에게는 같은 영에 의해 인식의 말씀이 베풀어집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같은 영 안에서 믿음이, 다른 이에게는 그 한 영 안에서 치유의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은사가 다른 이에게는 예언의 은사가 또 다른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할 수 있는 은사가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은사가 베풀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같은 영이 이루시며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 나름의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1고린 12,8-11).


이어서 바울로는 공동체의 지도와 애덕 실천에 관련되는 몇몇 사항을 보다 분명히 지적한다.
이 놀라운 목록은 오늘의 직무와 비교하여 무엇보다 차이가 많다. 세부적인 주석은 다음으로 미루고 핵심 사실들만을 지적해보자. 먼저 두 종류의 봉사 내지 직무를 구별해보자. 첫째 것은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활동에 관계되고 둘째 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행위에 연관이 있다. 두 번째 것은 사회적이고 교회적인 행동들과 특히 건강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활동을 야기하는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애덕의 행위를 포함한다. 여기서 활동적인 신앙이란 교의 체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고 “산을 옮길 수”(1고린 13,2)있을 만큼이나 성령의 역동성을 무제한 신뢰하는 믿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의사가 치유행위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작으로 해석하면서 의료 행위(치유의 은사)가 언급된다. 바울로는 하느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하실 수 있는 순전히 기적적인 동작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는 예수의 선하심의 동작에서 비롯한 같은 종류의 기적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 공동체는 단지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을 한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행위는 말씀의 표현이다.


어쨌거나 사도는 위에서 지적한 두 번째 직무에 대해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단지 공동체 내부의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의 말씀의 직능을 조직하는데 관여한다.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폭넓게 종합해보자.
세 가지 유형의 말씀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전개된다. 1) 첫째는 하느님이나 그분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말씀으로 그것은 예수의 말씀 자체를 반향 시키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난다. 2) 두 번째는 하느님과 그 분의 그리스도께 드리는 말씀으로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들(방언을 포함하여)과 찬미의 기도를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3) 세 번째는 하느님과 그 분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인데 그것은 교사, 교리교사, 그리고 신학자들에게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성찰에 관한 이 세 번째 유형의 말씀은 제쳐두기로 한다. 아울러 교리 교수적인 방법론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교리교육에 관한 작업도 본질적으로 성령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하지만 여기서 성령은 직접적으로 그 원리가 되지 않는다.

 

신학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말 할 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계시나 기도의 말씀은 다르다. 그 말씀은 진실되기 위하여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표현되어야하며 따라서 영의 감도를 받아야한다. 나는 예수의 말씀을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 말씀은 나에게 주어져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며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 나는 그러기에 그분의 대변인 즉 예언자일 뿐이다. 게다가 나의 기도는 성령이 뒷받침해주실 때에만 타당하다. 바울로 사도가 선언하듯이 “하느님(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곧-아버지! 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시어 언제나 살아 계신 예수만이 아버지께 참되게 기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의 입과 마음을 성령께 내어 맡김으로써만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성령은 기도가 가능할 수 있는 출발점이요 원리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소위 예언의 말씀은 하느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성서에서의 하느님의 말씀과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말씀 그것은 계시 말씀 그 자체이다. 그 것은 과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던 예언자들을 통해 표현된 말씀이다. 이 예언자들은 당시에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대변인들이었고 선택된 백성의 지도자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내지 “주님의 신탁”과 같은 단어들은 흔히 예언서의 시작이나 마지막에 등장한다.

 

한편 그리스도인 예언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을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이번에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취하여 그것을 이제는 예수를 지칭하는 말씀으로 변용시킨다. 그는 성서를 그리스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와 그리스도인 예언자는 예수의 말씀을 취하여 그것을 어제의 말씀으로 반복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선언하는 말씀으로 전해준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면 이는 특히 주님의 식사 (1고린11,20)즉 미사 때에 이루어진다. 후대에 약 70년경에 이 말씀들은 먼저 마르꼬 복음 안에 집성되었고 그리고 로마, 안티오키아, 그 밖의 다른 그리스도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하여 적용되었다. 이처럼 부활하신 분이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주신다.


한편 이 예언자 직무는 오늘날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 수행되고 있다. 내가 미사에서 사도들의 어느 서간문을 들을 때 그것은 단지 독서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그분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오늘의 대변인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다. 복음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사제, 부제나 평신도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로 사도가 말하듯, 공동체를 격려하고 훈계하는 일이 예언자의 역할이기 때문에 오늘날 설교하는 사람도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오늘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시는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제가 삼인칭의 (예수께서는 빵을 드시고 축복하시어 쪼개셨다) 형식으로 최후의 만찬 이야기를 상기시킬 때, 또 그가 “이는 내 몸이고 이는 계약의 피다”라고 말할 때 그는 결국 가장 중요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예수의 대변인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 대변인의 입을 통하여 이는 내 몸이요 내 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유형의 말씀 즉 하느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에 전해지는 말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감사의 기도(희랍어로 eucharistia가 이를 뜻한다) 이다. 이번에는 기도의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 향한다. 이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향하는 계시나 예언의 말씀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고린토에서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었다. 1) 일부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옳게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말씀과 자신들의 말을 쉽게 뒤섞어 놓았다. 2) 한편 영의 뜨거운 열기 속에 발설된 방언 형식의 일부 기도는 공동체의 단순한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만의 찬미의 행위는 아름답고 음악적일 수 있었으나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기도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두 가지 영역에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일부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은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하여 주님의 지고한 말씀과 자신의 담론을 뒤섞기에 이르렀다. 또 다른 한편에서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무질서하게 변해버린 방언에 반대하는 사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기에 그대가 영으로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면 초심자들의 자리에 있는 이는 그대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으니 그대의 감사기도에 이어 어떻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고린 14,16)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만일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면 초심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의 감사기도에 아멘이라고 응답하겠는가? 물론 영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방언기도는 참된 것이나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통교가 부재한다. 결국 단어가 없이 이루어지는 거의 음악 같은 기도와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이해 가능한 기도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동의한다는 의미로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반 신자들과 축복의 기도 내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구별되었다는 점이다. 감사 내지 축복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식사에서 결정적으로 주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미 바울로 시대에 전례의 역할 분담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바울로는 이 두 가지 난점의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기능을 더욱 효과적으로 조정하였다. 어느 주교가 나이가 많아지거나 자신의 직무를 혼자서 처리해 낼 수 없게 될 때 사람들은 그에게 보좌 주교를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인용한 1고린 12,8-11에서 바울로는 예언의 기능에 영적인 식별이라는 또 다른 은사를 부과한다. 소위방언 기도도 해석이 수반되어야 한다. 아름다우나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기도가 분명한 언어로 표현되어 고린토의 영적인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마음의 기도를 해석할 수 있어야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예언자는 아무거나 말을 꺼낼 수 없다. 그가 하느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공동체 전체가 고르고 선별하여 인증한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내용은 성령 안에서 구성원 전체의 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말씀은 그가 그리스도이기에 순전히 개인적일 수 없다. 그 말씀은 공동체 전체를 끌어들이고 성령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오늘에도 여전히 가능한 고린토 교회의 이러한 이상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 이따금 절대적인 확언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착한 하느님처럼 착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전례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잘못 인도하는 사람들을 누가 모르겠는가? 차라리 바울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직무를 책임진 사람들에 대하여 몇 가지 확인된 사항들을 종합해보자.

[출처] 말씀의 봉사직(3)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4)

3. 말씀의 봉사직
두 가지 사항만을 부각시키겠다. (1) 말씀의 봉사직은 누구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살아있는 이 말씀을 선포하는데 특별히 구별되는 직무들이 있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2) 다음으로 이 구원의 말씀을 특별히 책임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일세기 후반기에 특히 다양했다는 점이다. 바울로가 말하는 방식은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방식과 다르고 가명 바울로 서간의 저자들의 방식과도 다르다. 결국 이들은 현재 실천되고 있는 같은 말씀의 봉사직이지만 이를 지칭하는 표현은 공동체마다 달랐다. 이 점을 다음의 두 가지 확인된 사항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1) 사도, 예언자, 말씀의 봉사자
첫 번째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가지 공통된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구원을 가져오는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이 신앙인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확신이다. 그는 그 말씀을 늘 받을 뿐이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신앙인에게 그 능력을 주신다. 봉사직은 언제나 받는 것이고 세워지는 것일 뿐 받은 직무는 자신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다시금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자.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로 말하면 첫째로 사도들이고 둘째로 예언자들이며 셋째로 교사들입니다(1고린 12,28)”. 이와 유사한 요소들이 사도행전과 사목 서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사도 6,3과 특히 20,28에 바울로가 밀레도스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타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떼를 보살피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떼의 감독으로 세우셔서 당신 아들의 피로 얻으신 하느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참조 1디모 1,12; 2,7; 2디모 1,11). 디도 1,5에 의하면 바울로는 디도에게 “내가 그대에게 명한 대로 도시마다 장로들을 임명하라고”말한다.


두 번째로 확인된 사항은 더욱 놀랍다. 말씀과 관련된 직능의 이름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신약성서에서 병행적으로 또는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직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사도, 예언자, 교사, 동역자, 목자, 인도자, 봉사자들(희랍어로 diaconoi), 감독(여기서 주교라는 말이 비롯함) 원로(사제라는 말이 여기서 나옴). 간단하게 몇 마디로 역사적 상황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복잡하다.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로마 또 다른 곳에 위치한 각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말씀의 봉사직(들) 그리하여 성사들을 책임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고유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알다시피 주교, 사제, 부제의 삼대 직무는 95년경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에서부터 단지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그전에는 여러 가지 칭호들이 존재했는데 다음의 세 가지가 알려져 있었다.


(1)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서 사도와 예언자, 장로나 원로(이 단어는 참사회의 회원을 가리키는 유다교적 개념이다)
(2) 신설된 교회 구성에 바울로는 전통적인 용어들(사도, 예언자, 교사)을 도입하였으나 장로라는 말은 취하지 않았다. 원로는 바울로 친서에 등장하지 않고 단지 사목서간(디모테오 전 후서)에만 나타난다. 이어서 바울로는 사도, 예언자, 교사에 선행하는 셈어적 어원의 단어를 현대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희랍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던 새로운 동사 원형에서 출발하였는데 봉사하다(그리스어로 diakonein)와 봉사자(희랍어로 diakonos)가 그것이다. 특히 바울로에게서 이 동사 원형은 봉사직 어휘의 근간이 되었다. 그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후대에 파생된 부제라는 말보다 훨씬 무거웠다.
(3) 이미 필립 1,1에 의하면 감독(주교) 라는 단어는 특히 사도적 전통의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이 단어는 감독관의 세속적 기능을 본래 지칭하는 것이었고 특별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바울로와 후대 전승은 이 단어를 취하여 여기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였다. 어쨌거나 초대 신자들은 유다교 회당과 우상숭배적인 연합회 모임에서 사용되던 명예롭고 종교적인 칭호들을 피하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사도 칭호는 열두 제자와 바울로 그리고 2세기부터 사도 전승이라 불렸던 전통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만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 의해 파견되어 그 분의 주권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반대로 예언자 칭호는 교회의 용어에서 곧 사라지고 만다. 이 단어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모호한 말이 되었고 희랍인들의 귀에 거의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언자는 미래나 좋은 운명을 예견하는 사람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특히 바울로 그룹에서는 봉사직에 관한 용어가 비약적으로 확산되었으나 후대 교회에서 부제라는 의미로 제한되었다. 끝으로 장로 또는 원로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바울로 교회의 (사목 서간을 포함하여) 감독에 상응하던 직무였으나 첫 일세기 말에는 이 두 가지 기능이 서로 분리되었다. 결국 과거의 사도와 동일시되는 주교, 사제 또는 장로 그리고 부제로 구분되었다. 후대에 속하는 사목 서한에서 이 직무들의 핵심적인 역할은 여전히 말씀을 충실히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디모테오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전해야한다”고 말한다(2디모 2,15).


먼저 바울로 시대에 봉사자(diakonos)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다시금 강조해서 살펴보자. 당시의 희랍적 문맥에서 그 단어는 말씀에 봉사하는 자 즉 당국의 대변인이나 대리인을 가리켰다. 디아코노스는 무엇보다 말씀의 봉사자이다. 게다가 회원들의 식사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지칭하며 또는 각자가 나누어 먹는 공동체의 식사 때에 수집한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식사였던 “주님의 만찬(1고린 11,20)은 당시 희랍 세계에 알려져 있었던 세 가지 관습을 나름대로 집약하였다. 먼저 그것은 같은 조합의 회원들을 한데 모으는 공동체적 식사, 말씀을 함께 나누는 자리(희랍어로 symposium이라 한다)로서의 식사, 마지막으로 재물의 나눔, 공동체적 협조 내지 모금이 그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봉사 내지 직무라는 단어는 상황에 따라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식탁에서의 봉사, 말씀에의 봉사, 그리고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에 모아진 재물을 분배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처럼 단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그 의미는 상황에 따라 발전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은 변화하지 않았다. 구원의 말씀을 확산시키는 것이 바로 그 핵심 내용이었다. 일세기 말 내지 2세기초부터 어느 유다계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이 직무들을 계승하여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였다. “여러분은 그러기에 주님께 합당하고, 부드러우며, 재물에 욕심이 없고, 진지하며 신뢰할 수 있는 주교들과 봉사자들을 선출하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 곁에서 예언자와 교사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그들은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같은 칭호로 여러분 가운데서 존경을 받기 때문입니다(디다케 15,1-2). 후대에 주교들은 사도들의 정통 후계자라 불리게 되었으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파견된다. 그리스도인 예언자들도 우리 가운데 파견된 예수의 대변인이었고 말씀의 봉사자들과 또는 초대 교회의 교사 내지 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용어로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핵심적인 역할은 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전례와 성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2) 말씀의 봉사직의 단일성과 다양성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이 전개되는 다양하고 특별한 차원을 구별해야하지 않을까? 확실히 말씀의 봉사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병원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그리스도인의 벙어리 말씀에까지 해당된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특성이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하는데는 특별하고 구별되는 직무들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런 직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영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이 말씀에 봉사하도록 서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우리 자신의 말씀이 무슨 대단한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결국 바울로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은 이 말씀을 표현하는데 특별한 순서와 차원을 구별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신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한다.“모두가 다 사도들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예언자들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다 교사들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9) 이런 유형의 질문은 야릇하게 보인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 은사들에 어느 정도는 관련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사도 2,17이하) 모두가 다 예언자라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울로는 예언자적 은사를 여자를 포함해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모든 사람(1고린 11,4-5)에게 확대시키지 않는가? 한편 바울로는 각각의 구체적인 역할을 혼동 없이 구별하였다. 모두가 다 예언자가 아니고 모두가 다 가르치지 않고 모두가 다 사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든 이가 예언하지만 모든 이가 다 예언의 직무를 받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논리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다면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영의 감응 하에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매개를 통하여 말씀 선포의 고유한 차원을 결정하신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구성된다. 서로 다른 조직은 정도차이로 평가되지 않고 정도차이를 일으키는 영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어느 주교의 사도적 말씀은 단순한 신도의 말과 다르다. 동시에 가장 소박한 사람의 말이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의 연설을 놀랍게도 능가할 수 있다. 영의 식별 은사는 지도자와 함께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주어지고 계속하여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다.

 

성령 없이는 교회의 말씀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여종으로 봉사하는 교회 안에서 특별히 영적인 말씀의 봉사자인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인의 말씀은 “모든 믿는이의 구원을 휘한 하느님의 권능”이 된다. 그 말씀은 영의 칼(에페 6,17)이다 :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 더 날카롭다(히브 4,12).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물게 하소서!”(골로 3,16)

[출처] 말씀의 봉사직(4)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5)

예수의 신성

신약성서는 나자렛 예수에게 신성의 이름을 부여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부여하는가? 오늘날 이 질문은 의외로 비쳐질 수 있다. 역사적이고 주석학적인 모든 노력은 차라리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시대에 속한 한 유다인이었고 이제 우리는 그분이 그 시대의 문화적 세계에 편입(육화)되었음을 잘 헤아려 볼 수 있다. 나자렛 예수의 역사성 곧 그의 인간성에 대한 오늘의 많은 연구 결과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그리스도 단성론(Monophysism,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단일한 본성)에 역행하고 있다. 그리스도 단성론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인간적 본성이 신성에 완전히 매몰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적 주석학에 기초하는 오늘의 경향은 가현론적인 견해를 거부한다. 가현론은 이미 일세기 말부터 헬라계 영역에 퍼져 있었으며 예수 하느님은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역사적 연구가 매우 성행하여 부활절 이전의 상황에서 이해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역사적 연구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쿰란 문헌 그리고 1945년에 발견된 토마 복음에 힘입어 가능해진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대한 보다 훌륭한 이해에 특별히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 연구들은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일세기 말엽)와 고대 유다교의 위경들 내지 랍비 유다교(2세기부터)의 옛 전승들을 재검토함으로서 성립한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도 그 분의 신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저버릴 수 없다. 물론 신성이라는 말은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 단어는 직접적으로 셈어나 성서적 언어에서 오지 않고 희랍-로마(라틴어로 divinitas, 희랍어 theiotēs)언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는 신성이라는 명사에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그렇다면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예수를 하느님으로서의 그분의 신성을 지칭하여 말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유다교, 특히 이슬람교와의 종교간의 대화에 관련된다. 또한 이 질문은 유일신 주의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산만하고 비인간적인 신 개념이 통용되는 종교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이 질문은 주석학적이고 신학적이며 사목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예수의 인간성이 그처럼 강조된 후 이제는 예수를 그분의 초월성안에서 이해하는 담론이 중요해진 것이다. 먼저 신성이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입장을 정리해야하지 않을까?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 등장하지 않으며 신약성서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될 뿐이다(로마 1,20과 골로 2,9 희랍어로 theiotes, theotes). 그렇다면 더 이상 토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인가? 비록 신약성서의 언어가 희랍세계의 맥락 안에서는 함정이 많은 이 단어를 회피하고자 하였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바울로 서간에서 신성 모티브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드문 예들을 살펴보고 이어서 도무지 타협 할 수 없는 유일신 주의에 대한 확신이 지배하던 -다행히도- 일세기 유다 세계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런 상황에서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바울로가 필립 2,10에서 노래하듯 모든 이름 위의 이름을 어떻게 그분에게 부여할 수 있는가? 바울로는 유다인 출신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말하자면 후대의 헬라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 신성 칭호를 예수께 부여한 최초의 인물이었는가? 흔히 말하듯 바울로는 오늘의 크리스트교를 만들어낸 장본인인가?

[출처] 말씀의 봉사직(5)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6)

1. 신성 칭호의 부여
신약성서에서 신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목을 열거해 보자. 1고린 8,6; 필립 2,6; 로마 9,5에 대해서는 간단히 한마디만 할 것이다. 덧붙여서 골로 1,15와 2,9에 나타나는 표현을 지적해보자. “신성의 온갖 충만함이 몸이 되어 그 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골로 2,9).” 디도 2,13에서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과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45,7을 인용하며 신성의 이름을 예수께 적용시킨다(히브1,8). 특히 요한 전승은 지고 그리스도론 즉 말씀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예수는 본시 아버지의 품안에 계셨음을 강조한다(요한 1,18; 참조 3,13.31 특히 5,20). 예수의 반대자들은 예수가 신성 모독을 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갓 사람인데도 자신을 하느님으로 내세우기 때문(요한 10,33)”이라는 것이다. 한편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말한 토마의 신앙고백은 요한 복음의 절정을 이룬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요한 복음 외에는 일세기 말에 신성을 언급하는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이며 그저 신성 모티브를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원 107년 이 전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예수께 적용시켰다(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 3,3; 6,3; 9,5). 한편 111-113년 경 小플린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하느님께 하듯 그리스도께 찬가를 바친다”(편지 10절96)고 말하였다. 결국 전례적 상황이 신성 칭호의 주요 발생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바울로 시대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필립 찬가에서(2,6-11) 신성 칭호의 표현이 확인된다. 이 찬가의 서두는 주지하다시피 번역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그 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다(희랍어로는 morphe이고 형상을 의미한다.)”내지 “그 분은 하느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이는 과거에 아담이 범한 만용의 동작을 재현하지 않았다. 이 죄인은 하느님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기로 하자. 하느님(theos)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예수께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하느님은 바울로 서간에서 탁월하게 아버지를 지칭한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자.


로마 9,5에서 읽히는 전례적 축복에 대해서도 의심 없이 동일한 관찰이 가능할 것이다. 희랍어 문장은 구두점도 없이 복잡하다.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그들에게서 났으며 영원히 축복 받으시는 하느님. 아멘”이 된다. 먼저 “그들에게서 나신 메시아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그분이 세세 대대로 찬양 받으시는 하느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 적용된 “모든 것 위에 계신” 다음에 방점을 찍어서 그 다음의 문장과 구별해야하지 않을까? 그리되면 당대의 유다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축복문 형식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세 대대로 찬양 받으소서, 아멘!” 아마도 저자는 전능하신 분이 당신의 메시아를 보내주심에 찬미를 드리고자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2고린 11,31에 유사한 축복문이 있다. “예수 그분은 세세 대대로 찬양 받으소서” 이제 로마 9,5에서 바울로는 하느님께 유다인들이 드리던 관습적인 축복문을 구체적으로 예수의 경우에 의도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로의 이 문장은 상당히 서투르기는 하지만 일종의 망설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망설임은 극복된 망설임이었다. 그러면 왜 이런 망설임이 있었을까?


여기에 답하기 전에 비록 신성의 이름이 직접 예수께 적용되지는 않았으나 보다 중요한 1고린 8,6의 예를 들어서 여기에 등장하는 신성 표현을 살펴보기로 하자. 어떤 의미로 이 본문은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형용사를 단순히 예수께 부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성을 지닌다. 바울로는 글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실 뿐이니) 곧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존재하며) 우리도 그 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의 주님(이 계실 뿐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 분을 통하여 (아버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괄호 친 부분을 제외하고 읽어보면 문장이 너무 압축되어 복잡하고 거의 수수께끼 같은 수준이다. 무엇보다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도는 전치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기원하는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인간의 여정이 도달하는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그 분은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이와 병행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두 가지 작용이 이루어지는데 이로써 예수의 (그를 통하여) 창조적이고 구원론적인 도구적 중개 기능이 강조된다. 예수 역시 알파요 오메가 즉 시작이요 마침인 것이다. 물론 바울로는 여기서도 하느님이라는 말을 예수께 직접 부여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 그는 우주의 창조와 종말에 관한 신적인 이중 기능을 직접적으로 예수께 적용함으로써 훨씬 더 나아갔다. 예수는 성서의 하느님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골로사이서에 나타나는 이와 유사한 요인도 함께 살펴보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조물의 맏이시로다. 과연 하늘과 땅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도다. ...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도다.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하는도다”(골로 1,15-17). 이번에는 예수가 창세 1,26이하가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아담을 완전히 능가하여 더욱더 만물의 기원에 연결되어있다. 예수에게 적용된 모상이라는 말은 셈어에서 신적인 현실의 복제를 뜻한다. 예수는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모상 즉 예수는 가시적으로 현현하신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골로사이서는 왜 예수를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출처] 말씀의 봉사직(6)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7)

2. 회피할 수 없는 유일신 주의
일세기의 상황을 상기해 보자. 우상숭배의 위험은 여전히 크게 남아있었다. 먼저 고대인간을 지배하던 자연의 재생 신화와 고대 농업 종교에 가까운 신들과 여신들의 유혹이 여전히 강하였다. 까삐톨라 신전의 삼신(쥬피터, 쥬논, 미네르바)과 함께 로마의 종교는 의심 없이 당시 사람들의 문제에 무관심해 보였고 순전히 외적이고 형식에 불과한 열기 없는 의식을 이따금 제공할 뿐이었다. 티베리우스 같은 황제들은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회의주의가 득세하였고 마술이나 점성술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고대 종교의식이 가져다준 이 상대적인 쇠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갈리굴라와 네로 황제를 위시하여 황제 숭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점인데 도미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칭하기까지 하였다. 인간이 이제 신을 대체하였고 갈리굴라의 모습을 담은 제우스 신상이 기원 40년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부에 세워질 뻔하였다. 그리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동양의 새로운 의식과 구원의 밀의 종교들이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에레시우스와 델피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디오니소스와 에스큘라프 및 다른 신들을 위해 의식이 집전되었다. 당시의 종교인은 가까운 신이나 자비심 많은 여신과 접촉할 수 있었다. 쥬피터 또는 제우스는 이 세상의 일과 너무 멀게만 보였다. 이리하여 희랍인은 입교 예식의 도움으로 개인적인 구원과 손에 얻을 수 있는 축복의 가능성이 자신에게 개현되고 있다고 보았다. 티아세스(thiases)나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종교 단체들은 곳곳에서 그 수효가 급증했으며 당시의 사람들에게 절실했던 구원에의 갈망에 응답할 수 있었다.


인간적인 규모의 작은 그룹 안에서 배양된 이 종교적 개인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는 일세기에 알려진 종교적인 관심이 놀랍게도 세계화되는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 민족들간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경계는 알렉산더 대왕이후 그리고 로마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너진 듯이 보인다. 네로는 브레타뉴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제국을 지배하였다. 세상이 통일됨에 따라 가치들이 교환되었고 때로 종교적 혼합주의에 이르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의 복수적 신성에 대한 믿음보다는 어느 정도 통합된 단일 신성에 대한 모호한 믿음에서 발흥된 일종의 뉴에이지 운동이었다.

 

쥬피터는 제우스와 동일시되고 비너스는 아프로티테와 동일시되었다. 플루타크와 세네카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단일하고 영적인 신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이방의 제단에 새겨진 비문에 대해 언급하였다.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그리고 그는 인간과 이 모호한 신과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희랍시인 에피메니데스와 스토아 철학자 아라토스의 말을 인용하였다(사도 17,23.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인 신의 철학적 단일성과 이스라엘의 완강한 유일신 주의와의 간격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희랍적 근대성을 부추겼던 이러한 통일적 유토피아에 거의 관계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심지어 무신적으로 비추어졌으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함으로서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보였다.

 

우상숭배는 당시에 여러 나라 곳곳에 흩어져 살던 약 600만 명의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희랍어로 쓰여진 유다인 문학작품도 기원전 167년 이스라엘을 희랍화 하고자 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시대에 만연했던 것과 유사한 위험에 대처하고자 했다(1마카 1,41-66). 당시에 매일 두 번씩 암송했던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는 끊임없이 유일신 주의의 지상명령을 상기시켜 주었다. 많은 유다- 헬라계 작품들이 시빌린의 신탁Ⅲ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0년에서 기원후 40년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우상숭배와 투쟁했다. 이러한 기획은 성공을 거두어서 상당히 많은 우상숭배자들이 유다교의 유일신 신앙에 귀의하였다. 사도 10,1-2이 말하는 고르넬리우스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우상숭배에 맞서서 가르쳐야 했고 바울로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우상으로부터 하느님께로 돌아섰는지를 계속 상기시켜 주었다(1데살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에서 우상숭배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되고 있다.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 설교가들은 이미 유다적 유일신 신앙에 귀의한 소수의 희랍인들을 주로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다른 형태의 다신론에 빠지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예수를 또 다른 신, 제 2의 하느님으로 직접으로 지칭함으로서 유다교의 유일신 주의를 파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면 이런 위험은 쉽게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당대의 이방인들은 동야의 새로운 신, 또는 神人 다시 말해 너무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느님과는 구별되는 다른 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 예수가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었다면 배타적인 종교로서의 유다교와 완전히 분리된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선민 중에서 메시아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이 매우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유일신 신앙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에 결합되어 있어야 했다.

 

그 결과 당시의 그리스도론적 노력은 예수를 희랍적인 어떤 신성과의 동일화도 거부하되 동시에 二神論(dy-theisme)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의 한분 하느님에 견주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올바로 자리 매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그 분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께 희랍적인 방식으로 신이나 신성의 단어를 적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 이 단어들은 황제들이 과거의 파라오들처럼 동전 위에 자신을 신의 아들로 쉽게 표시할 만큼 남용되고 있었다. 로마 황제들은 신의 아들로 자처했고 과거의 영웅이나 현자들 역시 그렇게 불리었다.

 

신성이라는 말은 이처럼 본래의 힘을 상실하였고 유다인의 영역에서도 예컨대 모세에게 넓은 의미의 신성의 어휘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거룩하고 신적인 모세”(출애굽기에 관한 질문 Ⅱ 54절)라고 말하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찰을 덧붙인다. “그는 인간인가 신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두 본성으로 이루어졌는가? 왜냐하면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같지 않고 압도적이며 늘 보다 더 위대해지기 때문이다”(모세의 생애 Ⅰ 27절).

[출처] 말씀의 봉사직(7)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8)


3. 어떻게 예수를 호칭할까?
당시의 이런 사상적 배경 안에서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수의 신성을 희랍 용어를 직접 사용하여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었을까? 사실 그 분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늘 능가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늘 다른 분이신데 어떻게 그분을 적절히 지칭할 수 있는가? 결국 이런 것이 초대 신앙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소묘였다. 그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이 형언하기 어려운 분을 보다 적절하게 지칭할 수 있는 말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던 것이다. 즉 거의 모든 가능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성공을 거둔 사례도 다양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수의 첫 번째 칭호중의 하나는 황차 논법(a fortiori)을 통하여 논증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비교는 매번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언제나 할 말이 더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비교하는 인물 그 이상의 분이시다. 그 분은 요나보다 위대하시고 솔로몬보다 위대하시다(마태 12,41-42).

 

그 분은 성전보다 위대하시다(마태 12,6). 말하자면 그분은 하느님이 머무르시고 탁월하게 종교적 중개가 이루어지는 장소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 분은 다윗보다 높으시다(마르 12,35). 그분은 모세를 능가하고(마태 17,3에서 모세는 두 번째로 나온다) 천사들보다 나으신 분이시다(히브 1,4이하). 이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이름(필립 2,9)을 가지신 예수의 신원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소위 부정 신학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출애굽기의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계시된 형언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이름 모티브가 여러 가지 이름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정의하기 어려운 예수의 경우에 다시금 드러난 것이다. 어떤 이름도 완전하지 못하다. 하느님의 아들 칭호조차 일세기에는 그 의미가 모호하여서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서, 다윗과 메시아에게 다양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능가되거나 극복되어야 했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8)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9)

4. 예수와 신적인 대리자들
오늘의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또 다른 방법이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져 있었는데 그들은 신중하게 이 방법을 차용하였다. 예수의 신비에 접근하기 위하여 고대 유다교에서 회자되었던 천사적인 존재나 넓은 의미로 신성을 지닌 인물들을 활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니까 그들은 지혜, 말씀, 또는 영으로서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와 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설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묵시주의의 인물로서 인자와 같은 놀라운 존재도 있었다. 일세기의 유다교는 근본적으로 유일신 주의였다. 그러나 이미 성서에 등장하였던 이 인물들은 주로 신적인 세계에 속하였고 그 중요성은 당시에 이스라엘과 알렉산드리아 유다인들의 배경과 운동에 따라 그리고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등 여러 소 종파들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었다.


여기서는 간단히 이 인물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1) 일세기 묵시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예언자 영역에서 다니엘서와 에녹의 비유가 말하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살펴보자. 그는 “태고 적부터 계신”하느님(다니 7,13-14)과 연계되어 거의 천사적이고 초월적인 인물이다. 2) 그리고 지혜문학에 등장하는 지혜부인의 존재는 에집트에서 기원하여 이스라엘의 율사들과 현자들 사이에서 널리 영향을 미쳤다. 3) 하느님의 말씀(희랍어로 logos)존재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계 희랍인들에게서 비롯하여 이스라엘에도 확산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아람어(memra)도 랍비 시대에 중요해졌다. 4) 하느님의 계시라는 의미의 토라는 팔레스타인의 현자나 랍비들에 의하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토라는 지혜와 말씀과 같이 신적인 대리자로 인지되었다. 5) 하느님의 영은 예언자적 행위와 주로 연계되었다. 6) 직접적으로 천사적인 존재들은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았고 특히 멜키세덱은 쿰란 문헌에서 천사와 동일시되었다.


방금 언급한 인물들 내지 인격적인 존재들에게 대해서 개별적으로 할 이야기들은 물론 많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하나의 주요한 질문이 다양한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부의 초대 신자들에게서 특별히 제기되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엄격한 유일신 주의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던 이 신적인 인물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예수께 적용될 수 있었겠는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초대 교회는 결코 마지막 말을 찾을 수 없었던 예수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그분에 대해 새로운 여러 방식으로 말하고자 모든 가능성을 시도하였다. 이런 경우에 중요한 것은 다니엘의 인자, 지혜, 말씀, 영, 천사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물들과 예수와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기에 고대 유다교의 이들 신적인 대리자들과 예수께서 어떻게 구별되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일부에서는 이 초월적인 존재를 활용하여 예수께 적용시켰으나 다른 편에서는 이를 거의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로는 인자에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말씀은 요한 전승에 고유한 요소이나 신약성서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영역별로 그리스도론적 강조점이 얼마나 달랐는지 살펴보자. 바울로 영역에서는 아들과 주님의 그리스도론이 강조되었다. 마르꼬의 (로마?)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강조하되 주님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 영역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강조되고 요한 1서가 저술되던 시기인 후대에는 말씀이 주로 언급되었다. 베드로의 영역은 예수의 다윗 메시아 성을 특히 부각시켰으나 그렇다고 아들관계의 동기를 배제하지 않았다(마태오에 의하면). 이처럼 그리스도론적 강조점의 차이는 초대 그리스도인 전승 안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각자는 고유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예수를 신적인 지혜나 하느님의 말씀, 또는 영과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예수께 적용된 이 다양한 언어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모든 유상 숭배적 혼합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움직임을 토대로 과연 어떻게 예수에 대한 진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유일신 주의를 망가뜨리거나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까? 초대 신자들은 이 두 가지 축을 단호하게 견지하였다. 즉 하나는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보장하는 유일신 주의가 그것이요 또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눈부심 속에 이루어지는 신성의 선포가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좀더 설명해 보자.


천사와의 비교부터 시작하자. 일세기에 천사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다. 예컨대 바리사이파와 나아가 쿰란같이 신비주의적이고 묵시주의적인 영역에서 그러했다. 천사 의식에 관한 일부 단편들이 사해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이들 “으뜸가는 왕자들”의 역할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들은 여전히 미래에로 개방된 계시분야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느님은 이 엘로힘 즉 “신들 내지 하느님의 아들들”(시편 29,1)을 통하여 오늘에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천사적인 존재들 중에서 쿰란의 문헌은 특히 멜키세덱을 언급한다. 그는 엘로힘의 반열에 들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라고 불리는 다른 천사들마저 심판하는 권한을 지닌다. 초인간적인 메시아니즘의 범주 안에서 천사적 존재를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나아가 신비주의적이고 묵시적인 이들 유다인 영역에서 천사론이 마침내 유다적 유일신 주의를 거의 의문에 부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울로와 히브리서 저자의 반응이다. 바울로는 모든 천사적인 권능들(로마 8,38)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천사숭배를 선호하지 않았다. 예수의 이름에 하늘과 땅과 지하에 있는 모든 존재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만큼(필립 2,10) 예수는 천사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지배와 일체의 권력과 일체의 권세(천사적, 제국주의적, 우주적 권세)를 쳐 없애고 나서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1고린 15,24).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바울로는 게다가 인자표현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자가 어쩌면 천사들이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다니 7,14.22; 참조. 마르 8,32: 인자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묵시 14-16)과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얼마나 천사들을 능가하는지 매우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아론의 인간적인 사제직과는 무관하고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멜키세덱의 면모와 예수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를 부각시킨다(히브 8,11-28).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신약성서의 다른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유다교에 회자되던 초월적인 다른 인물들 즉 지혜(히랍어로 sophia) 말씀(logos) 그리고 영(pneuma)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요약하자. 여기서도 이들 탁월한 존재들은 쇠퇴해 갔고 결국 모든 인물 위에 위치하시는 예수의 면모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개별적인 존재가 성서와 고대 유다교 문헌 즉 위경과 따르굼에 나타나는 궤적을 쫓기란 불가능하다. 단지 지혜는 무엇보다 지혜문학에서 과잉사용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지혜는 하늘 높은 곳에서(집회 24,4) 하느님의 옥좌(집회 9,4)에 함께 있다. 시초부터 지혜는 존재하였는데 주님께서는 지혜를 통하여 땅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잠언 3,19).

 

 마찬가지로 말씀 모티브도 필로에게서 예외적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인격화를 넘어서서 거의 신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예수는 신적인 지혜와 동일시될만하다. 그러나 지혜와의 동일시에도 결함이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지혜를 돌출하여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바울로는 예수를 지칭하는데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동시에 그분과 이세상의 모든 지혜와의 측량할 길 없는 간격을 논증하였다. 바울로는 예수를 지혜와 동일시하였으나 소위 지혜롭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이 새로운 지혜를 반립시켰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셨습니다(1고린 1,24.30; 참조.

 골로 2,3; 묵시 5,12).

 

그러나 이 몇 가지 언급을 제외하고는 놀랍게도 지혜의 면모를 매우 적게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지혜는 모호하여서 예수의 신비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었기나 하듯이 말이다. 더욱이 사도 바울로가 보기에 예수와 그분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인격화된 지혜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의 구원행위의 도구라는 측면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철학이 아니다.


예수와 로고스, 하느님의 말씀과의 동일시가 고대 유다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더욱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씀과 현실은 일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유명론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말씀은 그 분이 스스로 사용하시는 단순한 도구 그 이상의 것이다. 한편 요한 전승은 그 최종적인 단계에서 로고스를 예수께 적용시켰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이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이어서 근본적인 선언에 이르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한 1,14; 묵시 19,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승은 다른 그리스도인 전승 가운데서 직접적인 반향을 갖지 못하였다. 그것은 요한 전승이 너무 특별해서 꿈란이나 알렉산드리아와 어느 정도 유사하게 신비주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테두리에 속한 때문이었을까?

 

또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 동기에 대해서 주저했기 때문이었을까? 말씀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것은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같은 방식으로 극단화된다면 그 결과는 후대에 일컬어지듯 일종의 양태론에 떨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의 단순한 현현이 되고 결국 하느님의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아버지 앞에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유지하였다. 그 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또 다른 표현 그 이상이신 것이다.

 


다른 초월적인 존재들은 제쳐두고 단지 영에 대해 언급해보자. 영은 (하느님의 기획의 능동적인 역동성)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 사이에 가장 훌륭한 구분을 위해 필요한 자리로서 즉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을 인격적으로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바울로의 일부 형식은 이점에서 상당히 유동적이다. 영은 예수 부활 운동 안에서 예수 자신으로 나타난다(로마 8,9.11). 영은 2고린 3,17에서 예수와 동일시된다(주님은 영이십니다).

 

두 인물의 이러한 혼동은 거의 필연적이라 할 만한데 영이 예수와 일체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은 예수와 구별되었다. 갈라 4,6의 경우처럼 바울로의 표현 양식에서 삼위적 정식이 곧 나타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곧 아버지! 라고 외칩니다”(갈라 4,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2고린 13,13). 삼신론적이 아닌 이 삼위적 칭호들은 매우 일찍 등장하였다. 이 칭호들은 제 2성전이 파괴된 이후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에페 4,4-6, 유다 20-21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마태 28,19에서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세례를 베풀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9) |작성자 아녜스

 

말씀의 봉사직(10)

5. 성서를 매개로 예수를 지칭하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느님의 계시 자체였던 성서에서 출발하여 예수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노력하였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아드님이 누구 신지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독서법과 미드라쉬(미드라쉬는 탐구를 뜻한다)적인 재 독서법이 실행되고 토라와 예언서의 가장 빛나는 부분들을 그리스도화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성서를 완성시키셨다. 그 분은 성서의 완전한 해석이요, 그 마지막 실현이며 참된 따르굼이신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그 이상이기도 하다.

 

바울로 이전에 이미 초대 신자들은 하느님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신원에 완전히 부합하는 분으로서 예수의 신원의 신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성서의 계시에 입력된 하느님의 이름은 이제 예수의 이름 안에 그분 이름의 따르굼, 해석 또는 그 주해 내지 그 대용어를 발견하였다. 특히 로마 10,12-13에서 요엘 2,32의 키리오스(주님)를 예수께 적용할 뿐 아니라 바울로는 “모든 이(모든 존재)의 주님”이라는 표현도 감히 사용한다. 후자의 建辭는 당시의 유다교에서 장엄하게 하느님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더욱이 1데살 5,1이 말하는 “주님의 날”은 아모 5,18을 인용한 것인데 이제는 예수께 적용되었다(참조 1고린 1,8).

 

 


한편 사태는 더욱 발전하였다. 결국 바울로와 그가 의존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 전승은 시나이 하느님의 방식으로 기능을 수행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기에 이르렀다. 유다인의 언어로는 그리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언어로는 이보다 더 강하게 예수의 신비를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당시에 퇴색되었던 단순한 신성의 단어를 예수께 적용시키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시나이는 탁월한 의미에서 여전히 종교적인 자리로 남아 있었고 하느님과 모세 그리고 그의 백성간에 중개적인 만남의 자리였다. 새로운 시나이가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신자들을 엮어주었다. 시나이 동기는 변모 이야기(마르 9,1-9)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전승에서 취한 이 새로운 시나이를 암시하는 바울로 서간의 여러 대목이 (1데살 4,13-17; 2고린 3 그리고 로마 10,6-7) 보여주듯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사고 중심에 위치하였다. 분명히 이 소재들은 현실과 현실을 넘어서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셈족 특유의 이미지와 상징들로 빚어진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언어로 묘사되었다.


이제 이방적인 변모 이야기에 대해 잠시 성찰해보자. 이 이야기는 희랍인의 귀(즉 셈족이 아닌 서구인에게는)에는 차라리 이해하기 어려운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언어로 채색되어 있다. 마르꼬 복음의 설화 구조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하며 마태오와 루가 그리고 2베드 1,17-18에 그 병행 구절이 있다. 비록 요한복음이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는 않아도 어쩌면 복음전체가 그 영향 속에 있다고 하겠다. 마르꼬가 반향하고 있는 것처럼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예수의 신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그 요점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중심에 위치한 변모 이야기의 문학적 상황을 살펴보자.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르꼬 복음에는 부활이야기가 없다. 확실히 이 복음은 하느님과 그의 천사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마르 16,8(16,9-20은 2세기의 첨가문이다)에서 급작스레 단절되고 만다. 결국 예수의 신비의 계신 마르꼬 복음의 종결부분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 중심부에서 이루어진다. 소위 시나이와 관련된 예수의 종말론적인 신원은 이 교리교수의 중심부에서 밝혀진다. 모세처럼 아니 모세 그 이상으로 예수는 얼굴이 변모되고 변형되었다(변모와 변형은 희랍어에서 같은 단어이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의 구름에 싸여 영광의 세계에 속해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부활 사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바울로는 십자가와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에만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1고린 9,1; 15,7이하; 갈라 1,15이하). 그러나 마르꼬는 어떤 의미로 부활의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서 전체가 부활이야기이고 그 정점은 변모 이야기에 위치한다. 그렇다고 부활이야기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영광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액센트가 다른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성찰에 따르면 예수의 본질적인 신원은 변모이야기 속에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넘어서서 이미 집약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형언하기 어려운 예수께 대해 제자들이 가졌던 첫 번째 체험이었다. 이 신비 체험은 부활사건 이전에 이미 발생하였으나 그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고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활사건이 필연적이었다.

 


이 중요한 이야기의 몇 가지 구성요소만을 지적해 보자.
사건은 모세가 시나이에 등정할 때처럼(출 24,16) 6일 후에 발생하는데 이는 세상을 재건해야하는 안식일(제 칠일)의 이미지 (아담과 이브의 생애 51,2)에 걸 맞는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세 제자들은 시나이 등정에서 모세를 수행한 세 사람(출 24,1)처럼 거룩한 산(1베드 1,18)에 예수와 함께 있다. 산의 이름은 시나이의 차원을 능가하는 만큼 마르꼬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변모 내지 변형되었을 때 그 분은 글자 그대로 형태가 변하였는데 유다 묵시주의에서 빌어온 종말론적인 언어의 중요성을 여기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참조 2바룩 51,10; 1고린 15,53; 필립 2,6).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 적용된 이 변형의 언어는 구원의 시간의 전개과정에 대한 유다적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가장 대중적인 유다적 사고에 의하면 이러한 영광스러운 변형은 죽은 자들의 부활 다음에 와야하고 이 부활은 시간의 종말 그 다음에 와야한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 모든 것이 거꾸로 흘러간다. 그 분의 종말론적인 변형은 그분의 부활 이전에 이미 거기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부활은 죽은 자들의 일반적인 부활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시간 이전에 위치하였다. 시간들은 이처럼 출렁이고 미래가 이미 거기에 도래한 것이다.


계속해서 변모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분의 옷은 새하얗게 번쩍였다.” 이는 시나이의 사람들(출애 19,10)처럼 선택된 자들의 옷이 하얗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나이의 체험을 한 두 예언자들(출 19,24; 1열왕 19,9-13)이 예수 주변에 모여 새로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거기에 있었다. 출 12,42에 관한 팔레스타인 따르굼에는 ‘네 밤의 노래’가 있는데 따르굼의 이 중요한 대목으로부터 변모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이 오래된 유다교의 시는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계약을 맺는 구원의 밤들을 기념한다. 창조 때, 아브라함 시절에, 에집트를 탈출할 때 그리고 마지막 때의 밤들이 그것이다. 마지막 밤을 노래하는 시를 소개해보자. “네 번째 밤이 오면 세상은 속량 될 것이다. 철의 멍에들은 부러지고 사악한 세대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가 무리의 선두에서 앞서가고 다른 하나도 무리의 선두에서 앞서 갈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두 인물 사이에서 앞서 가고 그들은 함께 전진할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밤이다.”


회당에서 읽혀지던 이 전례적인 시는 놀랍게도 말씀에 관한 시나이 동기를 강조하는데 초대 신자들은 이 동기를 당연히 예수께 적용시켰던 것이다.
계속해서 읽어보면 변모때 하느님의 음성이 제자들에게 들렸다. “그의 말을 들어라.”이는 신명 18,15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제자들은 세 개의 장막을 세워서 예수를 이 영광스러운 장소에 머물게 하려했다. 이 장막들은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장막과 장막절 때 (수콧)회상하던 광야의 장막들을 상징한다. 그들의 체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즉 거룩한 것 앞에서의 언어 상실(참조 마르 16,8)이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느님 현존의 구름이 지나가고 그분 주권의 말씀이 사랑하는 아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새로운 시나이의 모습이었고 그 의미는 단지 부활 체험이후에나 밝혀지게 될 것이다. 새로운 말씀의 근본적인 체험이 이미지로 가득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예수의 공생활이 한창이던 중에 새로운 시나이의 한복판에서 그 분의 본질적인 신원이 선언된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은 명백했다. 모세와 엘리야보다 크신 하느님의 아들이 거기에 계신 것이다. 예수는 단지 하나의 새로운 모세가 아니다. 그분은 신명 18,15에 따라 기다려왔던 예언자처럼 또 다른 예언자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이 마치 시나이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듯이 그 분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야하는 분이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는 하늘의 소래가 의미하듯 그 분은 아버지의 탁월한 계시인 것이다.


이제 어떻게 결론할 수 있을까?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필립 3,8)안에서 어떻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 연구는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들에 따라 다양한 그리스도론들에 대한 연구는 초대 신자들이 자신들의 주님의 신원을 표현하는데 항구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마치 언어의 경매장에서 계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팽창되는 언어적 과잉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특정교회 내부에서 어느 시기에 생산된 표현이 예수의 신비를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제 2의 신성이라는 그리스도론적 우상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엄격한 유일신 주의에 머물러 있어야했다. 아들관계의 언어가 선호되었고 이로써 예수께서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 압바로 지칭했던 그 분과의 형언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자 했다.


초대 교회의 중심에서 예수의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메시아, 스승, 종, 다윗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인자 등등)은 서로가 충돌하기도 하고, 또는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기도 하고, 또는 서로를 교정하기도 하면서 언제나 보다 완전한 이름을 열정적으로 찾아 나섰다. 결국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론들 “모든 이름 위의 이 이름을”찾아 나서게 마련이고 이 이름이 우리의 고유한 문화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경우 한국 문화의 상황에서 적절한 말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한가지 이름에 결코 머물러 있어서 안되는 까닭은 그 어떤 것도 한계가 있어 극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성서의 정경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교향악을 존중 해야하고 나름대로 자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다양한 전승들의 합창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과거의 표현들을 단지 오늘의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복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워져야 하는 언어의 역동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질문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러면 여러분은 내가 누구하고 말합니까?”(마르 8,29)


예수께 적용된 신약성서의 많은 칭호들 중에서 어떤 것은 중요하게 사용되고 또 어떤 것은 (거룩한 이, 의인, 목자, 예언자)은 거의 강조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들관계(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아들)를 나타내는 이름들은 특별히 중요시되었다. 그분의 신원이 아들 관계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타자와의 관계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 신원이 드러난다. 이 관계가 그의 인격을 규정하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 앞에 서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표현하는데 모자라는 다른 칭호들은 차라리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아들 내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탁월한 칭호를 예수가 하느님께 종속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종속주의는 예수의 신원을 규정하는 관계적인 개념을 희랍의 언어로 그릇되게 번역한 것이다. 1고린 15,24.28(아들도 역시 모든 것을 굴복시킨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의 요소들과 마르 13,32(아들도 모른다)의 요소들은 아들관계를 해석해 주되 예수의 신적 본성이나 본질에 관한 희랍적 본질주의의 토론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종속주의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를 또 다른 신적인 단일체 즉 두 번째 신앙으로 예수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거부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근본적으로 유일신 주의자들이었으나 “나는 있는 그로다”(출 3,13)라고 선언하신 이스라엘의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의 아드님을 말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 아드님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셨던 것이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10)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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