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봉사직
저자: Charles Perrot
신약성서가 말하는 말씀의 봉사직
먼저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누가 우리를 해방하고 구원하는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답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모세 율법의 준수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던 옛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제 구원은 주 그리스도의 인격 즉 그분의 해방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의 말씀이 구원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중풍병자에게 “네 죄는 용서를 받았다”(마르 2,5)고 선언하시자 그가 구원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치유 동작은 하느님 나라가 그분의 인격을 통해 이미 현재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그러기에 그분의 치유동작은 구원의 말씀과 하나를 이룬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점에서 세례나 성체성사와 같은 성사적인 동작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씀은 동작과 결합된 말씀 즉 행위와 함께 하는 말씀이며 말과 동작이 일체를 이루는 효과를 가진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베풉니다”내지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말과 행위를 반립시키거나 적어도 이둘 사이의 간격을 강조한다. 그 결과 말씀은 동작과 분리된다. 예컨대 복음 선포와 성사를 대립시키고, 말씀의 식탁과 빵의 식탁을 인위적으로 반립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서는 말과 사물을 이렇게 갈라놓지 않는다. 히브리어로 다바르는 말씀과 현실, 즉 말씀과 사건을 동시에 가리킨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말씀은 현실화되고 중요한 행동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리스적 사유에서 말씀은 개념의 숲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말씀이라는 단어를 가장 포괄적인 성서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에 놀라워하시지 말 것이다. 우리는 이 한 단어로서 오늘날 ‘말씀과 성사들’이라고 부르는 내용을 지칭하고자 한다. 요컨대 말씀이라는 단어는 요한 복음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데서 가장 심오하게 나타난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요한 1,1.14).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신약성서 안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아모스에서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을 거쳐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중심에 서있다.
신약성서에 이르러서도 말씀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위 하신 것을 전하기 위해 복음 말씀에 관심을 집중한다. 또 그 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오늘에도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골고타의 십자가는 어제도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대한 침묵의 말씀이다. 복음서에 이어 사도 서간들(바울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예수의 말씀이 언제나 새롭게 메아리칠 수 있도록 새로운 말씀으로 표현한다. 하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이 과정은 오늘에도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책으로서의 성서가 아니라 여기서 분출하는 말씀이요 그것은 과거의 말씀이면서도 늘 새로운 말씀이다. 그리고 이 구원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말씀의 봉사를 통해 전달되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구원의 말씀과 말씀의 봉사는 복음서의 중심에 서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기쁜 소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신앙인이 각자의 처지에서 넓은 의미로 말씀의 봉사를 수행해야하는 필연성이 제기된다.
봉사자(ministre)는 라틴어에서 minister 그리고 그리스어의 diakonos에서 비롯하였다. 디아코노스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부제라는 현재의 의미 외에도 봉사자를 지칭한다. 이 단어는 집주인의 시중을 드는 종(그리스어로 doulos), 하인 내지 노예라는 말과 다르다.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구원의 말씀에 봉사하고 이를 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점에서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이고 봉사자이며 통교자이다. 이는 마치 인터넷의 서버가 통신을 매개해주는 것과 같다. 그는 단지 주인 앞에서 최대한 봉사하는 굴종적인 종이 아니다. 그는 말씀을 간직하고 전해야 하는 봉사의 직무를 지닌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빵의 기적 때에(마태 9,35; 15,36) 생명의 빵을 전했던 것이다.
이제 이 말씀의 힘과 중요성이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어서 바울로가 설립한 고린토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봉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이 구원의 말씀의 전달자들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들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유다인들)의 영역에서 사도 (예수께서 파견하신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그리스도인 예언자(예수의 대변인이라는 의미에서)가 이 새로운 말씀의 담지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이방인으로서 유다적 유일신 신앙에 귀의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단어가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그것은 말씀의 봉사와 빵의 봉사를 책임지는 봉사자(dialonos, 동사 dialonein)라는 말이다.
한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가 살펴보는 시대는 70년 예루살렘 멸망이전의 초대 교회의 매우 이른 시기라는 점이다. 이 시대에 주교, 사제, 부제 등의 단어는 아직 널리 통용되지 않았다. 예외(필립 1,1)가 없진 않지만 이런 어휘들은 70년 이후 특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시대(약 95년경)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들은 일찍이 초대 공동체의 사도와 그리스도인 예언자, 교사들이 맡아했던 말씀의 봉사직을 다른 모든 신자들과 함께 수행하였다. 구원의 말씀의 초기 증인이었던 이들에 대해 시선을 모아보자.
[출처] 신약성서가 말하는- 말씀의 봉사직1|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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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의 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주님은 결정적이고 단호한 방식으로 당신의 말씀을 땅위에서 실현시킬 것이다”(이사 10,22 로마 9,28에서 재인용). 하느님의 말씀은 이처럼 효과적이시다.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오늘에도 계속 말씀하신다. 이 말씀(아람어로 Memrah)의 역할은 아람어로 번역된 창세기의 첫 부분에 잘 드러난다. 히브리어 성서는 단지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뿐이다. 그러나 회당에서 봉독되었던 아람어 창세기(따르굼 네오피티 창세 1,1)는 “태초에 하느님의 말씀이 지혜와 함께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대 유다교의 중심부에서도 말씀의 중요성의 강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의 주님을 이 최초의 말씀과 쉽게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는 이 복음이 부활하신 분의 십자가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그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다(1고린 1,23). 그것은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뼈아픈 말을 던진다.” 사실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할 자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그러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그러기에 바울로가 비록 당대의 현인과 설교가들의 수사학적인 기교도 없이 연약하고 겁이 많고 두려움에 떤다고 고백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이 모든 것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에게 더 이상 속해있지 않다. 그 말씀은 성령과 하느님 능력을 증거한다(1고린 2,3-5.13). 사도는 2고린에서 말씀의 봉사자들이 (그리스도인 전체를 대상으로 넓은 의미로) 하느님의 능력(2고린 6,7)이신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해 받았을 적에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믿는 여러분 안에서 효력을 내고 있습니다“(1데살 2,13).
[출처] 말씀의 봉사직(2)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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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린토 교회에서의 말씀의 기능
주로 그리스인(희랍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고린토 교회는 어느 정도 도시의 이미지에 따라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노예들과 가난한 거류 이방인들 그리고 해방된 노예들과 새로 등록된 시민들이 소수의 상류층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였다. 예컨대 가이우스의 집은 로마서를 집필할 때 바울로를 맞아들였다. 그리스도인들 모임에 질서가 있기를 바랐던 바울로가 보기에 고린토의 이 젊은 공동체에는 동요가 적지 않았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14,40)”. 한편 말씀은 고린토에서 제대로 작용하지 못했다. 일부 방언(공동체 기도에서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 예언자(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인이라는 의미로)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차단시키기에 이르렀다.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구원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이를테면 각자의 역할을 구별하고 그 봉사 직능을 구체화함으로서 질서를 회복시켰다.
신학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말 할 뿐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계시나 기도의 말씀은 다르다. 그 말씀은 진실되기 위하여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표현되어야하며 따라서 영의 감도를 받아야한다. 나는 예수의 말씀을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 말씀은 나에게 주어져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며 진실되게 전달되어야 한다. 나는 그러기에 그분의 대변인 즉 예언자일 뿐이다. 게다가 나의 기도는 성령이 뒷받침해주실 때에만 타당하다. 바울로 사도가 선언하듯이 “하느님(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곧-아버지! 라고 외칩니다.” 부활하시어 언제나 살아 계신 예수만이 아버지께 참되게 기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의 입과 마음을 성령께 내어 맡김으로써만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성령은 기도가 가능할 수 있는 출발점이요 원리이다.
한편 그리스도인 예언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을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이번에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취하여 그것을 이제는 예수를 지칭하는 말씀으로 변용시킨다. 그는 성서를 그리스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와 그리스도인 예언자는 예수의 말씀을 취하여 그것을 어제의 말씀으로 반복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선언하는 말씀으로 전해준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면 이는 특히 주님의 식사 (1고린11,20)즉 미사 때에 이루어진다. 후대에 약 70년경에 이 말씀들은 먼저 마르꼬 복음 안에 집성되었고 그리고 로마, 안티오키아, 그 밖의 다른 그리스도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하여 적용되었다. 이처럼 부활하신 분이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주신다.
한편으로 일부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은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하여 주님의 지고한 말씀과 자신의 담론을 뒤섞기에 이르렀다. 또 다른 한편에서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무질서하게 변해버린 방언에 반대하는 사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기에 그대가 영으로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면 초심자들의 자리에 있는 이는 그대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으니 그대의 감사기도에 이어 어떻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1고린 14,16)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만일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면 초심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의 감사기도에 아멘이라고 응답하겠는가? 물론 영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방언기도는 참된 것이나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통교가 부재한다. 결국 단어가 없이 이루어지는 거의 음악 같은 기도와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 이해 가능한 기도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동의한다는 의미로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반 신자들과 축복의 기도 내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구별되었다는 점이다. 감사 내지 축복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식사에서 결정적으로 주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미 바울로 시대에 전례의 역할 분담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3)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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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씀의 봉사직
모두다 교사들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9) 이런 유형의 질문은 야릇하게 보인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 은사들에 어느 정도는 관련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사도 2,17이하) 모두가 다 예언자라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울로는 예언자적 은사를 여자를 포함해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모든 사람(1고린 11,4-5)에게 확대시키지 않는가? 한편 바울로는 각각의 구체적인 역할을 혼동 없이 구별하였다. 모두가 다 예언자가 아니고 모두가 다 가르치지 않고 모두가 다 사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든 이가 예언하지만 모든 이가 다 예언의 직무를 받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논리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다면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영의 감응 하에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매개를 통하여 말씀 선포의 고유한 차원을 결정하신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구성된다. 서로 다른 조직은 정도차이로 평가되지 않고 정도차이를 일으키는 영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어느 주교의 사도적 말씀은 단순한 신도의 말과 다르다. 동시에 가장 소박한 사람의 말이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의 연설을 놀랍게도 능가할 수 있다. 영의 식별 은사는 지도자와 함께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주어지고 계속하여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다.
성령 없이는 교회의 말씀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 분은 당신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스도인 봉사자는 여종으로 봉사하는 교회 안에서 특별히 영적인 말씀의 봉사자인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인의 말씀은 “모든 믿는이의 구원을 휘한 하느님의 권능”이 된다. 그 말씀은 영의 칼(에페 6,17)이다 :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 더 날카롭다(히브 4,12).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물게 하소서!”(골로 3,16) [출처] 말씀의 봉사직(4)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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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신성
그러나 역사적 주석학에 기초하는 오늘의 경향은 가현론적인 견해를 거부한다. 가현론은 이미 일세기 말부터 헬라계 영역에 퍼져 있었으며 예수 하느님은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역사적 연구가 매우 성행하여 부활절 이전의 상황에서 이해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역사적 연구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쿰란 문헌 그리고 1945년에 발견된 토마 복음에 힘입어 가능해진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대한 보다 훌륭한 이해에 특별히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 연구들은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일세기 말엽)와 고대 유다교의 위경들 내지 랍비 유다교(2세기부터)의 옛 전승들을 재검토함으로서 성립한다. 그러나 나자렛에서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도 그 분의 신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저버릴 수 없다. 물론 신성이라는 말은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 단어는 직접적으로 셈어나 성서적 언어에서 오지 않고 희랍-로마(라틴어로 divinitas, 희랍어 theiotēs)언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는 신성이라는 명사에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그렇다면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예수를 하느님으로서의 그분의 신성을 지칭하여 말할 수 있었을까?
[출처] 말씀의 봉사직(5)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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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 칭호의 부여
그러나 어떤 의미로 그는 우주의 창조와 종말에 관한 신적인 이중 기능을 직접적으로 예수께 적용함으로써 훨씬 더 나아갔다. 예수는 성서의 하느님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골로사이서에 나타나는 이와 유사한 요인도 함께 살펴보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조물의 맏이시로다. 과연 하늘과 땅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도다. ...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도다.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하는도다”(골로 1,15-17). 이번에는 예수가 창세 1,26이하가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아담을 완전히 능가하여 더욱더 만물의 기원에 연결되어있다. 예수에게 적용된 모상이라는 말은 셈어에서 신적인 현실의 복제를 뜻한다. 예수는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모상 즉 예수는 가시적으로 현현하신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골로사이서는 왜 예수를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출처] 말씀의 봉사직(6)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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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피할 수 없는 유일신 주의
쥬피터는 제우스와 동일시되고 비너스는 아프로티테와 동일시되었다. 플루타크와 세네카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단일하고 영적인 신성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이방의 제단에 새겨진 비문에 대해 언급하였다.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그리고 그는 인간과 이 모호한 신과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희랍시인 에피메니데스와 스토아 철학자 아라토스의 말을 인용하였다(사도 17,23.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인 신의 철학적 단일성과 이스라엘의 완강한 유일신 주의와의 간격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희랍적 근대성을 부추겼던 이러한 통일적 유토피아에 거의 관계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심지어 무신적으로 비추어졌으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함으로서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보였다.
우상숭배는 당시에 여러 나라 곳곳에 흩어져 살던 약 600만 명의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희랍어로 쓰여진 유다인 문학작품도 기원전 167년 이스라엘을 희랍화 하고자 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시대에 만연했던 것과 유사한 위험에 대처하고자 했다(1마카 1,41-66). 당시에 매일 두 번씩 암송했던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는 끊임없이 유일신 주의의 지상명령을 상기시켜 주었다. 많은 유다- 헬라계 작품들이 시빌린의 신탁Ⅲ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0년에서 기원후 40년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우상숭배와 투쟁했다. 이러한 기획은 성공을 거두어서 상당히 많은 우상숭배자들이 유다교의 유일신 신앙에 귀의하였다. 사도 10,1-2이 말하는 고르넬리우스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확실히 당대의 이방인들은 동야의 새로운 신, 또는 神人 다시 말해 너무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느님과는 구별되는 다른 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 예수가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었다면 배타적인 종교로서의 유다교와 완전히 분리된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선민 중에서 메시아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이 매우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유일신 신앙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에 결합되어 있어야 했다.
그 결과 당시의 그리스도론적 노력은 예수를 희랍적인 어떤 신성과의 동일화도 거부하되 동시에 二神論(dy-theisme)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의 한분 하느님에 견주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올바로 자리 매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그 분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께 희랍적인 방식으로 신이나 신성의 단어를 적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 이 단어들은 황제들이 과거의 파라오들처럼 동전 위에 자신을 신의 아들로 쉽게 표시할 만큼 남용되고 있었다. 로마 황제들은 신의 아들로 자처했고 과거의 영웅이나 현자들 역시 그렇게 불리었다.
신성이라는 말은 이처럼 본래의 힘을 상실하였고 유다인의 영역에서도 예컨대 모세에게 넓은 의미의 신성의 어휘를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거룩하고 신적인 모세”(출애굽기에 관한 질문 Ⅱ 54절)라고 말하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찰을 덧붙인다. “그는 인간인가 신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두 본성으로 이루어졌는가? 왜냐하면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같지 않고 압도적이며 늘 보다 더 위대해지기 때문이다”(모세의 생애 Ⅰ 27절). [출처] 말씀의 봉사직(7)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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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성전보다 위대하시다(마태 12,6). 말하자면 그분은 하느님이 머무르시고 탁월하게 종교적 중개가 이루어지는 장소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 분은 다윗보다 높으시다(마르 12,35). 그분은 모세를 능가하고(마태 17,3에서 모세는 두 번째로 나온다) 천사들보다 나으신 분이시다(히브 1,4이하). 이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이름(필립 2,9)을 가지신 예수의 신원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소위 부정 신학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출애굽기의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계시된 형언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이름 모티브가 여러 가지 이름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정의하기 어려운 예수의 경우에 다시금 드러난 것이다. 어떤 이름도 완전하지 못하다. 하느님의 아들 칭호조차 일세기에는 그 의미가 모호하여서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서, 다윗과 메시아에게 다양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능가되거나 극복되어야 했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8)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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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와 신적인 대리자들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얼마나 천사들을 능가하는지 매우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아론의 인간적인 사제직과는 무관하고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멜키세덱의 면모와 예수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를 부각시킨다(히브 8,11-28).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신약성서의 다른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말씀 모티브도 필로에게서 예외적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인격화를 넘어서서 거의 신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확실히 예수는 신적인 지혜와 동일시될만하다. 그러나 지혜와의 동일시에도 결함이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지혜를 돌출하여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바울로는 예수를 지칭하는데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동시에 그분과 이세상의 모든 지혜와의 측량할 길 없는 간격을 논증하였다. 바울로는 예수를 지혜와 동일시하였으나 소위 지혜롭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이 새로운 지혜를 반립시켰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셨습니다(1고린 1,24.30; 참조. 골로 2,3; 묵시 5,12).
그러나 이 몇 가지 언급을 제외하고는 놀랍게도 지혜의 면모를 매우 적게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지혜는 모호하여서 예수의 신비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었기나 하듯이 말이다. 더욱이 사도 바울로가 보기에 예수와 그분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인격화된 지혜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의 구원행위의 도구라는 측면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철학이 아니다.
또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 동기에 대해서 주저했기 때문이었을까? 말씀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것은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같은 방식으로 극단화된다면 그 결과는 후대에 일컬어지듯 일종의 양태론에 떨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의 단순한 현현이 되고 결국 하느님의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아버지 앞에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유지하였다. 그 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또 다른 표현 그 이상이신 것이다.
두 인물의 이러한 혼동은 거의 필연적이라 할 만한데 영이 예수와 일체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은 예수와 구별되었다. 갈라 4,6의 경우처럼 바울로의 표현 양식에서 삼위적 정식이 곧 나타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곧 아버지! 라고 외칩니다”(갈라 4,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2고린 13,13). 삼신론적이 아닌 이 삼위적 칭호들은 매우 일찍 등장하였다. 이 칭호들은 제 2성전이 파괴된 이후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에페 4,4-6, 유다 20-21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마태 28,19에서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세례를 베풀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9)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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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봉사직(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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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서를 매개로 예수를 지칭하기
바울로 이전에 이미 초대 신자들은 하느님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신원에 완전히 부합하는 분으로서 예수의 신원의 신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성서의 계시에 입력된 하느님의 이름은 이제 예수의 이름 안에 그분 이름의 따르굼, 해석 또는 그 주해 내지 그 대용어를 발견하였다. 특히 로마 10,12-13에서 요엘 2,32의 키리오스(주님)를 예수께 적용할 뿐 아니라 바울로는 “모든 이(모든 존재)의 주님”이라는 표현도 감히 사용한다. 후자의 建辭는 당시의 유다교에서 장엄하게 하느님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더욱이 1데살 5,1이 말하는 “주님의 날”은 아모 5,18을 인용한 것인데 이제는 예수께 적용되었다(참조 1고린 1,8).
그는 하느님의 현존의 구름에 싸여 영광의 세계에 속해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부활 사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바울로는 십자가와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에만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1고린 9,1; 15,7이하; 갈라 1,15이하). 그러나 마르꼬는 어떤 의미로 부활의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음서 전체가 부활이야기이고 그 정점은 변모 이야기에 위치한다. 그렇다고 부활이야기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영광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액센트가 다른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성찰에 따르면 예수의 본질적인 신원은 변모이야기 속에서 시간 안에서 시간을 넘어서서 이미 집약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형언하기 어려운 예수께 대해 제자들이 가졌던 첫 번째 체험이었다. 이 신비 체험은 부활사건 이전에 이미 발생하였으나 그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고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활사건이 필연적이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은 명백했다. 모세와 엘리야보다 크신 하느님의 아들이 거기에 계신 것이다. 예수는 단지 하나의 새로운 모세가 아니다. 그분은 신명 18,15에 따라 기다려왔던 예언자처럼 또 다른 예언자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이 마치 시나이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듯이 그 분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야하는 분이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는 하늘의 소래가 의미하듯 그 분은 아버지의 탁월한 계시인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성서의 정경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교향악을 존중 해야하고 나름대로 자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다양한 전승들의 합창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과거의 표현들을 단지 오늘의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복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워져야 하는 언어의 역동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질문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러면 여러분은 내가 누구하고 말합니까?”(마르 8,29)
게다가 종속주의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를 또 다른 신적인 단일체 즉 두 번째 신앙으로 예수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거부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근본적으로 유일신 주의자들이었으나 “나는 있는 그로다”(출 3,13)라고 선언하신 이스라엘의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의 아드님을 말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 아드님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셨던 것이다. [출처] 말씀의 봉사직(10) |작성자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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