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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3. 오전 7:26:36

글자

광주유수부와 산성마을
김 기 주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1. 광주유수부의 인문적 배경
1) 조선시대 지방조직과 유수부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은 전국을 8개 도(道)로 나누고, 각 도에는 관찰사(觀察使, 종2
품)를 배치하는 동시에 도의 하부조직으로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
府), 군(郡), 현(縣)을 두었다. 그 책임자로는 부에 종2품의 부윤(府尹), 대도호부에 정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목에는 정3품의 목사(牧使), 도호부에는 종3품의 부사(府使), 군에는
종4품의 군수(郡守), 현에는 종5품의 현감(縣監)을 수령으로 배치하였다. 각급 수령 간의
위계는 부임하는 수령의 품계 차이는 있었지만 부에서 현에 이르기까지 횡적으로는 대등
하게 도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았고, 각급 수령에게는 지방의 행정권과 함께 군사직과 사
법권까지 부여되어 있어 모든 재판을 자신의 명의로 할 수 있었다. 한편, 수도인 한양을
다스리는 한성부(漢城府)의 경우 한성부판윤(정2품)은 관찰사보다 그 품계가 높았으며, 유
수부(留守府)의 경우는 도(道)와 같은 등급으로 그 우두머리가 부윤(府尹, 종2품)이었다.
유수부(留守府)는 중국의 당(唐)나라에서 비롯한 제도로서 수도(首都) 주변에 배도(陪都)
또는 배경(陪京)을 설치하고 옛 도읍지를 경(京)으로 삼아 삼경제(三京制)를 실시한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송나라에서도 수도와 그 주변 고을을 적현(赤縣)과 기현(畿縣)
으로 삼아 여타 행정구역과 구별한 것도 그 제도를 이은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당
송의 제도를 본떠 삼경제를 실시하였는데, 전기에는 개경(開京)과 서경(西京, 평양), 동경
(東京, 경주)를 삼경으로 삼고, 중기 이후에는 동경 대신 남경(南京, 서울)을 삼경으로 삼았
었다.
본래 유수부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유수의 관직
은 반드시 서울이었던 지역에 둔다(留守之職 必京都而後 乃可有者)”라고 한 것처럼, 과거
에 수도였던 구역에 설치한 관부(官府)를 말한다. 이에 따라서 조선에서도 태조 3년(1394)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명칭을 개성(開城)으로 바꾸고,
이 지역에 유수부를 설치하여 담당 관원으로 유후(留後)와 부유후(副留後) 등을 두었었다.
한편, 유수부는 과거 수도 구역의 관리라는 목적 외에 현재의 수도를 외곽에서 호위(護
衛)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수부의 기능 때문에 17세기부터 한양(漢陽) 인근의
강화(江華), 수원(水原), 광주(廣州)에 유수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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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는 ‘옛 수도의 관리’와 ‘수도 한양의 호위’라는 목적이 결합되어 나타난 행정적ㆍ군사
적 시스템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옛 수도의 관리라는 목적에서 설치된 개성 유수부에도 관
리영(管理營)이라는 군영(軍營)이 설치됨에 따라 강화, 수원, 광주 유수부와 함께 수도 서
울을 외곽에서 호위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2) 유수부의 지휘체계
조선후기 수도 서울로부터 100리 내에 설치되었던 4개의 유수부에는 각각 별도의 군영
(軍營)이 설치되었다. 이들 군영은 개성의 관리영(管理營), 강화의 진무영(鎭撫營), 수원의
장용영외영(壯勇營外營), 광주의 수어청(守禦廳)으로서 유수부의 책임자인 유수(留守)가 그
직책을 겸직하였다. 군영의 일반적인 군사 행정은 군영 자체의 판단 아래 수행하지만, 유
사시의 군사이동 등은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명령없이
4개 유수부가 연합작전을 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하였을 때 군영은 중앙정부의 지휘에 따라 행동해야만 했
다. 국왕의 주재 하에 중앙정부 최고위 관청인 비변사(備邊司) 회의를 통해 대응 방법이
결정되면 이를 각 유수부의 군영에 전달하고 각 군영은 이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였다. 중
앙정부의 비변사나 병조(兵曹)에서 각 유수에게 명령서를 전달하는데, 이때 국왕이 보관하
고 있던 밀부(密符)의 한 쪽도 명령 전달자인 선전관(宣傳官)에게 주어 틀림없는 국왕의
명령서임을 입증하게 하였다. 선전관이 밀부를 가지고 군영에 도착하면 유수가 임명될 때
받았던 밀부 반쪽과 합쳐 보아 꼭 들어맞아야만 국왕의 명령임이 입증되었다. 명령서에 관
인(官印)이 찍혀 있음에도 이와 같은 이중 장치를 고안한 것은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이 국
왕의 명령을 빙자하여 정규 병력을 반란에 동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림 1. 유수부의 체계(http://king.culturecont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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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주유수부의 연혁 및 행정구역
산성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때 부터이다. 문무왕 12년(672) 산성을 처음
축조하고 주장성(晝長城)이라 불렀으며, 1999년 발굴시 연화문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당시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남한산성은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군사와 인근 주민이 피신하여 침공한 적
과 맞서 싸운 요새지였다. 1231년과 1232년 몽곤군이 침공해 왔을 때에는 군사와 광주 주
민들이 광주부사 이세화의 지휘하에 굳게 단결하여 몽고군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그
리고 고려말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에도 이민들이 모두 남한산성에
피신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남한산성은 유사시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왕과 수도를 지켜줄 보장처
로서의 인식되었다. 특히, 1592년의 임진란과 인조 2년(1624) 발생한 이괄의 난을 통하여
왕이 수도를 버리고 파천하는 결과를 맞이한 이후 이를 계기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부각
되고 마침대 남한산성의 대대적인 수축이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남한산성내 산성마을은
유사시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인조는 1626년 11월 광주 읍치
를 산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어청을 창설하였다. 이어 숙종
9년(1683)에는 산성마을을 포한한 광주를 관장하는 광주부가 광주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
전에는 광주부사가 행정을 담당하고, 군사지휘는 수어사가 하는 이원체제였으나 여러 가지
부작용을 유발하였으므로 유수부로의 승격과 동시에 유수가 행정과 군사를 함께 담당하도
록 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광주목을 없앰
1506년(중종 1) 광주목을 복구하고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둠
1566년(명종 22) 광주목사가 방어사(防禦使)를 겸직하게 함
1573년(선조 6) 광주목사가 토포사(討捕使)를 겸직하게 함
1577년(선조 10) 목사(牧使)에서 부윤(府尹)으로 승격시킴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고 광주부(廣州府) 읍치(邑治)를 산성으로
옮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45일 간 머뭄
1683년(숙종 9)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守禦使)를
겸함
별도로 경력(經歷)을 두어 광주의 일반 행정을 담당하게 함
1690년(숙종 16) 수어청(守禦廳)의 본청(本廳)을 수도 한성(漢城)으로 옮김
광주유수를 다시 광주부윤으로 내리고 새로 설치했던 경력도 없앰
1750년(영조 26)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守禦使)를
겸함
별도로 경력(經歷)을 두어 광주의 일반 행정을 담당하게 함
1759년(영조 35) 수어청(守禦廳)의 본청(本廳)을 수도 한성(漢城)으로 옮김
광주유수를 다시 광주부윤으로 내리고 새로 설치했던 경력도 없앰
1795년(정조 19) 수어청 본청을 영구히 남한산성 안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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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부윤을 광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1895년까지 유수부의 체계 지속
광주 유수부의 행정구역은 성외 지역은 23개의 면(面)과 131개의 리(里)로 구분하고, 남
한산성(南漢山城) 내부는 남동(南洞)과 북동(北洞) 2개의 동(洞)으로 구분하였다.
표 1.『여지도서(輿地圖書)』기록 준거
2. 광주유수부의 공간구조 및 시설
1) 읍성의 공간구조
조선시대 각지의 읍성(邑城) 모습은 일반적으로 고을의 북측에는 읍의 진산(鎭山)이 위
치하고 읍을 둘러싼 성이 있었으며, 누정(樓亭)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읍성의 중심지역에
는 지방행정을 관할하는 관아(官衙) 및 공해(公.), 전패(殿牌)를 안치하여 향궐망배(向闕
望拜)하고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였던 객사(客舍) 등이 배치되었다. 또한 이들 시설을 보조
하기 위한 향청(鄕廳, 동헌 다음의 두 번째 관아라 하여 ‘貳衙’라 불리기도 함), 민원처리
기관인 작청(作廳) 및 여러 종류의 창고(倉庫) 등이 읍성의 중심시설이 되었다. 그 외에 성
황단(城隍壇)과 사직단(社稷壇)을 비롯한 기타 유불사상의 영향을 받은 각종 사묘(祀廟)가
이곳저곳에 있었으며, 장터가 마련되어 5일장이 서기도 하였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동문과 서문을 이어주는 대로와 남문으로 연결되는 대로가 ‘T'자형의 가로망을 이
루었으며, 이때 객사와 관아 등의 시설은 동서가로의 북쪽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읍성 안에는 관인(官人)과 향리(鄕吏)들이 주로 거주했으므로 관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가는 초가집이었다. 넓은 농지를 소유하였던 양반들은 읍성 밖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고, 그 주변에는 친척들이 있고 소작인들의 초가집이 있었다.
읍성 안에는 큰 집을 지을 공간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아에 속한 관리들과의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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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포곡식 산성 (황주 정방산성) 그림 4. 테뫼식 산성 (김해 분산산성)
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였던 양반일수록 수령에게는
부담스러웠으므로 읍성 밖에 거처를 정하였다. 생필품의 구매 등과 필요한 경우에만 읍성
안을 나들이하였다.
조선시대 일반 읍성의 구조 및 배치
(자료출전: 이상구)
그림 2. 읍성의 공간구조
2-2. 산성의 공간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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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읍성 + 산성 (칠곡도호부 + 가산산성)
3) 광주유수부 남한산성의 입지형국 및 시설
(1) 입지
분지형으로서 세종실록에서는 이곳의 주산을 일장산(日長山)이라 불렀는데, 이는 산성
안의 분지가 평탄하여 여느 산속과 달리 일찍 해가 뜨고 늦게 해가 짐으로써 낮이 길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분화구의 형태를 지닌 산세로 인하여 복판은 분지를 이루었으
나 그 둘레는 화강암과 편마암에 의하여 깍아지른 험준한 봉우리와 벼랑으로 이루어져 천
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청량산(淸凉山)이라 불렀다. 이들 사면의 산
능선은 거센 북풍을 막아줌으로써 산성내의 거주민에게 아늑한 공간을 마련해 준다. 전체
적으로 남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분지내의 계곡물은 배수가 잘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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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남한산성도(영남대박물관 소장, 1693~1711년 사이 제작 추정)
그림 7. 남한산성의 지형 및 가로망 현황 (Daum Skyview 및 1/5000 지형도 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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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지도를 통해 본 남한산성의 형국
대부분의 고지도는 위 그림에서와 같이 남한산성을 포함한 주변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서쪽을 위쪽으로 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남한산성의 주산을 서쪽에 위치한 청량산으로
삼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주봉과 서장대 쪽에서 내려오는 두 물줄기가 골을 이
루며 합쳐져 주변 능선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쳐져 지수당을 거쳐 동문으로 흘러간다. 산성
내의 주요 도로 역시 이들 물줄기와 함께 골을 이루며 형성되어 있는데, 크게 보아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횡축방향의 길과 행궁으로부터 동문에 이르는 종축방향의 두 길이 종각
이 있던 산성의 중심부에서 교차하며 ‘T'자형 주간선 도로를 형성하였다.
그림 8. 동국여도(東國輿圖) (古大4790-50) 그림 9. 남한산성도
그림 10. 해동지도 (古4709-61) 그림 11. 1872년 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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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문을 연결하였던 이들 도로망은 성내부의 공간과 성 외부와를 연결시키므로 기본적
인 도로망이 이들 4대문을 중심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물자
의 수송과 이동에 주로 사용된 문은 남문과 동문, 북문이었을 것이다. 서문의 경우에는 성
파와의 거리가 짧은 반면 경사가 급한 까닭에 개인적인 접근로 외에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문으로는 송파나 시흥, 과천 등 서쪽 방면으로부터의 물자수송이
주로 이루어지고, 동문으로는 경사가 가장 완만한 까닭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많은 양
의 짐을 우마로 운반하였을 것이다. 북문의 경우에는 한강수운을 통하여 확보한 세미(稅
米)를 하남시의 상사창동이나 하사창동에 보관하였다가 성안으로 운반하는 길로 활용되었
다.
(3) 주요시설물과 배치
시설물 세부 시설물 위 치 건축시기 용 도
궁실
(宮室)
행전
(行殿)
상궐(上闕) 일장산 아래
1625
국왕의 임시처소
하궐(下闕) 상궐 삼문 밖 유수 집무소
좌전(左殿) 행전 북쪽 담장 밖 1711 종묘 신주 봉안
우실(右室) 남문 안 1711 사직 신주 봉안
재덕당(在德堂) 상궐 뒤쪽 언덕 1688
한남루(漢南樓) 행전 외삼문 1798
인화관(人和館) 행전 동쪽 1624 객사(客舍)
관아
(官衙)
공해
(公.)
좌승당(左勝堂) 상궐의 왼쪽 담장 밖 1817 유차산루(有此山樓) 있음
일장각(日長閣) 하궐의 왼쪽 1829
수어영(守御營) 중앙의 북쪽 언덕아래 연무당(鍊武堂)으로 불리움
제승헌(制勝軒) 수어영 뒤쪽 1748 판관의 집무소
기타
유수담당
비장청(裨將廳), 교련관청, 기패관청, 본청(本廳) 군관청
별군관청, 친아병 초관청, 아병(牙兵) 장관청, 중영(中營) 군관청,
별파진 초관청, 표하청(標下廳), 사후청(伺候廳), 서리청, 고직청, 순령수
청, 취수청(吹手廳), 군뢰청(軍牢廳), 훈도청(訓導廳), 세악수청(細樂手
廳), 영기청(營妓廳), 승도청(僧徒廳), 향청(鄕廳)
판관담당
지곡관청(知穀官廳), 방영(防營) 군관청, 속오(束伍) 군관청, 포도(捕盜)
군관청, 서리청, 순뢰청(巡牢廳), 종각(鐘閣), 마랑(馬廊), 옥(獄)
창고(倉庫)
영창(營倉), 신풍창(新豊倉), 별창(別倉), 동창(東倉),
신북창(新北倉), 구북창(舊北倉), 양창(凉倉), 승창(僧倉),
수원창(水源倉), 영고(營庫)
단묘(壇廟)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여단(.壇)
온왕묘(溫王廟, 崇烈祠), 현절사(顯節祠)
표 2. 남한산성의 주요시설물과 위치 (『중정 남한지』에 근거)
3. 산성마을의 주거
1) 마을의 형성과 변화
앞서 연혁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람들은 신라 문무왕때 산성의 초축 이후 이곳 산성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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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민간인이 산성 내에 살
았다는 기록이 문헌에 등장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일장산성은 주치의 남쪽에 있다. 높고 험한데, 둘레가 3,992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이 7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또 한전(旱田),
수전(水田)이 모두 124결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기사에도 “광주의 남한산성은 …다른 성에 비하여 더욱 크고 일찍부터 거주민도 있었습니
다.… 가운데는 큰 개울이 있으며, 우물은 모두 6개소이고, 수답이 거의 십여석 지기나 되
며, 좋은 밭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작성할 당시 읍치는 남한산성 위쪽인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
다. 이후 후금(後金, 청나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인조 4년(1626)에 읍치를 남한산 성안
으로 옮기고, 유사시 산성마을이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를 방어할 수 있도록 고을
의 격도 목(牧)에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면서 인근의 인구를 이곳 산성마을로 이주
시켰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모집한 호구수는 모두 300여호 정도였으며, 이들에게는 신역
(身役)과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 결과 산성으로 피역자들이 몰려와 호구가 1,000
여호에 이르게 되었고, 숙종 17년(1691)에는 산성에 더 이상 주민을 모집하지 말자는 주장
이 제기되어 모민정책(募民政策)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12. 20세기초 서장대쪽에서 바라본 산성마을 그림 13. 20세기초 동장대쪽에서 바라본 산성마을
그림 14. 서장대쪽에서 바라본 마을모형 그림 15. 동장대쪽에서 바라본 마을모형
이후 산성 안의 주민은 19세기 말까지 1,000여호 약 4,000여명의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
지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산성내 남동(南洞)에는 614호
에 남자 1,191명 여자 1,055명이, 북동(北洞)에는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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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여 총 1,076호에 4,108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1842년~1843년
간에 편찬된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에는 산성내 호구수가 1,068호에 남자 2,100명 여
자 1,947명 도합 4,047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1871년 편찬된 『광주부지
(廣州府誌)』에도 산성내의 호구수는 1,161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한말 의병들의 활동이 이곳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일제는
1917년 광주군청을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시켰고, 이로서 300여년간 군사행정의 중심
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산성리 마을은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점차 많은 주민들이 이곳
을 떠나 서울과 광주 등지로 나아갔으며, 마을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 여호로 줄어 산촌벽지로 변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밭농사나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생활하였었다.산성마을에 또 한번 변화의 계기가 온 것은 1971년 3
월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74년 남한산성을 동서로 관통
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됨으로써 남한산성의 교통망이 크게 개선되었다. 서울
과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남한산성을 찾기가 더욱 용이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이
이렇게 관광지화가 됨에 따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 산성내에 음식점이 늘어났고 무허
가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아 산성의 고유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산성마을의 주거형식
남한산성 안의 산성마을에는 현재 오래된 가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천여호가 넘는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
고 마을이 쇄락함에 따라 대부분의 집들이 허물어졌다.
아래의 사진과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산성마을의 집들은 인근 광주지역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ㄱ'자형과 역‘ㄱ’자 형식의 평면(곱은자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경기도 지
역 민가의 전수조사 결과 광주군의 경우 80% 이상(42/50), 성남의 경우 100% (19/19), 하
남의 경우 80% 이상(17/20), 여주의 경우 78% (100/127) 등 전체적으로 80% 이상의 주택
이 ‘ㄱ'자형과 역‘ㄱ’자 평면이다. 이들 평면은 안방, 건넌방, 대청,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
며, 기본적으로 이들 구성요소가 각 1칸으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이고 집의 규모에 따라 안
방과 대청을 2칸으로 하여 크게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주택의 경우에서는 안방의 북
쪽으로 윗방이 덧붙어 있는 것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 안방이 종축방향으로 규모가 확대되
는 경향을 보이고 바깥채와 함께 튼口자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림 16. 산성마을 주택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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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산성마을 전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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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완, “경기지역 ㄱ자형 안채의 평면특성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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