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강거능파(강완숙(姜完淑))
생년: 1760(영조 36)
졸년: 1801(순조 1)
시대: 조선후기
활동분야: 종교 > 천주교인
출생지: 충청남도 내포
[상세내용]
강완숙(姜完淑)에 대하여
1760년(영조36)∼1801년(순조1). 초기 천주교회의 순교자.
최초의 여성회장이다. 세례명 골롬바.
충청남도 내포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덕산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천주교가 충청도지방까지 전해지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등을 도와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데 큰 소임을 하였다.
주문모가 1794년(정조18) 12월 밀입국하여 서울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하던중, 1795년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은 그를 자기집 나뭇광에 숨겨주었으며, 그 뒤 6년간 주문모의 전교활동을 여러 모로 도왔다.
주문모는 그녀에게 영세를 주고 여회장으로 삼아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하게 하는 한편, 교회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당대의 남인학자들과도 교유하여 교리에 대한 토론도 하였으며, 구변과 수완이 좋아 많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입교시켰는데, 특히 왕실의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申氏)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문모에게 직접 영세를 받게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그녀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교세는 크게 늘어났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같은해 2월 28일 체포되어 갖은 고문으로 주문모의 행방을 추궁당하면서도 끝내 함구하여, 7월 2일 서울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참고문헌]純祖實錄, 黃嗣永帛書, 邪學懲義
[집필자]김옥희(金玉熙)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순조 2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2월 25일(신미) 1번째기사
대신과 금오당상을 소견하다. 대왕대비가 신료들과 사학 추국에 관해 논의하다
시임대신·원임대신·금오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국문의 일을 지체시키고 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번의 옥사(獄事)는 도당(徒黨)이 진실로 번다하여 경외(京外)에 있는 자들이 만천(萬千)을 헤아릴 정도입니다. 당초에 성의(聖意)는 대체로 그들 가운데 우심한 자를 극형으로 다스려 풍성(風聲)이 미치는 바에 따라 한 사람을 징토하여 만 사람을 면려(勉勵)하는 도리에서 나왔으므로 신 등이 삼가 덕의(德義)를 본받아 단지 갇혀 있는 자들만 경중(輕重)을 나누어 아뢰었습니다. 이가환(李家煥)은 그들 가운데 본래 문명(文名)이 드러났으니, 당초에 사학(邪學)의 책자를 중국에서 가지고 왔을 때에 그가 만약 이를 짐독(鴆毒)과 같이 보고 사갈(蛇蝎)처럼 여겨 피하였더라면, 후생(後生)의 무리가 반드시 점차 물들어 그릇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창(首倡)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 말이 점차 번지게 되어 경외에서 이를 붙좇아 따라 물이 하늘에 사무치고 불이 벌판에 번지듯이 화변(禍變)이 만연되었으니, 그 근본은 모두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법을 적용하기 전에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가해졌으니, 마땅히 지만(遲晩)356)한 후에 물고(物故)된 것으로 조지(朝紙)357)에 반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훈(李承薰)은 당초에 사서(邪書)를 구입해 가지고 와서 온 세상에 전하여 배포하였으니 인심(人心)이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가 어그러진 것은 진실로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가 작용(作俑)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문서에 적발된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신부(神父) 등의 말은 명호(名號)를 만든 것인데 신(神)과 같이 앙모(仰慕)하는 자를 신부라고 일컬으니 신(神)을 대신(代身)할 수 있다는 말이요, 아비를 대부(代父)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인(洋人)들과 난만(爛漫)하게 왕래하고 있는데 그 실정을 구명해 보면 지극히 흉참(凶慘)하였으니, 이 또한 일률(一律)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정약종(丁若鍾)은 국정(鞠庭)에서 엄중하게 추문(推問)하는 아래에서도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요망하고 영악함은 전고(前古)에 없던 것이지만,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입니다. 효경(梟獍)같은 심장(心腸)은 임금과 어버이를 향해 방자하게 흉언을 발설하기에 이르렀으니, 단지 요언(妖言)으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율(律)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결안(結案)해서 정법(正法)해야 할 것입니다. 홍교만(洪敎萬)은 터무니없는 요설(妖說)을 주장하여 인심을 그르친 것이 진실로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국정에 이르러서는 후회하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늘을 지척(指斥)하며 그 서학(西學)을 과장하여 ‘사(邪)’ 자를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차례 엄중히 형신(刑訊)하였으나, 시종 완강하게 거역하였으니, 이와 같은 흉패(凶悖)한 무리는 또한 일률(一律)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창현(崔昌顯)은 회상(繪像)을 장식하여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붙잡혀 포청(捕廳)에 갇히자, 감히 살 방도를 구할 계책을 내어 거짓으로 후회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정에서 형신받기에 이르러서는 진장(眞贓)이 죄다 드러나자 또 도리어 전의 초사(招辭)를 번복하고 심지어는 야소(耶蘇)를 위해 한 번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필공(崔必恭)은 전후의 죄악이 몹시 통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반드시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고자 하신 덕의(德意)가 하늘과 같이 커서 간곡하게 그 목숨을 보존시켜 주고,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하여 항산(恒産)을 얻게 하였으므로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게 되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돼지와 물고기나 목석(木石) 같이 완악한 무리라 하더라고 감화될 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완악하고 강퍅하여 도리어 당초에 뉘우친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흉패하고도 완악한 무리는 하루라도 천지(天地) 사이에 둘 수가 없습니다. 이 자는 즉각 법을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이존창(李存昌)은 사학에 오염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실로 호서(湖西) 한 도의 거괴(巨魁)가 되는 자입니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데다가 변사(變詐)가 무상(無常)하였으니, 중외(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가 됨을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이 자가 만약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팔방(八方)의 청문(聽聞)에 손상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당(邪黨)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존창도 살았으니, 다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할 것이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철신(權哲身)은 흉악하고 간특한 정절(情節)이 별로 다를 것이 없으나 이미 물고(物故)되었으니 이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당초에 사학에 오염되고 미혹되어 빠져 들었을 때에 죄범(罪犯)을 논하였어도 애석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사학을 버리고 정도(正道)에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그의 입으로 발명(發明)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적발된 문서 가운데 사당(邪黨)의 서찰(書札)에, ‘너의 아우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고, 정약종이 스스로 쓴 문적(文蹟)가운데 또, ‘형제와 함께 서학(西學)을 익힐 수 없으니, 자기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여러 죄수들과 구별됨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관대한 은전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홍낙민(洪樂敏)은 호중(湖中)에 있을 때부터 사학(邪學)을 하였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단지 그 공초(供招)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였습니다.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일컬은 강거능파(姜巨能巴)라는 자는 곧 반족(班族)의 여인으로 사학(邪學)에 깊이 빠졌는데, 정약종이 곧바로 아뢰지 않은 것을 홍낙임이 곧 지명하여 고하였으니, 바로 홍필주(洪弼周)의 어미였습니다. 그가 이미 당류(黨類)를 지명하여 공초를 바친 것은 또한 족히 가상하게 여길 만하니, 추국의 체모로 헤아려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동섬(趙東暹)은 양근(楊根) 사람인데, 양근(楊根)과 여주(驪州) 사이가 점차 더욱 심하게 오염되었고, 조동섬이 여러 초사(招辭) 가운데 아울러 그 이름이 나왔으니, 이 자는 더욱 엄중하게 형신을 가한 다음 추조(秋曹)에 보내어 다시 엄중하게 형신한 후에 차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김백순(金伯淳)은 한 번 미혹된 다음 끝내 변개할 줄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에게 노모(老母)가 있다고 하므로 그 어미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온교절거(溫嶠絶裾)358)’에 대한 일을 인용하여, 이미 대부모(大父母)가 있으니, 어찌 부모에게 근심을 끼칠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미혹되어 마음을 돌이키지 않음이 이와 같았는데 여러 번 신문(訊問)하며 여러 가지로 효유(曉諭)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 조금 뉘우쳐 깨닫는 뜻을 보였습니다. 당초에는 비록 극도로 깊이 오염되었었으나 이미 뉘우쳐 깨닫는 빛이 있으니, 일률(一律)은 참작할 점이 있습니다마는, 이 자는 다시 형신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석충(吳錫忠)은 그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고 있으나 점차 오염된 자취가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우니, 사학의 종락(種落)임이 분명합니다, 또 흉역(凶逆)과 서로 내통한 자취가 있으니,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酌處)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형신(刑訊)을 가하여 구핵(究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기양(李基讓)은 그 집안의 선조(先祖)가운데 국가에 크게 훈로(勳勞)를 세운 사람이 있으니 그에게 어떻게 차마 형장(刑杖)으로 엄중하게 신문(訊問)하겠습니까마는, 당상(堂上)이 상소하여 논한 외방(外方)의 물론(物論)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전부터 지목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으므로 의계(議啓)하는 가운데 형신(刑訊)을 가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으니, 판하하기를 기다려 거행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대저 이 서학(西學)이 중국에 유입된 것은 대개 만력(萬曆)359) 연간인데, 전하는 말을 듣건대, 안남국(安南國)에서는 크게 소탕을 가하여 자그마치 1만여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홍낙민이 일컬은 거능파(巨能巴)는 곧 양국(洋國)에서 존칭하는 명호인데, 그 사람은 곧 강가(姜哥)의 여인으로서 글 내용 가운데 정약종에 대해 언급한 것이 지극히 간악하고 지극히 요사스러우며 성명도 또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는 비록 부녀자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신등이 이미 발포(發捕)하라는 뜻으로 포청에 분부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강 여인의 지극히 간악하고 요사스러움은 이미 논할 것조차 없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족(士族)과 여항(閭巷)을 논할 것 없이 무릇 부녀로서 이 사학을 하는 자들은 문서에서 적발된 진장이 많이 있으니 남김없이 죄다 소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점차 물들어 만연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릅니다”하였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이미 진소(陳疏)하였으므로 이미 발포(發捕)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이미 적발된 진장이 없었으니, 이기양은 특별히 백방(白放)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는데,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이기양은 곧 고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입니다. 고 상신은 국가에 대해 큰 훈로가 있었으니 신들도 또한 어찌 곡진하게 용서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그와 인척관계를 맺은 자들이 모두 사학(邪學)의 괴수들이고, 또한 일찍이 이존창을 집안에서 양육하며 문필을 가르쳤으며, 또 전에 최창현과 친숙했었습니다. 비록 적발된 진장은 없다하더라도 갑자기 백방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이기양을 다시 위엄(威嚴)을 갖추어 엄중하게 추문해서 의계(議啓)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간이 논계(論啓)한 가운데 대신을 감죄(勘罪)하는 일에 대한 논의는 미처 품처(稟處)하지 않은 것이 있다.”하였는데,
심환지가 말하기를,
“있었습니다마는 대관(大官)은 체모가 중대하여 한두 사람의 소견을 가지고 갑자기 논단(論斷)할 수는 없으며, 반드시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서유방(徐有防)의 일에 이르러서는 소장(疏章)이 이미 계사(啓辭)와 다른데, 또 추탈(追奪)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김치묵(金峙默)에 대한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여 대계(臺啓)가 발론된 후에 여정(輿情)이 매우 흡족해 하였습니다. 채제공(蔡濟恭)은 계축년360)의 상소에 감히 해서는 안될 일을 말하였고, 또 더욱이 임자년361)의 흉소(凶疏)에서 죄상이 모두 드러났는데, 그에게만 어떻게 유독 죄벌(罪罰)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추국하여 정법(正法)할 경우에는 으레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만, 지난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무리는 신주(神主)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기하였다하여 모두 부대시(不待時)의 율(律)을 시행했었습니다. 이번의 여러 죄수들도 부대시의 율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그 가운데 이존창은 본도(本道)에 내려보내어 백성들을 모아놓은 후에 정법(正法)하여,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두려워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하였다.
註356]지만(遲晩): 죄인이 벌을 받을 때 자복하면서, ‘너무 오래 속여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것.註357]조지(朝紙): 승정원에서 날마다 처리된 일을 아침에 적어서 반포하던 일. 또는 그 적은 종이. 조보(朝報).註358]온교절거(溫嶠絶裾) : 온교는 동진(東晋) 원제(元帝) 때의 명신(名臣)으로 그때에 진(晋)나라 형세가 쇠약하여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 함락되자 원제가 양자강 이남 건강(建康)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이때에 유곤(劉琨)이 온교에게 출사(出仕)하기를 권하자 그 어미가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였으나, 온교는 옷자락을 끊고 떠나갔음.註359]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註360]계축년: 1793 정조 17년 註361]임자년: 1792 정조 16년.
○辛未/召見時ㆍ原任大臣、金吾堂上。 大王大妃敎曰: “鞫事遷延, 誠爲悶然矣。” 領府事李秉模曰: “今番獄事, 徒黨寔繁, 京外所在, 以萬千計。 當初聖意, 蓋出於治其太甚, 而風聲所曁, 以爲懲一勵百之道, 故臣等謹體德意, 只以在囚者, 分輕重仰奏矣。 李家煥, 自中素著文名, 而當初邪學冊子出來之時, 渠若視之如鴆毒, 避之若蛇蝎, 則後生輩, 必無漸染訛誤之理。 而由渠首倡, 其言漸熾, 京外靡然從之, 滔天燎原之禍, 其本則都歸於渠。 而未及用法, 鬼誅先加, 當以遲晩後物故, 頒諸朝紙。 李承薰, 則當初購來邪書, 傳布一世, 人心之陷溺, 世道之訛誤, 苟求其源, 莫非渠所作俑。 以現捉於文書者言之, 神父等說, 做作名號, 仰之如神者, 謂之神父, 可代神, 父則謂之代父。 至與洋人, 爛漫往復, 究厥情跡, 至凶至憯, 此亦宜用一律。 丁若鍾, 則鞫庭嚴問之下, 稱以之死靡悔。 妖憯獰慝, 振古所無, 此於渠, 猶屬餘事。 而其梟心獍腸, 至向君親, 肆發凶言, 不可但用妖言惑衆之律。 當以犯上不道, 結案正法。 洪敎萬, 則譸張妖說, 訛誤人心, 固已畢露無餘, 而及到鞫庭, 不但無悔悟之心, 乃反指斥太淸, 誇張厥學, 至謂不可以邪字加之。 屢次嚴訊, 終始頑拒, 如此凶悖之類, 亦不可不用一律。 崔昌顯, 則粧飾繪像, 無不主張, 而捉囚捕廳也, 敢以求生之計, 詐發悔悟之說。 及至鞫訊, 眞贓畢露, 則又反翻覆前招, 至願爲耶蘇一死, 此亦不可不用一律。 崔必恭, 則前後罪惡, 萬萬憤痛。 粤在先朝, 必欲人其人之德意, 與天同大, 曲貸其首領, 至於差送審藥, 俾得恒産, 無妻而有妻, 無家而有家, 雖豚魚、木石之頑, 宜知感化。 而渠乃頑然悍然, 反以當初悔悟之言爲悔云, 如許凶頑悖逆之類, 不可一日置之於覆載之間。 此則宜卽刻用法。 李存昌, 則染汚邪學, 積有年所, 實爲湖西一道之巨魁。 屢入犴狴, 變詐無常, 中外遠近, 無不知存昌之爲邪魁。 此而若生出獄門, 不但有損於八方聽聞, 世之爲邪黨者, 必皆曰, ‘存昌且生, 更無可懼’ 云, 此亦不可不用一律。 權哲身, 則情節之凶慝, 別無異同, 而旣已物故, 今無可論。 丁若銓、若鏞, 則當初之染汚迷溺, 論以罪犯, 亦無所惜。 而中間之棄邪歸正, 不但自渠口發明而已, 若鍾之現捉文書中, 邪黨書札, 有 ‘勿令汝弟知之’ 之語, 若鍾所自書文蹟中, 又謂, ‘不能與兄弟同學, 莫非己罪’ 云, 此則與諸囚, 略有區別, 施以次律, 不害爲寬大之典。 洪樂敏, 則自在湖中, 厥有邪學之名, 而第其招供, 終始發明。 若鍾文書中所稱, ‘姜巨能巴’ 者, 卽班族女人, 而深於厥學, 若鍾之所不直陳者, 樂敏卽爲指名以告, 乃是洪弼周之母也。 渠旣指黨納招, 則亦足可尙, 而揆以鞫體, 當施次律。 趙東暹, 亦楊根人也, 楊、驪之間, 漸染尤甚, 而東暹則諸招竝出, 此則當加嚴刑, 出付秋曹, 屢次嚴刑後, 施以次律。 金伯淳, 則一直迷惑, 終不知變。 渠有老母云, 故以不念其母爲問, 則渠以溫嶠絶裾事爲引, 而旣有大父母在, 則豈可以父母之貽憂爲念乎? 云云。’ 其迷溺不返如是, 而屢次究訊, 多般曉諭, 則末乃稍示悔悟之意。 當初, 則雖極深染, 旣有悔悟之色, 則一律容有可議, 此則當更加刑訊。 吳錫忠, 則渠雖終始發明, 而漸染之跡, 狼藉難掩, 明是邪學種落。 而又有與凶逆相通之跡, 此則不可輕先酌處。 當更加刑訊, 以爲究覈之地。 李基讓, 則渠家先祖, 有大勳勞於國家, 於渠豈忍以刑杖嚴訊? 而以堂疏所論方外物論觀之, 自前指目, 皆歸於渠, 故議啓中, 以加刑爲請。 而姑未判下, 當待判下擧行矣。 大抵此學之流入中國, 蓋自萬曆年間, 而傳聞安南國, 則大加掃蕩, 至於萬餘人之多云矣。 洪樂敏所稱巨能巴, 卽洋國尊稱之號, 而其人卽姜哥女人也, 書辭中言及若鍾者, 至奸至妖, 姓名亦不可曉解。 此雖婦女, 不可仍置, 臣等已以發捕之意, 分付捕廳矣。” 時秀曰: “姜女之至妖至奸, 已無可論。 而非獨此也, 無論士族與閭巷, 凡有婦女之爲此者, 必多眞贓之現捉於文書, 不可不蕩盡無餘, 然後可無漸染滋蔓之憂。 不然, 則將不知至於何境矣。” 大王大妃敎曰: “玉堂旣陳疏, 故許令發捕, 而旣無眞贓之見捉, 李基讓, 則特爲白放好矣。” 煥之曰: “李基讓, 卽故相李德馨之後。 故相之於國家, 有大勳勞, 臣等亦豈不欲曲加容貸, 而第其結姻, 皆是邪魁, 亦嘗家畜存昌, 敎之文筆, 且前與昌顯親熟。 雖無見捉之贓, 遽然白放, 恐涉如何矣。” 大王大妃敎曰: “卿等所奏旣如是, 李基讓, 則更爲施威嚴問, 以爲議啓之地也。” 又敎曰: “臺論中大臣論勘之事, 有未及稟處者矣。” 煥之曰: “有之, 而大官體重, 不可以一二人所見, 遽然論斷, 必待三司公議。 而至於徐有防事, 章疏旣異於啓辭, 且其追奪, 似或過當。 金峙默事, 關係甚重, 啓發之後, 輿情洽然。 蔡濟恭, 則癸丑疏, 已是不敢言之事, 且況壬子凶疏, 旣皆現發, 則渠豈可獨無罪罰乎?” 秉模曰: “推鞫正法, 例爲待時, 而年前尹持忠、權尙然輩, 以焚主廢祭, 皆施不待時之律。今番諸囚,亦當不待時擧行矣。”大王大妃敎曰:“依此爲之。其中李存昌,下送本道,聚會民人後正法,以爲一道警懼之地也。”
순조 2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2월 26일(임신) 3번째기사
사학 죄인들을 추국하다. 이가환이 공초하다
사학 죄인(邪學罪人)들을 추국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이가환(李家煥)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생질(甥姪) 이승훈(李承薰)의 집에서 사학의 서책을 빌려왔는데, 거기에 신주(神主)를 세우지않고 제사를 지내지않는다는 말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칼로 긁어서 지워버리고, 다시는 가져다보지 않았습니다.”하였다.
국정(鞠庭)에서 반핵(盤覈)하는 즈음에, ‘흉얼(凶孼)과 체결하여 성세(聲勢)로서 서로 의지한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사학의 무리와 서로 체결한 것을 말한 것인데, 갑자기 공초하기를,
“홍낙임(洪樂任)의 하늘에 사무친 죄악을 일찍이 통분스럽게 여겨왔는데, 어찌 체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하며,
‘낙임(樂任)’ 두 자를 문목(問目) 외에서 털어놓았고, 또 말하기를,
“남간(南間)에 갇혀 있었을 때 문밖에서 전호(傳呼)하는 소리를 듣고 홍낙임이 이미 행형(行刑)되었음을 알았습니다.”하고,
끝에 가서 오석충(吳錫忠)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일찍이 홍가의 집에 출입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는 진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오석충과 면질시키기에 이르니, 오석충이 말하기를,
“과연 일찍이 홍낙임의 아우와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하였다.
그가 사학에 물든 자취를 한결같이 곧바로 발명(發明)하다가, 여러번 형신을 받은 후에야 마침내 사학의 괴수로서 지목된 것을 자백한 것으로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獄中)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권철신(權哲身)은 곧 권일신(權日身)의 형인데, 그 아우와 함께 사서(邪書)를 흠숭(欽崇)하여 삼혼 사행(三魂四行)에 대한 말을 매우 신봉하였다. 권일신이 벌을 받아 죽은 후에도 사학에 미혹되어 변개(變改)할 줄을 몰랐는데, 양근(楊根)한 지경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시켜 그릇되게 만드니, 그 무리가 진실로 번다하였다.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이승훈(李承薰)은 서장관(書狀官)인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중국에 간 다음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구경하다가, 서양인(西洋人)과 교유를 맺고 그가 증여한 서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사학(邪學)을 널리 배포하여 전염시켰는데, 조정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후에 이르러서는 분서(焚書)의 시와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겉으로는 혁면(革面)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고혹되어 항상 서양인과 서찰을 통하니, 인아(姻婭)와 족당(族黨)이 모두 그 해독을 받았다. 문서가 적발되고 죄악이 죄다 드러났는데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정약종(丁若鍾)은 한결같이 곧바로 사학을 정도(正道)라고 하며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을 만들어 놓고 7일마다 첨례(瞻禮)하며 이르기를, ‘천주는 대군(大君)이고 대부(大父)이다. 하늘을 섬길 줄 모르면 살아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하고 선조(先祖)에게 제사지내고 분묘(墳墓)에 배알(拜謁)하는 것은 모두 죄과(罪過)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 아비를 원수처럼 여기고 군상(君上)을 향해서도 망측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윤리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으므로, 범상부도(犯上不道)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필공(崔必恭)은 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에 곧 전염되었는데, 추조(秋曹)에서 추핵(推覈)하는 가운데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살 길을 구하는 계책을 내어 다시는 학습(學習)하지 않겠다고 공초를 바쳤으므로, 조정의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든다는 은택을 받아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어,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였으나 오히려 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추국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공초하기를, ‘이제 죽기로 결심하였다. 천주학은 식견이 있고 지각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를 해야 하니, 나는 결단코 개혁(改革)할 마음이 없다’하였다. 그래서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이존창(李存昌)은 본래 호서(湖西)의 관교(官校)로서 사학에 오염되었는데,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영옥(營獄)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공초를 바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포도수(逋逃藪)를 만들어 전혀 오염된데 대해 개철(改轍)하지 않은 채 무리를 불러 모아 반결(盤結)하고 호서의 거괴(巨魁)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押送)하여 정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죄인 홍교만(洪敎萬)은 사학의 서책과 야소(耶蘇)의 도상(圖像) 및 첨례 장구(瞻禮帳具) 등을 모두 그 집에 모아 놓고 망령되게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겉만 그럴 듯하게 꾸며 서학(西學)은 요사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형륙(刑戮)에 나아가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홍낙민(洪樂敏)은 벼슬이 법종(法從)에 이르렀는데도 사교(邪敎)에 물들었다. 처음에는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올렸으나, 마침내는 옛 소굴을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있어서 깊이 현혹시키고 교유(敎誘)하여 호남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였다. 그리고 야소(耶蘇)는 감히 꾸짖어 욕할 수 없다고 하고, 오늘날 형벌을 받는 것도 일찍이 전에 배교(背敎)했던 죄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미혹되어 뉘우칠 줄을 모르고 한 번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므로, 요서과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써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창현(崔昌顯)은 본래 위항(委巷)의 천인으로서 사학의 서책에 고혹되어 정약종·권철신 등을 대부(代父)로 존숭(尊崇)하고 이승훈·강노파를 교주(敎主)로 일컬었습니다. 마귀의 화상을 그려서 몰래 서로 선사하고 장구(帳具)를 꾸며서 암지(暗地)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며, 이단의 무리들을 숨겨 주고 간계(奸計)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형륙(刑戮)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결안(結案)을 써서 바쳤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인데, 당초에 사서(邪書)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일찍이 보고서 찬미하였으나 중간에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을 소장에 질언(質言)하였었다. 국청에 나아가기에 이르러서는 차마 형을 증인(證引)하지 못하였는데,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그 무리가 서로 왕복하는 즈음에 정약용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한 것과 평일(平日) 그 집안 사이에 금계(禁戒)한 것을 증험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최초로 물든 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지목한 바 되었으므로, 정약전·정약용은 차율(次律)로 감사(減死)하여 정약전은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에, 정약용은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하였다. 죄인 강녀 완숙(姜女完淑)은 곧 덕산(德山)의 사인(士人) 홍지영(洪志榮)의 처인데, 요서를 학습하여 사학의 여인 가운데 가장 간특한 자였으므로, 추조(秋曹)에 출부(出付)하여 구핵한 후에 작처(酌處)하게 하였다.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여러 번 이름이 국초에 나왔으나, 기미를 알고 도피하였으므로, 포청으로 하여금 염탐해서 체포하게 하였다.
○推鞫酌處邪學罪人。 罪人李家煥供以爲: “曾借邪學之書於甥侄李承薰之家, 見其有不立主不行祀之語, 不勝驚駭, 拔刀擦去, 更不取看” 云。 而鞫庭盤覈之際, 有 ‘締結凶孽聲勢相依’ 之問, 卽與邪學之類, 相爲締結之謂, 而忽供以: ‘洪樂任滔天之惡, 嘗所忿痛, 豈有締結之理’ 爲言, 吐出樂任二字於問目之外。 又言, ‘囚在南間時, 聞門外傳呼之聲, 而知樂任之已被行刑’ 云。 末乃援引以吳錫忠, ‘曾出入於洪家, 而渠則實不知’ 云。 至與錫忠面質, 而錫忠則, ‘果嘗與樂任之弟相熟’ 云。 渠之染邪之跡, 一直發明矣, 屢被刑訊之後, 竟以邪魁之目自服捧遲晩, 而物故於獄中。 罪人權哲身, 卽日身之兄, 而與其弟欽崇邪書, 酷信三魂四行之說。 及夫日身罪斃之後, 迷不知變, 致使楊根一境, 愚惑訛誤, 寔繁其徒。 捧遲晩, 而物故於獄中。 罪人李承薰, 隨其父東郁書狀官之行, 往遊北京之天主堂, 結交於西洋人, 得其所贈書冊而來, 廣布傳染, 及夫朝家禁令之後, 作焚書之詩、闢異之文, 外示革面, 內實蠱惑, 書札常通於洋人, 姻婭族黨, 咸被其毒。 文書現發, 罪惡畢露, 以妖書妖言, 傳用惑衆, 捧遲晩正法。 罪人丁若鍾, 一直以邪學謂正道, 作天主晝像, 間七日瞻禮以爲, ‘天主, 大君也, 大父也。 不知事天, 生不如死,’ 祭祖先拜墳墓, 皆謂以 ‘罪過。’ 甚至於謂父爲大仇, 向君上, 亦作罔測之說, 滅倫敗常, 莫此爲甚, 以犯上不道, 捧遲晩正法。 罪人崔必恭, 邪學東來之後, 卽爲傳染, 至入於秋曹推覈之中, 以求生之計, 以更不學習納供, 特蒙朝家人其人之澤, 差送審藥, 使之無妻而有妻, 無家而有家, 猶不悛改。 及今推鞫之日, 供以, ‘以死爲決。 天主之學, 有識有知覺者, 當爲之, 而渠則斷無改革之心’ 爲言。 以妖書妖言, 傳用惑衆, 捧遲晩正法。 罪人李存昌, 本以湖西官校, 染汚邪學, 與必恭同時逮捕。 至入營獄, 屢受刑訊, 以悔悟納供而見放, 一直爲藪於逋逃, 全不改轍於穢汚, 嘯聚盤結, 爲湖西之巨魁。 押送忠淸道, 正法曉衆。 罪人洪敎萬, 邪學書冊及耶蘇圖像瞻禮帳具, 都聚其家, 妄引經傳, 粧撰文飾, 稱厥學之非邪。 就刑戮而靡悔, 以妖書妖言, 傳用惑衆, 捧遲晩正法。 罪人洪樂敏, 官至法從, 身染邪敎。 始呈斥邪之書, 終有宿處之戀, 沈惑敎誘, 訛誤湖民。 謂耶蘇之不敢詬罵, 謂以今日受刑, 爲曾前叛敎之罪, 迷不知悟, 甘心一死, 以妖書妖言, 傳用惑衆, 捧遲晩正法。 罪人崔昌顯, 本以委巷之賤, 蠱惑邪學之書, 若鍾、哲身, 尊以代父, 承薰、姜婆, 稱以敎主。 繪魔像而潛相贈遺, 飾帳具而暗地拮据, 藏匿異類, 紹介奸圖。 自甘就戮, 書納結案, 以妖書妖言, 傳用惑衆, 捧遲晩正法。 罪人丁若銓、丁若鏞, 乃若鍾之兄與弟也, 當初邪書之東來, 未嘗不覽而稱好, 中歲自悟, 更不染汚之意, 質言於疏章。 及其就鞫也, 不忍證兄, 而若鍾文書中, 厥輩相與往復之際, 戒使若鏞知之, 平日之禁戒於家間可驗。 特因最初染汚, 爲世指目, 若銓、若鏞, 以次律減死, 定配若銓于康津縣薪智島, 若鏞于長鬐縣。 罪人姜女完淑, 卽德山士人洪志榮之妻, 而學習妖書, 邪學女人中最奸慝者也, 出付秋曹, 使之鉤覈後酌處。 罪人黃嗣永, 屢出鞫招, 而知幾逃躱, 令捕廳詗捕。
순조 3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5월 22일(정유) 7번째기사
포도청에서 사학죄인의 결안을 올리다
포도청에서 사학죄인(邪學罪人)을 형조(刑曹)에 옮겨 결안(結案)을 바쳤는데,
“죄인 강성(姜姓)의 노파 완숙(完淑)은 사서(邪書)를 배워서 오염되고 고혹되어 지아비 홍지영(洪志榮)에게 내쫓겼으나, 그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홍필주(洪弼周)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머물면서 주문모(周文謨)를 높이 받들어 갈륭파(葛隆巴)라는 호를 받았으며, 6년동안이나 숨겨두어서 추행(醜行)이 낭자하였으나, 그 도(道)는 본래 이와 같다는 이유때문에 더러운 줄을 알지못하였습니다. 황사영(黃嗣永)이 망명했을 때에는 그를 위해 주선하여 숨겨준 다음 그로 하여금 몸을 숨겨 피하게하고 스스로 사학의 괴수를 삼았으며, 남녀가 뒤섞여 밤낮으로 외며 학습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속여서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하여 한 세상을 미혹되게 하였습니다.
죄인 최인철(崔仁喆)은 사학을 정도(正道)로 여겨 신주(神主)를 태우고 제사를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며, 주가(周哥)를 높이 받들어 도당을 체결하고, 형륙(刑戮)을 달갑게여겨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인 김현우(金顯禹)는 사학에 차츰 빠져들어 주가 놈을 맞이해 놓고 흉상(凶像)을 걸고서 설법(設法)하고 예배를 보고, 요서(妖書)를 외면서 남녀가 뒤섞여 거처하였습니다.
죄인 고광성(高光晟)은 사서에 고혹되어 밤낮으로 외어 학습하며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철폐하였으니,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됩니다.
죄인 이국승(李國昇)은 주가 놈을 신부(神父)로 섬기며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10년동안 고혹된 마음은 도거(刀鋸)에도 고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죄인 김녀 연이(連伊)는 중간에서 사학을 매개(媒介)하는 노파로서,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평민을 유혹해 그릇되게 하였고, 강파(姜婆)와 서로 체결하여 주가 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망명한 황사영을 집안에 숨겨 두어 마침내 도피하도록 하였습니다. 죄인 강녀(姜女) 경복(景福)은 폐궁(廢宮)의 나인(內人)으로 강파의 집에 왕래하면서 주문모에게서 호를 받았는데, 선아(仙娥)라고 일컬었습니다. 죄인 한녀(韓女)신애(新愛)는 몸이 사학에 빠진지 이미 여러해가 되어 강파를 추종하면서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요서(妖書)·요화(妖畵)를 집안에 숨겨 묻어 두었습니다. 죄인 이현(李鉉)은 본래 희영(喜英)의 조카로서, 강파의 아들이 그의 동서(同婿)가 되는데, 사학에 차츰 빠져들어 그 악행(惡行)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죄인 홍정호(洪正浩)는 강파의 집에 왕래하면서 설법(設法)의 모임에서 사학을 강하였으며, 많은 요서(妖書)와 흉서(凶書)를 정원 안에 숨겨 묻어 두었다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죄인 윤녀(尹女)점혜(占惠)는 본래 양반의 서얼 처녀로서, 과부라고 거짓 일컬어 강파에게 종적을 의탁하고, 주가 놈의 손에 세례를 받았는데, 아가대(亞佳大)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죄인 여인영인(榮仁)은 본래 물러난 궁인(宮人)으로서, 완숙과 체결하여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비비아라(非非阿羅)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죄인 여인 순매(順每)는 동녀(童女)로서, 허성(許姓)의 처라고 거짓 일컫고는 남매가 사교(邪敎)에 함께 고혹되어 주가 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발발아(發發娥)라고 호를 지었습니다”하였으므로, 모두 정법(正法)하게 하고, 고광성·이국승·윤점혜·순매는 원적(原籍)의 관아로 압송하여 정법하게 하였다.
○捕廳邪學罪人移刑曹捧結案, 罪人姜婆完淑, 學得邪書, 染汚蠱惑, 見逐於乃夫洪志榮, 亦不知戢。 率子弼周, 來留京洛, 崇奉周文謨, 受號以葛隆巴, 六年匿置, 醜行狼藉, 以其道本如此之故, 不知爲穢。 黃嗣永之逃命也, 爲之周旋隱匿, 使其藏身避躱, 自作邪魁, 男女雜遝, 日夜誦習, 到處詿誤, 誑惑一世。 罪人崔仁喆, 以邪學爲正道, 至於焚神主廢祭祀, 崇奉周哥, 締結徒黨, 甘心刑戮, 至死不變。 罪人金顯禹, 浸溺邪學, 邀致周漢, 掛凶像而設法瞻禮, 誦妖書而男女混處。 罪人高光晟, 蠱惑邪書, 晝夜誦習, 埋主廢祭, 罪關綱常。 罪人李國昇, 事周漢以神父, 不參家祭, 十年蠱惑之心, 謂難革於刀鋸。 罪人金女連伊, 渠以邪學中媒婆, 周流各處, 誘誤平民, 締結姜婆, 受洗於周漢, 亡命之黃嗣永, 匿置家中, 竟致逃躱。 罪人姜女景福, 以廢宮內人, 往來姜婆之家, 受號於周文謨, 稱以仙娥。 罪人韓女新愛, 身陷邪學, 已多年所, 追遊姜婆, 受洗於周漢, 妖書、妖畫, 匿埋家中。 罪人李鉉, 本以喜英之侄, 姜婆之子, 爲其友壻, 浸溺邪學, 同濟其惡。 罪人洪正浩, 往來於姜婆之家, 講邪於設法之會, 許多妖凶之書, 匿埋園中, 至於見捉。 罪人尹女占惠, 本以班孽處女, 假稱寡女, 托跡姜婆, 受洗於周漢之手, 以亞佳大作號。 罪人女人榮仁, 本以退出宮人, 締結完淑, 受洗周漢, 以非非阿羅作號。罪人女人順每,以童女,詐稱許姓之妻,男妹同惑邪敎, 受洗周漢,以發發娥作號。竝正法。光晟、國昇、占惠、順每,押送原籍官,正法。
순조 3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7월 13일(정해) 5번째기사
형조에서 사학 죄인 김종교등에 관해 아뢰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사학죄인(邪學罪人) 김종교(金宗敎)는 사교(邪敎)를 강습한 지 이미 여러해가 되었습니다.
갑인년566)에 포청(捕廳)에 붙잡히게 되었는데, 감화(感化)하는 뜻으로 공초(供招)를 받고 방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옛 습성을 고치지 않고는 주문모(周文謨)를 찾아가서 세례(洗禮)를 받고 호(號)를 받았으므로, 엄히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조금도 뉘우치고 깨닫는 뜻이 없습니다. 죄인 홍필주(洪弼周)는 곧 강파(姜婆) 완숙(完淑)의 아들로서, 그의 어미가 사교에 몹시 빠져서 그 지아비에게 쫓겨나게 되자, 홍필주는 아비를 배반하고 어미를 따라서 미혹시키는 데에 점점 물들어 그 어미가 주문모를 맞아들여 6, 7년을 한집에서 동거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양학(洋學)의 예사로운 일로 인정하여 보통으로 보아 넘기고 미혹함을 굳게 지켜 돌이키지 않으므로 세상의 지목이 되었으니, 아울러 지만(遲晩)을 받아서 정법(正法)하소서.
호서(湖西)의 김정득(金丁得)·김광옥(金廣玉)등과 호남(湖南)의 한정흠(韓正欽)·최여겸(崔汝謙)·노복 천애(千愛)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하고 독실하게 믿으며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十誡命)은 버리기 곤란하고 한번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지만을 받은 뒤 각각 해도(該道)로 압송(押送)하여 정법하소서.”하였다.
註566]갑인년: 1794 정조 18년.
○刑曹啓言: “邪學罪人金宗敎, 講習邪敎, 已多年所。 而甲寅被逮於捕廳, 以感化之意, 納招蒙放矣。 不悛舊習, 尋訪周文謨, 受洗受號, 嚴加刑訊, 少無悔悟之意。 罪人洪弼周, 卽姜婆完淑之子, 而厥母沈惑邪敎, 被逐於夫, 弼周背父隨母, 浸染蠱惑, 目見厥母邀致周文謨, 與之六七年同居一室, 認以洋學之例事, 尋常看過, 執迷不返, 爲世指目, 竝捧遲晩正法。 湖西之金丁得、金廣玉等, 湖南之韓正欽、崔汝謙、奴千愛等, 譸張詿誤, 篤信隷習, 謂以難捨十戒, 甘受一死, 竝捧遲晩後, 押送各該道, 正法。”
순조 3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10월 27일(경오) 3번째기사
이만수의 토사주문
토사주문(討邪奏文)에 이르기를,
“삼가 주달(奏達)합니다.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사적(邪賊)이 난(亂)을 선동하였기에, 주토(誅討)한 전후 사실을 일일이 진달하게 되어 황람(皇覽)을 우러러 더럽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은사(殷師)626)가 동방에 옴으로부터 예의(禮義)와 충순(忠順)으로써 중국 조정에 칭송을 받았었고 나라의 풍속이 유술(儒術)을 몹시 숭상하게 되어 진신(搢紳)과 위포(韋布)627) 가 수사낙민(洙泗洛閩)628)의 글이 아니면 일찍이 전신(傳信)하여 강습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어린애라도 모두 능히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이 일상적인 행동의 도(道)가 되는 것을 알았으니, 좌도 이단(左道異端)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듣지를 못했었는데, 갑자기 수십 년 사이에 일종의 흉추(凶醜)와 도둑 떼들이 서양(西洋)의 학(學)을 제창하여 하늘과 성인(聖人)을 업신여기고 군부(君父)를 배반해 멸시하여 그 제례(祭禮)를 폐지하고 그 사판(祠版)을 훼철하였습니다. 당옥(堂獄)의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혹시키고 영세(領洗)의 법으로써 흉당을 불러 모아, 사서(私書)를 몰래 감추기를 부참(符讖)의 술법과 같이 하고 여류(女流)를 널리 결탁하여 금독(禽犢)의 행동이 있었으며, 혹은 신부(神父)라 말하고 혹은 교우(敎友)라 일컬으면서 성명(姓名)을 변경하여 바꾸어 각기 표호(標號)를 세운 것이 황건적(黃巾賊)·백련교(白蓮敎)의 난과 같았는데, 몰래 서로 물색하고 공·사(公私)로 선동하여 안으로 국도(國都)로부터 밖으로 충청·전라의 여러 도(道)에 이르기까지 그 말이 점점 치성하고 그 도당(徒黨)이 이에 번창하므로, 선신(先臣) 공선왕(恭宣王)629)께서 그 기미(幾微)를 통찰하고 금방(禁防)을 엄히 더하여 건륭(乾隆) 신해년630)에 윤지충(尹持忠)·윤상연(尹尙然) 등이 제례를 폐지하고 사판을 훼철한 사건이 발생되어 곧바로 피주(被誅)되었습니다. 작년에 미쳐 나라에 상화(喪禍)가 있어 신이 어린 나이에 습봉(襲封)하여 모든 일을 처음 시작하였는데, 사당(邪黨) 등이 차마 이때를 틈탈 만하다생각하고는 서울과 지방에서 같은 행동을 마주 취하고 더욱 서로 체결하여서 끝없이 넓고 불꽃처럼 성하여 날로 점점 불어나고 널리 퍼지므로, 본년 3월에 한성부(漢城府)에서 사당이 왕복한 서찰과 사서(邪書)를 규명해 얻어서 고해 왔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비로소 국문하여 핵실(覈實)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의금부·사헌부·사간원의 여러 신하들이 회좌(會坐)하여 추문(推問)하게 하였더니, 이 서찰은 실로 사당에 관계된 것으로서 정약종(丁若鍾)이 짓고 모은 것이었습니다.
정약종이 공초(供招)하기를, ‘맨처음에 이벽(李蘖)이 서양학(西洋學)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승훈(李承熏)이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의 공사(貢使) 행차에 따라가도록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 양인(洋人)이 거처하는 천주당(天主堂)에 들어가 양인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양서(洋書)를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이벽 및 저의 형제인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등으로 더불어 함께 강독하여 사법(師法)을 삼고는 마침내 부모(父母)를 버리고 도당을 체결해서 이 학술로 온 나라의 풍속을 변역시키려고 생각하다가 나라의 금법(禁法)이 거듭 엄중하기에 미쳐 원한을 품고 비방하였으니, 모역(謀逆)한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벽은 이보다 앞서 이미 죽었고, 정약전·정약용·이승훈·이가환의 공초도 정약종과 더불어 같았는데, 이가환은 약간 문예(文藝)가 있어서 관직(官職)이 2품을 겪었으므로 가장 사당의 추복(推服)한 바가 되었으며,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 홍낙민(洪樂敏)·김건순(金建淳)·김백순(金伯淳)·최창현(崔昌顯)·이희영(李喜英)·홍필주(洪弼周)·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 등을 차례로 체포 국문하여 핵실하니, 모두 정약종 무리의 혈당(血黨)에 관계하였다고 일일이 자복하였습니다.
이 밖에 사족(士族)의 천얼(賤孼)과 시정(市井)의 편호(編戶)가 뱀과 지렁이같이 서려서 얽힌 것이 거의 수백 인이 넘었으며, 여류로서 거기에 빠진 자는 홍필주의 어미 강완숙(姜完淑)이 그들의 괴수가 되었는데, 최후에 핵실하여 알았던 일이지만 사당에서 신부(神父)라고 일컫는 바 주문모(周文謨)란 자를 강완숙의 집에 숨기고는 성명과 거주지를 묻는데에 따라 어지럽게 변경하여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게 속이고 간사한 그 형상이 수없이 많으므로 누차 고문(拷問)을 더하였으나, 죽기를 작정하고 버티어 굳세게 숨겼습니다. 그런데 사당의 배포(排布)하고 화응(和應)한 것이 주문모로서 귀결되지 않은 것이 없어 거개가 주문모를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니, 그 기세를 돌아보건대, 호흡(呼吸)하는 동안에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의 걱정이 달려 있어서 악(惡)의 뿌리를 제거하는 데에 일을 늦추어서는 안되겠기에, 주문모·정약종·이승훈·홍낙민·김건순·김백순·최창현·이희영·강완숙·홍필주·최필공·이존창은 정법(正法)하였고, 이가환은 장폐(杖斃)하였으며, 정약전·정약용 및 연루[株連]된 여러 사당은 등급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결하였습니다.
바야흐로 그 여러 역적들을 자세히 캐어물을 즈음에 사당 황사영이란 자가 기미를 알고서 도망하여 숨었었는데, 10월에 비로소 염탐하여 체포하였습니다. 황사영이 공초하기를, ‘이승훈이 양학(洋學)을 가서 받아온 후로부터 여러 역적들이 김유산(金有山)·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등을 모집하여 늘 조경(朝京)의 사행(使行)으로 인하여 양서를 전달한 양인에게서 사술(邪術)과 방략(方略)을 몰래 받았습니다. 을묘년631) 봄에 장식하고 온 이른바 주문모라는 자와 변경(邊境)에 약속해 모이어 역부(驛夫)로 변장하고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출발하여 국도(國都)에 엿보아 들어왔는데, 여러해를 숨겨두고 저희들의 우두머리를 삼았습니다. 주문모는 실은 〈중국〉강남성(江南省)의 소주부(蘇州府)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가 가리고 있는 문자(文字)를 수색하여 조사해보니 하나의 백서(帛書)가 있었는데, 황심·옥천희와 약속하여 옷솔기에 감추고서 양인에게 은밀히 전하려 하다가 결국 실행하지못하고 붙잡히게 되었으며, 백서를 통한 사람의 이름자를 다묵(多默)등이라고 일컬었는데, 다묵이란 곧 황심의 표호였습니다. 백서의 가운데에 두 조항의 흉계(凶計)로써 양인에게 구원을 청하여 장차 소방(小邦)을 뒤집어엎으려고 하였는데, 그 하나는 태서(泰西)632)의 여러 나라에 전하여 알려서 선박(船舶) 수백척으로 정병(精兵) 5, 6만과 화포(火砲)등 이해(利害)되는 병기(兵器)를 많이 싣고 오도록 청하여 직접 바닷가에 다다라 이 나라를 진멸하려 하였고, 그 하나는 교인(敎人)중의 한 사람을 꾸며 보내어 집을 옮겨가면서 책문(柵門)안에 점포(店鋪)를 개설하고는 저들과 서신(書信)을 교통하고 모의(謀議)를 지휘할 계제(階梯)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김유산·황심·옥천희의 공사(供辭)도 같은 종속이었고, 또 사당의 유항검(柳恒儉)·윤지헌(尹持憲)등의 공사에도 역시 서양의 선박을 오도록 청하여 한바탕 죄다 죽이고 결판을 벌리려는 계획이 있었다하였으며, 이가환등이 각각 은화(銀貨)를 내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했던 것은 황사영의 공사와 꼭 맞았습니다. 아! 서양의 나라가 소방과는 본래 은혜나 원한이 없었으니, 상리(常理)를 미루어 보더라도 어찌 10만리 해로(海路)를 항해하여 소방을 위태롭게 모의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저 역적들이 형세가 위급하게 된 짐승의 아주 먼 궁벽한 곳에 의지하여 붙으려하는 것같은데에 인연하여 이에 바다를 건너 도적을 불러들이고 문을 열어 나라를 바칠 계획을 만들어 냈으니, 신과 온 나라의 신민(臣民)은 늠연하게 놀래고 분개하여 가슴과 뼈가 함께 떨립니다.
황사영·유항검·윤지헌·김유산·황심·옥천희는 모두 곧 정형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소방이 궁벽하게 바다의 한 모퉁에 처하였는데, 황은(皇恩)을 두텁게 입어 해마다 상공(常貢)을 집행하기를 스스로 내복(內服)633)과 같이 하여 무릇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사신을 보내어 급히 상주(上奏)함을 빠짐없이 행했던 것은 실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전에 없었던 역변(逆變)을 신속하게 소탕하여 거의 위태로웠던 국세(國勢)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황령(皇靈)이 미친 바가 아님이 없겠기에, 도리에 있어 사유를 갖추어 진문(陳聞)하는 것이 합당하였습니다. 또 더군다나 사당의 괴수는 비록 이미 제거되었다하더라도 여얼(餘孼)은 더러 아마도 숨어서 빠져 바야흐로 닥칠 걱정이 그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 뒤로 혹시 사적(邪賊)과 도당(徒黨)이 변문(邊門)에 몰래 들어간 자가 해당 관사(官司)에 목숨을 구걸하는 자가 있을 때는 빨리 붙잡아서 돌려보내 주신다면 거의 황위(皇威)를 우러러 의뢰하여 번복(藩服)에서 안정되게 살 수 있겠기에, 감히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큰 사정(私情)을 믿고서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 보잘것없는 정성을 함부로 진주(陳奏)하게 되니, 참외(僭猥)함이 너무 심하여 긍황(兢惶)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주문모의 일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체포하여 국문할 때에 의복·언어·용상(容狀)이 본국 사람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으므로 단지 사당의 거괴(巨魁)로만 인정하고 아울러 방형(邦刑)을 시행하였는데, 지금 황사영의 공사에서도 오히려 의신(疑信)을 정하지 못하고 진가(眞假)를 헤아릴 수 없는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중국 사람이란 말이 이미 역적의 공사에서 나왔으니, 그 말의 허실(虛實)을 논할 것 없이 소방에서 제후의 법도를 정성껏 지키는 도리에 있어서 감히 명확하게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은 비록 번독(煩瀆)하나 정성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간절하여 북쪽으로 운천(雲天)을 바라보매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소방이 불행하여 사적이 난동을 일으킨 데 연계해서 주토(誅討)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과를 낱낱이 진주하니 황람(皇覽)을 우러러 더럽히게 되었으나, 사리(事理)가 이러하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하였다.【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다.】
註626]은사(殷師): 기자(箕子)를 이름.註627]위포(韋布): 위대(韋帶)와 포의(布衣). 곧 빈천한 사람.註628]수사낙민(洙泗洛閩): 수사는 공자와 맹자가 제자들에게 도를 가르치던 곳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곧 공자와 맹자를 뜻하는 것. 낙민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가 살던 낙양(洛陽)과 주희(朱熹)가 살던 민중(閩中)을 말한 것.註629]공선왕(恭宣王): 정조.註630]신해년: 1791 정조 15년.註631]을묘년: 1795 정조 19년. 註632]태서(泰西): 서양(西洋).註633]내복(內服): 천하를 오복(五服)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요복(要服)이내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과 똑같이 여겼다는 뜻.
○討邪奏文:謹奏。 爲小邦不幸, 邪賊煽亂, 歷陳誅討顚末, 仰塵皇覽事。 竊以小邦自殷師東來, 以禮義忠順, 見稱中朝, 而國俗敦尙儒術, 搢紳韋布, 非洙、泗、洛、閩之書, 未嘗傳信而講習, 雖閭巷婦孺, 皆能知五倫、三綱之爲日用常行之道, 至於左道異端, 初未之聞焉。 忽於數十年間, 一種匈醜匪類, 倡爲西洋之學, 慢天侮聖, 背君蔑父, 廢其祭禮, 毁其祠版。 以堂獄之說, 誑惑愚氓, 以領洗之法, 嘯聚凶黨, 潛藏私書, 則同符讖之術, 廣結女流, 而有禽犢之行。 或曰神父, 或稱敎友, 變換姓名, 各立標號, 如黃巾、白蓮之賊。 而暗相物色, 公私煽動, 內自國都, 外至忠淸、全羅諸道, 其說轉熾, 其徒寔繁, 先臣恭宣王, 洞察其機, 嚴加禁防, 乾隆辛亥, 尹持忠、權尙然等, 廢祭毁祠, 事發旋卽被誅。 及昨年國有喪禍, 臣沖年襲封, 庶事草創, 邪黨等, 忍謂此時可乘, 京外響應, 益相締結, 漫漫炎炎, 日漸滋蔓。 本年三月, 漢城府紏得邪黨往復書札及邪書以告, 據此始行鞫覈。 着議政大臣與義禁府、司憲府、司諫院諸臣, 會坐推問, 伊書實係邪黨丁若鍾所著所鳩。 若鍾供, ‘原初, 李蘖聞有西洋學, 裝送李承薰, 隨其父東郁貢使之行, 入往洋人所居之堂, 與洋人結識, 購得洋書以歸。 與李蘖及伊之兄弟若銓、若鏞、李家煥等, 同與講讀師法, 遂乃棄父母結徒黨, 思以是術, 易一國之俗。 及夫邦禁申嚴, 怨懟詬罵, 謀逆是實。’ 蘖前此已死, 若銓、若鏞、承薰、家煥供, 與若鍾同, 而家煥薄有文藝, 官經二品, 最爲邪黨之所推服, 承薰之購來邪書, 諺翻而廣傳, 家煥實主之。 洪樂敏、金建淳、金伯淳、崔昌顯、李喜英、洪弼周、崔必恭、李存昌等, 次弟逮覈, 皆係若鍾輩血黨, 一一輸款。 外此士族賤孽、市井編戶之蛇盤蚓結, 殆過數百人, 而女流沈溺者, 洪弼周之母姜完淑爲其魁, 最後覈得邪黨, 所稱神父之周文謨者, 窩藏於姜完淑家, 姓名居住, 隨問變亂, 怳惚詭慝, 千百其狀, 屢加(栲)〔拷〕訊, 抵死牢諱。 而邪黨之排布和應, 無不以文謨爲歸, 擧欲爲文謨一死, 顧其勢, 有呼吸存亡之虞, 除惡祛本, 事不容緩, 周文謨、丁若鍾、李承薰、洪樂敏、金建淳、金伯淳、崔昌顯、李喜英、姜完淑、洪弼周、崔必恭、李存昌正法, 李家煥杖斃, 丁若銓、丁若鏞及株連諸黨, 分等酌決。 方其諸賊之盤覈也。 有邪黨黃嗣永者, 知機逃匿, 十月始詗捕。 嗣永供, ‘自李承薰往受洋學之後, 諸賊募得金有山、黃沁、玉千禧等, 每因朝京使行, 傳書洋人, 潛受邪術方略。 乙卯春, 粧來所謂周文謨者, 約會邊境, 扮作驛夫, 晝伏夜行, 闖入國都, 多年匿置, 作爲伊等之渠帥。 文謨, 實江南省蘇州府人’ 云。 又搜驗其夾持文字, 有一帛書, 約黃沁、玉千禧, 藏之衣縫, 密傳洋人, 未果行而被捉, 通書人名字, 稱以多默等, 多默, 卽黃沁之標號也。 書中以二條凶計, 乞援於洋人, 將欲傾覆小邦, 其一曰, ‘轉報泰西諸國, 請來海舶數百艘, 精兵五六萬, 多載火砲等利害兵器, 直抵海濱, 殄滅此邦。’ 其一曰, ‘粧送敎中一人, 移家開舖於柵門之內, 要作伊等交通書信, 指畫謀議之階。’ 金有山、黃沁、玉千禧供同屬。 又邪黨柳恒儉、尹持憲等供, 亦有請來洋舶, 一場鏖決之計, 而李家煥等, 各出銀貨, 潛圖不軌, 與嗣永供脗合。 噫! 西洋之國, 與小邦, 本無恩怨, 推諸常理, 豈有航十萬里海, 謀危小邦之心? 而只緣伊賊等勢急困獸, 依附涯角, 乃生此越海招寇, 開門獻國之計, 臣與一邦臣民, 懍然驚憤, 心骨俱顫。 黃嗣永、柳恒儉、尹持憲、金有山、黃沁、玉千禧, 竝卽正刑。 第伏念小邦僻處海隅, 厚沐皇恩, 歲執常貢, 自同內服, 凡國有大事, 悉行專价馳奏, 實出至誠事大之義。 況今無前之逆變迅掃, 幾危之國勢復安, 莫非皇靈攸曁, 理合具由陳聞。 又況邪魁, 雖已鋤除, 餘孽或恐隱漏, 方來之慮, 難保其必無。 嗣後或有邪賊徒黨, 潛入邊門者, 乞命所司, 亟賜拿還, 則庶可以仰藉皇威, 奠安藩服。 敢恃字小之洪私, 冒陳先事之微懇, 僭猥之極, 不勝兢惶。 至若周文謨事, 自初逮問時, 衣服、言語、容狀, 與本國人, 無少差殊, 只認以邪黨巨魁, 幷施邦刑, 今於黃嗣永之供, 猶不無疑信, 未定眞假莫測之慮, 而上國人之說, 旣發賊供, 則勿論其言之虛實, 在小邦恪守侯度之道, 不敢不劃卽上聞。 語雖煩瀆, 誠切披露, 北望雲天, 隕越于下。 緣係小邦不幸, 邪賊煽亂, 歷陳誅討顚末, 仰塵皇覽事理, 爲此謹具奏聞。【大提學李晩秀製。】
순조 3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11월 5일(무인) 2번째기사
사학죄인을 추국하여 작처하다
사학죄인(邪學罪人)을 추국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본래 정약종(丁若鍾)의 질서(姪婿)로 사술(邪術)에 미혹되어 빠져 들어가 주문모(周文謨)가 나온 뒤에 스승으로 섬기고 아비라고 불렀으며, 영세(領洗)를 받고 명호(名號)를 받았었다.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기미를 알고 망명(亡命)하여 산협(山峽)에 숨어서 불궤(不軌)를 도모하였으며,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와 함께 난만하게 화응(和應)하여 백서(帛書)를 써서 내어 장차 양인(洋人)의 천주당(天主堂)에 전하려 하였는데, 백서 가운데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었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었으므로, 위를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과 국가와 더불어 원수가 되려는 계획을 한 것 아님이 없었기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로써 결안(結案)하였다.
죄인 옥천희는 본래 선천(宣川) 사람으로 해마다 절사(節使)를 따라 왕래하면서 황사영·황심·현계흠(玄啓欽)의 무리와 체결하고 여러번 서찰(書札)을 전하여 천주당에서 우두머리로 있는 탕아립산(湯亞立山)이란 자로부터 세례(洗禮)와 명호를 받았으며, 주문모를 강완숙(姜完淑)의 집에서 찾아보고 토서(討書)를 양인에게 전달하여 그의 답장을 받아 장차 돌아와서 주문모에게 전하려 하다가 만부(灣府)644)에 도착하여 사당(邪黨)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도로 피중(彼中)에 들어가 국내의 사정을 전부 전하였다. 황사영의 무리들이 해박(海舶)을 오도록 청하여 사술(邪術)을 널리 펴려한 계획을 난만하게 참견하여 들었기에 지정불고(知情不告) 죄로써 결안하였다. 죄인 현계흠은 황사영·최창현(崔昌顯)·강완숙 등 여러 사람에게 서로 주무하고 관통(關通)하여 주문모가 나온 뒤에 세례를 받고 명호를 받았다.
당초에 사당이 옥(獄)에 갇히게 되자 기미를 알고서 도피하였는데, 스스로 면하기가 어려울 것을 알고는 돌아서 바로 자수하기를 다시는 더러운데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으로써 공초(供招)를 바쳐 방면(放免)받게 되었었다. 황사영이 체포되기에 미쳐 정절(情節)이 더 드러났는데, 사당이 서양 선박을 오도록 청할 때에 함께 난만하게 참섭하여 밤낮으로 그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이국(異國)의 선박이 동래(東萊)에 표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세히 가 보고서 십자(十字)를 그리어 보였으니, 이는 사교(邪敎)들 사이에 서로 탐문하는 방법으로 이로써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였다. 주문모의 문적(文蹟)과 황사영의 흉서(凶書)가 나타나기에 이르러 모두 동래에서 탐문한 선박으로써 동일한 화본(話本)을 만들어 낭자하게 터무니없이 속이고 바꾸어 가면서 서로 빚어내었기에 지정불고 죄로써 결안하여 아울러 정법(正法)하였다.
거제부(巨濟府)에 정배(定配)한 죄인 이치훈(李致薰), 신지도(薪智島)에 정배한 죄인 정약전(丁若銓),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한 죄인 정약용(丁若鏞), 능주목(綾州牧)에 정배한 이학규(李學逵), 운봉현(雲峯縣)에 정배한 죄인 신여권(申與權)·죄인 이관기(李寬基)에게는 모두 국초할 것을 발론하여 아울러 다시 붙잡아다 형신(刑訊)하였으나 별로 정범(情犯)을 더 구핵(究覈)할 것이 없었으므로, 모두 작처(酌處)하여 이치훈은 제주목(濟州牧)에, 정약전은 나주목(羅州牧)의 흑산도(黑山島)에, 정약용은 강진현(康津縣)에, 이학규는 김해부(金海府)에, 신여권은 고성현(固城縣)에, 이관기는 장흥부(長興府)에 찬배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추국을 철파하라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가며 상소하여 작처 찬배하라는 명을 정침하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註644]만부(灣府): 의주(義州).
○推鞫酌處邪學罪人。 罪人黃嗣永, 本以丁若鍾之侄壻, 惑溺邪術, 周文謨出來之後, 師事而父號, 領洗而受名。 逮捕之下, 知機亡命, 竄伏山峽, 潛圖不軌, 與黃沁、玉千禧, 爛漫和應, 寫出帛書, 將傳洋人之堂, 書中所言, 字字凶肚, 句句逆腸, 無非向上不道之說, 與國爲讎之計, 以大逆不道結案。 罪人玉千禧, 本以宣川人, 每歲隨節使往來, 而締結黃嗣永、黃沁、玄啓欽之徒, 屢度傳書, 受洗受名於天主堂居接之湯姓名亞立山者, 訪見周文謨於姜完淑之家, 討書傳于洋人, 受其答, 而將欲歸傳文謨, 到灣聞邪黨就捕, 還入彼中, 備傳國事。 嗣永輩請來海舶, 廣布邪術之計, 爛漫參聞, 以知情不告結案。 罪人玄啓欽, 綢繆關通於嗣永、昌顯、完淑等諸人, 周文謨出來之後, 受洗受號。 而當初邪黨就獄, 知機逃躱, 自知難免, 旋卽自現, 以更不染汚之意, 納招蒙放。 及夫嗣永就捕, 而情節益著, 邪黨之請來洋舶, 爛漫參涉, 日夜佇企其出來矣, 聞異國船之漂舶東萊, 委往見之, 畫示十字, 乃是邪敎中相探之法, 而以此辨其眞贗。 至發於周漢之文蹟、嗣永之凶書, 皆以東萊探船, 作一話本, 狼藉譸張, 轉相醞釀, 以知情不告結案, 幷正法。 巨濟府定配罪人李致薰、薪智島定配罪人丁若銓、長鬐縣定配罪人丁若鏞、綾州牧定配罪人李學逵、雲峯縣定配罪人申與權ㆍ罪人李寬基, 俱發鞫招, 竝更拿訊, 別無情犯之有如究覈, 命竝酌處, 配致薰于濟州牧, 若銓于羅州牧黑山島, 若鏞于康津縣, 學逵于金海府, 與權于固城縣, 寬基于長興府, 仍命撤罷推鞫。 三司交章請寢酌配之命, 不從。
순조 3권, 1년(1801 신유/청가경(嘉慶) 6년) 12월 22일(갑자) 1번째기사
사학을 토죄하고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다. 반교문
사학(邪學)을 토죄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다.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우리 황천(皇天)과 열성조(列聖祖)께서 나라를 묵묵히 도우시어 지난번 원악(元惡)과 거괴(巨魁)가 빨리 전헌(典憲)에 복주(伏誅)되었으므로, 공경히 종사(宗社)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영령(英靈)에 고유하고 크게 경사대부(卿士大夫)와 서민에게 유시하노니, 이는 팔역(八域)에서 경사를 함께하는 아름다움이고 만대(萬代)까지 변치않는 이륜(彝倫)의 차서이다.
생각건대, 우리 강토(疆土) 수천리 지방에 승평(昇平)한 세월이 4백년동안 내려왔다.
그 백성은 사(士)·농(農)·공(工)·상(商)이었고, 그 글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이었다.
읽어서 본받았던 것은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공자(孔子)·맹자(孟子)·주염계(周㾾溪)·정자(程子)의 교훈이었고, 닦아서 밝혔던 것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인륜이었다. 대개 우리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이남(二南)675)의 덕화(德化)가 흥기되어 삼물(三物)676)의 교육이 진작되었고 또한 여러 현인(賢人)들이 쏟아져 나와 육경(六經)677)의 뜻을 천명하여 많은 성인(聖人)의 마음이 전수되었다. 위대하신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24년동안 빛나게 임어(臨御)하시어 한결같이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시어, 선비를 존숭하고 도(道)를 소중히 여겨 주부자(朱夫子)의 전서(全書)를 표창하였으며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쳐 노(魯)나라 《춘추(春秋)》의 대통(大統)을 환하게 게양하였다.
온 나라가 효(孝)를 일으킨 것은 몸소 실천하여 마음으로 체득한 나머지를 미루어 준 것이고 사해(四海)가 인(仁)으로 돌아간 것은 교화를 거쳐 정신을 갖게 한 묘훈(妙訓)이 있었던 것인데, 극변 서방(西方) 세계의 음침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소중화(小中華)인 예의(禮義)의 나라에 느닷없이 불쑥 들어오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감히 크게 청명한 시대를 더럽히고자 하여 섬기는 것이 뱀의 신(神)이고 소의 귀신이며 거의 반 세상을 속이어 미혹시켜 그의 말은 지옥(地獄)과 천당(天堂)에 대한 것이었다. 신부(神父)와 교주(敎主)를 일컬어 높이 받들기를 제 조상의 신주(神主)보다 지나치고 십계명(十誡命)과 칠극(七克)의 조목은 허망함이 참부(讖符)와 유사하였다.
살기를 즐거워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심정인데도 형벌[刀鋸] 보기를 깔고 자는 요와 같이 여기고 조상의 지나간 일을 생각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은 천륜(天倫)의 이치인데도 증상(烝嘗)678)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니, 거만한 듯한 귀신은 굶주리지 않고 음란한 말은 또한 추악하도다. 폐고(廢錮)된 족속과 서얼로 국가를 원망하고 뜻을 잃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결탁하고는 성세(聲勢)를 의뢰하고 당원(黨援)을 부식하였으며, 시정(市井)의 거간꾼과 농부·직녀(織女)의 부류까지 불러 모아들이어 명분(名分)을 혼란시키고 풍교(風敎)를 더럽혔었다. 혹은 두어 글자의 수수께끼로 각각 표명(標名)을 세우고 혹은 반폭의 사특한 그림으로 몰래 소굴을 장식하였으며, 혹은 깊은 밤 비밀한 방안에서 머리를 모아 강독하여 외고 혹은 대낮에 큰 도시의 왕래하는 곳에서 소리 높여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백년 뒤에는 오랑캐가 될 것을 알고 있으니 거의 이천(伊川)에서 어떤 자가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제사지내는 것679)보다 심하고 진실로 하루 만에 변이 있었으니, 어찌 황지(潢池)680)에서 도적이 병기(兵器)를 희롱하는 것뿐이겠는가?
이승훈(李承薰)은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을 따라가서 사학(邪學)의 서적을 구입해 왔고 양인(洋人)의 천주당에 들어가서 이상한 무리들을 스승으로 섬겼다.
정약종(丁若鍾)의 온 가족이 모두 감염되어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고, 권철신(權哲身)의 온 고장이 다 미혹되었는데 모두가 그의 인척(姻戚)들이었다. 최창현(崔昌顯)은 역적 옥천희(玉千禧)의 여얼(餘孼)로 가장 불법(佛法)을 충실히 지키는 사문(沙門)과 같이 일컬어졌고, 홍낙민(洪樂敏)은 임금을 옹호하는 근시(近侍)의 반열로서 전령(傳令)하는 졸개가 되기를 달갑게 여겼다.
국은(國恩)을 배반하여 옛 습성을 뉘우침이 없이 재차 죄를 범하니 최필공(崔必恭)·최창현(崔昌顯)의 중독이 더욱 깊었고, 가묘(家廟)를 헐어 이륜(彝倫)을 무너뜨려 끊으니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오래 된 악(惡)이 먼저 드러났었다. 애통하게도 충신의 드러난 자손에 또 김건순(金建淳)·김백순(金伯淳)같은 패려한 손자가 있었다.
시서(詩書)를 버려두고 요망한 말을 익혀서 심지어 이마를 어루만지며 명호(名號)를 받았고 경전(經傳)을 원용하여 바르지 못한 도(道)를 증명해서 반드시 목을 빼어 형(刑)으로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가환(李家煥)은 양조(兩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 2품(品)의 높은 직질(職秩)에 올랐는데, 하찮고 얕은 재능은 마침내 피음(詖淫)한 데로 돌아갔고 흉악한 인상의 본성은 그 음휼(陰譎)을 가릴 수 없었다. 지휘하고 배포(排布)한 실제 주동자는 생질(甥姪)인 이승훈(李承薰)이고 번역해 등서하여 함께 전습(傳習)한 자는 사우(死友)인 이벽(李蘗)이었다.
무릇 한 시대의 진짜 오랑캐 종자가 모두 그의 문도(門徒)였고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를 많이 모아서 은밀히 그들의 두목이 된 듯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으뜸인 채제공(蔡濟恭)은 온 나라에서 성토(聲討)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다시 살도록 한 두터운 은택이 어떠하였던가? 단서(丹書)681)에 이름을 실은 것은 저절로 세가지의 큰 죄가 밝게 드러난 것이 있었음이고 황비(皇扉)682)의 권력을 절취하여서는 본래 여러 불량배의 의뢰할 곳이 되었다.
총악(璁萼)683)의 남은 변론을 이에 숭상하여 다투어 명의(名義)를 세웠고 기온(冀溫)684)의 모역(謀逆)하려는 마음이 점차 드러나 국가는 눈에도 없었다. 마침내 사설(邪說)을 배척한 자를 원수와 같이 보았고 흉당(凶黨)에 빌붙은 자를 힘껏 부식하기를 더하였다. 정신(廷臣)이 이흉(二凶)을 토죄하던 날에는 걸음을 물린 자가 누구였던가? 지난해 삼적(三賊)을 핵실할 때에는 사람을 죽이고야 말았었다. 인척(姻戚)의 관계를 맺어서 가깝게 문정(門庭)에 두었고 의발(衣鉢)685)을 전수함에는 심지어 얼속(孼屬)에게까지 미쳤으며, 이존창(李存昌)과 같은 모자라는 녀석을 위하여 거짓으로 허풍을 떨 때에는 혀 놀리기를 피리 부는 것같이 하였고, 이가환 무리의 흉도(凶徒)를 은밀히 보호함에는 앞장서서 기치(旗幟)를 세웠었다.
비록 산과 늪을 포용하는 도량을 잠시 드러내어 주륙(誅戮)할 것을 관대히 용서하였으나 일월(日月)이 위에서 내려 비치는 밝음으로 간악한 정상을 모두 통촉하였다. 이때에는 이른바 주문모(周文謨)라는 자가 스스로 양교(洋敎) 중에서 왔다고 핑계하여 몇해를 관통(關通)하니 변방 북쪽의 호흡(呼吸)이 바로 맞닿았었고 만리 지척에서 강남(江南)의 종적을 누가 알았으랴?
변문(邊門)에 쇄약(鎖鑰)686)의 엄함을 잃어 벌과 전갈이 소매 속으로 들어왔고 서울에 오랑캐의 숨음이 있어 물여우가 쏘려는 모래를 머금은 것과 같았다. 지황(池潢)과 윤유일(尹有一)같은 자는 앞에서 보좌하였고 황심(黃沁)과 옥천희같은 자는 뒤에서 소개하였었다.
강완숙(姜完淑)은 하늘이 낸 요녀(妖女)로 숙박시키는 주인이 되었고 최인길(崔仁吉)은 사학의 괴수를 직접 대신하여 사사(死士)687)를 응모하여, 이에 역적 종친(宗親)으로서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로 삼았고 역적 홍낙임(洪樂任)으로서 밖에서 도움을 주게 하였다. 몸을 빼쳐서 산에 갇히어 가족들의 심중(心中)과 함께 관통하였고 영해(嬴海)에 잠시 머물러서는 역적 편의 성세(聲勢)와 몰래 연락하였다. 감히 중화(中華)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니 권흉(權凶)의 사특한 모략이 비로소 탄로되었고, 초(楚)나라의 옥사(獄事)가 범람함이 많다는 데 비교하기에 이르러 간사한 무리의 사리에 어그러진 말이 또 행하여졌다.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선왕(先王)의 사업을〉계승하는 처음인데 어찌 저렇게도 걷잡을 수 없이 되었었는가?
선왕께서 승하(昇遐)하신 뒤로는 오직 함부로 날뛰기만을 생각하였다. 아! 변란의 발단이 연유됨이 있으니 엄중하게 여러 사람들이 손가락질했었는데, 이에 역변(逆變)이 이 지경에 이르자 두렵기가 마치 한 가닥의 머리털로 무거운 물건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황사영(黃嗣永)에 있어서는 사나운 이리의 심장(心腸)과 사람을 홀리는 여우의 낯짝으로, 서울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오래도록 부수(符水)의 명칭을 핑계하였고, 천진(天津)의 저무는 해에는 감히 초망(草茫) 속으로 목숨을 도피하였었다. 한 조각의 흰 명주에 써내어 세 조목의 흉모(凶謀)를 늘어놓았다. 차마 3백주(州) 명교(名敎)의 지방에 문을 열어서 역적을 받아들이었고 9만리의 양해(洋海)에 선박을 불러와 날짜를 지정하여 국경을 침범하려 하였다. 지적해 배척하여 욕설로 꾸짖은 것은 정약종보다 백 갑절이나 더하였고 의사를 서로 전달하며 주고받은 것은 황심과 한 꿰미에 꿴 듯하였다.
현계음(玄啓欽)은 동래부(東萊府)에 입술을 놀렸고 유항검(柳恒儉)은 전주(全州) 지방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며 큰 소리를 했었다. 천금(千金)을 나누어 없애어 사당(邪黨)의 부서를 이미 정하였고 한 각판(刻板)에 간인한 듯한 흉서(凶書)의 근원과 소굴을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진실로 이괄(李适)·한명련(韓明璉)·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도 감히 마음에 싹틔우지 못했던 바이고, 신치운(申致雲)·이천해(李天海)·박하원(朴夏源)·채제공(蔡濟恭)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바이니, 그 역시 무성한 숲에서 꿈틀거리는 가운데의 물건인데,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단군조선(檀君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신라·고려 이후로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선왕의 뜻을 뜻으로 삼고 종국(宗國)의 편안함을 편안하게 할 마음으로 삼아서, 기미(幾微)에 밝아 간당(奸黨)을 꺾으니 여와씨(女渦氏)의 하늘을 기운 공렬688)보다 위대하고 호령(號令)을 내린 것은 여요(女堯)가 조정에 임어한 위의(威儀)보다 더 근엄하시었다.
형륙(刑戮)을 시행하고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하여 의리를 천하 후세에 밝혔고 우로(雨露) 같은 은혜와 상설(霜雪) 같은 위엄으로 조정을 큰 중도(中道)와 지극히 바른 데로 높여 놓았다. 아주 가까운 위기(危機)를 깊이 생각하시어 일성(日星)과 같이 밝은 유지(有旨)를 찬란하게 발표하였다. 이에 본년 3월에 의금부에서 국청을 개설하여 안핵(按覈)하도록 명하였는데, 윤지충·권상연·최인길·지황·윤유일등은 전에 이미 복법(伏法)되었고, 이인(李裀)의 처와 며느리는 사사(賜死)하였으며, 이가환·권철신은 장폐(杖斃)되었고, 주문모는 군문(軍門)을 시켜 효수(梟首)하여 여러 사람에게 알렸으며, 이승훈·정약종·최창현·홍낙민·김건순·김백순·최필공·이존창·강완숙 및 이 밖의 사당(邪黨)인 홍교만(洪敎萬)·김종교(金宗敎)·이희영(李喜英)·홍필주(洪弼周)·김범우(金範禹)등과 사녀(邪女)인 경복(景福)·복혜(福惠)·운혜(雲惠)·신애(新愛) 등의 대저 체결하여 빠져든 여러 역적은 앞뒤로 정법(正法)하였다.
지난 8월에 황사영이 붙잡히게 되자 유항검·윤지헌(尹持憲)·황심·옥천희 등과 더불어 아울러 전형(典刑)을 밝게 바루었으며, 여러 도(道)에서 속이고 미혹시킨 자는 본 지방으로 내려보내어 정형(正刑)하였다.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악(惡)의 뿌리를 제거하라고 일제히 같은 소리로 힘껏 청하므로 이에 채제공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하늘의 그물[天網]이 넓어서 눈은 성기지만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않아서 건도(乾道)가 대단히 밝혀졌다.
우정(禹鼎)689)을 높이 다니 도깨비같은 자들이 도망하지 못하였고, 헌거(軒車)690)가 앞을 가리키니 가리어진 요기(妖氣)를 크게 쓸어서 요망한 난역들을 차례로 섬멸하였고, 흉악한 재화의 뿌리를 가는 곳마다 깨뜨리었다. 비록 저 부녀자나 어린아이와 하인(下人)의 천한 자라도 사람마다 함께 주토(誅討)할 것이니, 아마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영령(英靈)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어찌 오늘이 있겠는가? 나 과인(寡人)이 일찍이 듣건대 형체(形體)를 하늘이라 이르고, 주재(主宰)를 제(帝)라 이르며, 성정(性情)을 건(乾)이라 이르고, 공용(功用)을 신(神)이라 이른다.
사시(四時)가 운행하여 온갖 사물(事物)이 이루어졌으니 어찌 일찍이 거듭 일러 명한 것이겠는가? 삼광(三光)691)이 밝아서 육기(六氣)가 운행된 것도 대개 환하게 빛남이 많았음이었다. 장자(張子)의 ‘부건모곤(父乾母坤)’은 단지 분의는 다르나 이치는 하나라는 것을 말한 것이며 대기(戴記)의 ‘선하후해(先河後海)’는 근본으로 돌아가고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귀하게 여겼던 바이다.
오직 상천(上天)은 소리도 냄새도 없는데, 아! 저들 역적은 속이는 것만을 일삼았다. 또 더구나 그 도(道)는 대단히 괴상하고 천박하며, 그 종적은 대단히 끔찍하고 요사하여 터무니없는 영험을 말하니 불가(佛家)의 찌꺼기를 주워 모았고, 귀신으로 꾸며서 현혹시키니 무당[巫史]의 한 갈래와 비슷하였다.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시킨 글과 인륜과 상도(常道)를 무너뜨린 변고에 이르러서는 옛날 삼대(三代)692)의 융성했던 시대에 있어서도 가히 수화(水火)에 던질 만하였는데, 한 부분의 병이(秉彝)를 갖추었다면 모두 개·돼지만도 못한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또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면서 빠져 드니 어찌 상리(常理)로 추측할 수 있겠는가? 여러해 동안 경영했던 것을 시험삼아 보니, 진실로 흉악한 심장을 별도로 가졌다. 이는 대개 겉으로는 사술(邪術)이라고 핑계하지만 속으로는 딴 계획을 품은 것이다. 처음에는 신교(神敎)라고 거짓 핑계하여 남몰래 하늘까지 뒤덮는 재화를 빚어내었고 마지막에는 군부(君父)를 원수같이 보아 공공연히 임금을 모욕할 모략을 벌려 놓았으니, 불탄데에 풀이 무성하게 나는 우려가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겠는가?
하수(河水)의 둑이 무너지자 물고기가 문드러지는 근심은 거의 빼앗지 않고는 만족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오용(五用)693)의 법률을 약하게 시행하여 한번 변화시킬 방도를 더 생각하였다. 용사(龍蛇)가 다 덕화(德化)된 것은 옛날 영고(寧考)께서 사람으로서 사람을 다스렸던 것이었는데, 경예(鯨鯢)694)를 많이 주륙한 것은 지금에 소자(小子)가 오직 임금으로서 임금 구실만 한 것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어찌 수레에서 내리어 울 마음695) 이 없겠는가?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거의 그물을 풀고 축원하는 뜻696)을 알 것이다.
인정(人情)은 마침 징계하는 데로 모이고 세도(世道)는 만회하여 옮겨져 차츰 나아감이 있으니, 아! 너희 민중들은 마음을 널리 펴는 윤음(綸音)을 고요히 듣고서 회극(會極)의 다스림에 모두 모이도록 하라. 신하는 충성을 생각하고 아들은 효도를 생각하여 조정에 나와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할 방도를 강론하며, 여자는 길쌈을 하고 남자는 밭갈이하여 〈집에〉 들어가서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존경하는 절차를 힘쓰도록 하라. 초자(楚茨)·부예(鳧鷖)의 시편(詩篇)은 예법을 빈번(蘋蘩)697)에 먼저 하였고. 관저(關雎)·인지(麟趾)의 시(詩)는 풍화가 강한(江漢)698)에 행해졌다. 추환(芻豢)699) ·숙속(菽粟)700)까지도 염락관민(㾾洛關閩)을 장정(章程)하였고, 조두(俎豆)·관상(冠裳)은 상서학교(庠序學校)에 보무(步武)하여 천비(天卑)의 덕(德)을 잃음이 없이 일용(日用)의 상도를 떠나지 않았는데, 돌아보건대 한 종류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풍습은 곧 근세의 고혹한 습속이었다. 움직였다하면 명물(名物)을 고증한다일컬어 반드시 선유(先儒)와 반대로 되게 어긋나고, 다투어 가면서 이상한 것을 부러워하고 전하기를 본받아 짤막한 문장의 입버릇으로 쏠리어, 한번 변천하여서는 궁벽한 것을 캐고 괴상한 짓을 행하니 그 폐단이 점점 불어나고 두번 변천하여서는 상도에 어그러진 이단(異端)이 되니, 그 기미가 가히 두려워할 만하다.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孔子)의 학술이 아니면 다 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 이에 오륜(五倫)의 책과 향례(鄕禮)의 편(編)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뜻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성인(聖人)의 학문을 드러내고 임금의 기강을 높여 놓았다.
본월(本月) 22일 매상(昧爽) 이전에 있었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다 사죄(赦罪)하도록 하라. 뇌우(雷雨)가 풀리는 듯한 인(仁)은 백성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니 건곤(乾坤)이 회태(回泰)한 경사는 먼 옛날에도 없었던 것을 처음으로 만났도다. 비록 대덕(大德)이 나온다하더라도 재난에 의하여 범한 죄는 이에 사면할 것이고 진실로 사얼(邪孼)들이 뉘우쳐 고치지 않는다면 빠짐없이 주륙해 없애 버리겠다. 아! 자손을 위하는 계획을 잊지 않았고 궁문(宮門) 밖에 법령(法令)을 게시하는 곳이 저기에 있다. 일양(一陽)의 소식이 겨우 이르니 천심(天心)은 박복(剝復)701)의 기미를 징험하고 만년(萬年)의 기명(基命)을 더욱 새롭게 하니, 국가의 운명이 반석(盤石)과 태산(泰山)의 형세를 더하였다. 임금의 말은 간결함이 마땅한데, 어찌 널리 고함을 길게 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온 천하가 이미 깨끗해졌으니 다시 변화된 아름다움을 기대하겠노라. 그런 까닭에 이에 교시(敎示)하니 자세하게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였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었다.】
註675]이남(二南):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註 676]삼물(三物): 백성을 가르치는 세 가지 일로,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의 육덕(六德)과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의 육행(六行)과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를 이름 註 677]육경(六經):《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註678]증상(烝嘗): 조상에 지내는 제사.註679]이천(伊川)에서 어떤 자가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제사지내는 것: 이천(伊川)은 주(周)나라 지명(地名).《좌전(佐傳)》회공(僖公) 22년조에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가서 피발(被髮)하고, 들에 제사지내는 사람을 보고 ‘이곳이 백년이 못가서 오랑캐가 되겠다. 그 예(禮)가 먼저 없어졌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음.註680]황지(潢池): 협착한 토지의 비유.註681]단서(丹書): 죄명을 붉게 쓴 형서(刑書).註682]황비(皇扉): 재상(宰相).註683]총악(璁萼): 장총(張憁)과 계악(桂萼).註684]기온(冀溫): 양기(梁冀)와 환온(桓溫).註685]의발(衣鉢): 사부(師父)가 제자에게 전하는 도법(道法).註 686]쇄약(鎖鑰): 자물쇠와 열쇠로, 요해지(要害地)를 이름.註687]사사(死士): 죽음을 각오한 사람.註688]여와씨(女渦氏)의 하늘을 기운 공렬: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여와씨(女渦氏:복희씨(伏羲氏)의 누이)가 오색(五色)의 돌로 하늘의 이지러진데를 기웠다는 고사(古事)로, 천연적인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충했다는 말. 즉 국가에 큰 공이 있음을 이름.註689]우정(禹鼎): 우(禹)임금이 9주(九州)의 금(金)을 거두어들여 주조(鑄造)한 솥으로, 하(夏)·은(殷)·주(周) 이래 왕위(王位) 전승(傳承)의 보기(寶器)임. 곧 왕위의 뜻임.註690]헌거(軒車): 황제(黃帝)가 만들었다는 지남거(指南車).註691]삼광(三光): 일(日)·월(月)·성신(星辰).註692]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註693]오용(五用): 오형(五刑).註694]경예(鯨鯢): 악인(惡人)의 우두머리.註695]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어찌 수레에서 내리어 울 마음: 우(禹)임금이 출타하다가 죄인을 만났는데, 수레에서 내려 그 사유를 묻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요(堯) 순(舜) 시대의 사람들은 요순의 마음을 가졌었는데, 내가 임금이 되자 백성들이 각자 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마음 아파한다.”라고 한 고사(故事).
註696]그물을 풀고 축원하는 뜻: 탕(湯)임금이 들에서 수렵(狩獵)하는 자가 사방을 막은 그물을 쳐놓고 축원하기를, “천하 사방에서 다 내 그물에 걸리라.”고 하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아! 다 없어질 것이다.” 하고 이어 3면의 그물을 풀게 하고서 축원하기를,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라.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만이 내 그물로 들어오라.”고 한 고사(故事).註697]빈번(蘋蘩): 마름과 다북쑥으로, 변변치 못한 제수.
註698]강한(江漢):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註699]추환(芻豢): 풀을 먹는 마소나 곡식을 먹는 개·돼지.註700]숙속(菽粟): 사람의 상식(常食)인 콩과 조.
註701]박복(剝復): 《역경(易經)》의 괘명(卦名)으로, 박(剝)은 1양(陽)이 5음(陰)의 위에 있어 음이 커져서 양이 없어지는 모양이고, 복(復)은 1양이 5음 밑에 있어 양이 커져 가는 모양. 즉 난세(亂世)가 극도에 달하면 치세(治世)가 되어간다는 뜻. 박극필복(剝極必復).
○甲子/行討邪陳賀于仁政殿。 頒敎文:若曰。 惟我皇天列祖, 默祐邦家, 廼者元惡巨魁, 遄伏典憲, 祗告宗社陟降, 誕諭卿士庶民, 八域同慶之休, 萬代彝倫之敍。 念箕封方數千里, 而升平垂四百年。 其民士、農、工、商, 其文詩、書、禮、樂。 所誦法者, 堯、舜、禹、湯、文、武、孔、孟、周、程之訓, 所修明者, 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之倫。 蓋我列聖相承, 二南之化興, 而三物之敎作, 亦賴群賢輩出, 六經之旨闡, 而千聖之心傳。 洪惟我先王二紀光臨, 一念正學, 崇儒重道, 表章朱夫子全書, 尊華攘夷, 昭揭魯《春秋》大統。 一國興孝, 推躬行心得之餘, 四海歸仁, 有過化存神之妙。 詎意極西方陰沴之氣, 闖入小中華禮義之邦? 敢欲滓穢太淸, 所事者蛇神、牛鬼, 幾至誑惑半世, 其說則地獄、天堂, 神父、敎主之稱, 崇奉過於尸祝, 十誠、七克之目, 誕妄類於讖符。 喜生惡死人情也, 而視刀鋸如袵席, 追遠執本天理也, 而以烝嘗爲弁髦, 若敖之鬼不其餒, 而中冓之言亦可醜也。 紏結錮族、廢孽、怨國、失志之輩, 藉聲勢而植黨, 援嘯聚市井駔儈、農夫、紅女之流, 混名分而黷風敎。 或以數字謎語, 各立標名, 或以半幅邪圖, 暗粧巢窟, 或聚首講誦於深夜密室之內, 或揚言煽動於白日大都之交。 知百年爲戎, 殆甚伊川之被髮, 苟一日有變, 奚啻潢池之弄兵? 承薰隨燕槎, 而購來邪書, 入洋堂而師事異類。 若鍾之全家竝染, 難弟難兄, 哲身之一鄕皆迷, 爾姻爾戚。 昌顯以禧賊餘孽, 最稱護法沙門, 樂敏以法從近班, 甘爲傅令軍卒。 背國恩而怙終舊習, 恭、昌之中毒尤深, 毁家廟而斁絶倫彝, 忠ㆍ然之稔惡先著。 痛矣忠藎之華冑, 又有建、伯之悖孫。 舍詩、禮而習妖言, 甚至撫頂受號, 援經傳而證左道, 必欲引頸就刑。 家煥厚沐兩朝洪恩, 濫躋二品峻秩, 蟲雕篆刻薄技, 終歸於詖淫, 蜂目豺聲素性, 莫掩其陰譎。 指揮排布之實主, 逆甥則薰, 翻謄傳習之與同死友惟檗。 凡一代眞胡種子, 皆其門徒, 爲四方逋逃藪淵, 隱若渠帥。 最是濟恭, 一國之聲討已久, 再造之恩渥何如? 丹書載名, 自有三大罪昭著, 黃扉竊柄, 素爲群不逞依歸。 璁ㆍ萼之餘論是崇, 角立名義, 冀ㆍ溫之將心漸露, 眼無國家。 遂乃斥邪說者, 視若仇讎, 附凶黨者, 力加扶植。 當廷臣討二凶之日, 却步者誰逮? 頃年覈三賊之辰, 滅口乃巳。 瓜葛之結, 近在門庭, 衣鉢之傳, 至及孽屬, 陽言存昌等小竪, 皷舌如簧, 陰護家煥輩凶徒, 挺身立幟。 雖山藪包荒之度, 姑寬顯誅, 而日月照臨之明, 畢燭奸狀。 時則所謂周文謨者, 自托洋敎中來, 幾年關通, 塞北之呼吸直接, 萬里咫尺, 江南之從跡誰知? 邊門失鎖鑰之嚴, 蜂蠆入袖, 輦轂有羌胡之伏, 蜮弩含沙。 若潢若一羽翼於前, 若沁若禧紹介於後。 完淑則天生妖女, 爲居停主人, 仁吉則身代邪魁, 爲應募死士, 於是以逆宗爲奇貨, 以賊任爲外援。 脫身囚山, 家人之腸肚共貫, 假息瀛海, 賊邊之聲氣暗連。 敢曰華人之假稱, 權凶之慝謀始綻, 至比楚獄之多濫, 奸壬之悖說又行。 方沖年嗣服之初, 奈彼猖獗? 自仙馭賓天之後, 惟意跳踉。 嗟! 亂萌之有由, 嚴乎十手所指, 乃逆變之至此, 澟若一髮之危。 至若嗣永, 狼貙心腸, 狐魅面目, 都門甲子, 久托符水之名, 天津落暉, 敢逃草莽之命。 書出一片素帛, 設爲三條凶謀。 忍於三百州名敎之鄕, 開門納賊, 招來九萬程洋海之舶, 指日犯疆。 指斥詬罵, 則百倍逆鍾, 交通往復, 則一串賊沁。 啓欽皷吻於萊府, 恒儉攘臂於湖州。 散盡千金, 邪黨之部署已定, 如印一板, 凶書之根窩可尋。 此誠适、璉、麟、亮之所不敢萌, 雲、海、夏、恭之所不敢道, 爾亦林蔥蠢動中物, 胡寧忍斯? 粤自檀、箕、羅、麗以來, 未曾聞者。 惟我慈聖, 以先王之志爲志, 以宗國之安爲安, 炳幾折奸, 偉媧皇補天之烈, 發號出令, 儼女堯臨朝之儀。 鈇鉞關和, 明義理於天下後世, 雨露霜雪, 尊朝廷於大中至公。 穆然念肘腋危機, 渙乎發日星明旨。 乃於本年三月, 命義禁府, 開鞫按覈, 持忠、尙然、仁吉、潢、有一等前已伏法, 䄄之妻若婦賜死, 家煥ㆍ哲身杖斃, 文謨令軍門梟首示衆, 承薰、若鍾、昌顯、樂敏、建淳、伯淳、必恭、存昌、完淑及外此邪黨敎萬、宗敎、喜英、弼周、範禹等, 邪女景福、福惠、雲惠、新愛等, 凡締結沈溺之諸賊, 後先正法。 越八月嗣永就捕, 與恒儉、持憲、沁、千禧等, 竝明正典刑, 其訛惑諸道者, 下送本地方正刑。 大臣、三司, 以除惡祛本, 齊聲力請, 乃命濟恭追奪官爵。 天網不失, 乾道孔昭。 禹鼎懸而魑魅莫逃, 軒車指而氣翳廓掃, 妖腰亂領, 次第殲夷, 禍本凶窩, 到底劈破。 雖彼婦、孺、輿儓之賤, 人得以共誅, 倘非天地祖宗之靈, 國安有今日? 予寡人嘗聞之, 形體謂之天, 主宰謂之帝, 性情謂之乾, 功用謂之神。 四時行而百物成, 何嘗諄諄然命? 三光明而六氣運, 蓋亦昭昭之多。 張子之父乾母坤, 只言分殊理一, 《戴記》之先河後海, 所貴返本溯源。 惟上天無臭無聲, 噫! 彼賊是誣是矯。 又況其道則至詭至淺, 其跡則至憯至妖, 談空說靈, 掇拾釋氏之糟粕, 粧神幻鬼, 髣髴巫史之派流。 以至誑民惑世之書、滅倫敗常之變, 在三代盛際, 可但水火投諸, 具一端秉彝, 皆知狗彝不若。 然且抵死沈溺, 豈常理之可推? 試觀積年經營, 固凶肚之別有是。 蓋外托邪術, 內懷異圖, 始也假托神敎, 潛釀滔天之禍, 終焉讎視君父, 公肆射日之謀, 火燒草生之憂, 夫豈一朝一夕? 河決魚爛之患, 殆將不奪不饜。 玆者薄施五用之章, 益念一變之道, 龍蛇咸化, 昔寧考以人治人, 鯨鯢駢誅, 今小子惟辟止辟。 爲民父母, 詎無下車泣之心? 哀我黔黎, 庶知解網祝之意。 人情屬懲創之會, 世道有挽移之漸, 咨爾有衆, 靜聽敷心之音, 率囿會極之治。 臣思忠而子思孝, 出而講尊主庇民之方, 女則織而男則耕, 入而勉愛親敬長之節。 《禁茨》、《鳧鷖》之什, 禮先蘋蘩, 《關雎》、《麟趾》之詩, 風行江漢。 芻、豢、菽、粟, 章程乎㾾、洛、關、閩, 俎豆冠裳, 步武乎庠、序、學、校, 毋失天卑之德, 不離日用之常, 顧一種好新之風, 卽近世蠱俗之習。 動稱考證名物, 必欲與先儒背馳, 競效艶異傳奇, 靡然是小品口氣, 一轉而作索隱行怪, 其弊漸滋, 再轉而爲異端不經, 其機可畏。 非六藝之科孔子之術, 皆宜去之, 此五倫之書、鄕禮之編所以作也。 于以明天理而淑人志, 于以闡聖學而尊王綱。 自本月二十二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雷雨作解之仁, 與百姓更始, 乾坤回泰之慶, 曠千古初逢。 雖大德之曰生, 眚災是赦, 苟邪孽之不悛, 劓殄無遺。 於戲! 燕謨不忘, 象魏在彼。 一陽之消息纔至, 天心驗《剝》ㆍ《復》之機, 萬年之基命維新, 邦運增磐泰之勢。 王言宜簡, 豈欲播告之脩? 海宇旣淸, 更冀於變之美。 故玆敎示, 想宜知悉。【大提學李晩秀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