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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1. 오전 11:05:00

글자

2012년 6월 9일 개최된 ‘다산 탄신 250년 기념학술대회
 김언종,  조성을, 김상홍- 조선복음
전래사》의 존재를 부인했다 , 달레나 다블뤼가 다
산의 저술로 기록한 《조선복음전래사》는 바로 다산이 지은 비본 묘지
명 7편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음
정민, 논평을 한 허흥식 - 허흥식은, “다산보다 나이가 적지만 추사(秋史) 김정
희(金正喜)는 고승들과 교류가 많았고 전각(篆刻)을 지도하여 소산(小
山) 오규일(吳圭一)을 명장으로 키웠는데, 이 오규일이 (1830년대에)
‘約翰’[요한]이란 다산의 전각(인장)을 새겼는데, 만약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전각을 새겼을 리가 있을까 의문이
다”고 했다. 허흥식이 말한 다산의 인장에서 ‘約翰’은 다산 정약용이
1784년 겨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영세 때 받
은 ‘세례명’ 요한(John)의 한자식 표현으로, 이 인장은 세워진 상태로
보면 성모상(마리아) 형태로 되어 있어 더욱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잘
말해주는데, 인천의 송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불교사를 전공
하는 허흥식이 다산의 종교에 대해서 다산이 불승과 어울렸지만 불교
에 동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을 무렵 천주교 신앙을 간직했던 것으로
본 것은 매우 인상적인 발언이었다.
노경희
201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주관하
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 다산학 국제학술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도 다산 서학과 관련된 다수의 논의가 나왔다.
2012년 7월 5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1일차 대회에
서 송재소는 〈다산학 연구의 諸問題>
박철상은 〈간찰을 통해본 다산–文集 未收錄 簡
札을 중심으로–〉라는 발표문
제2일차(7월6일) 발표자인 한형조는 〈유신론적 주자
학과 다산학 사이의 대화〉에서, 〈자명소〉에서 다산이 한 말을 분석하
여, “다산은 처음 西敎(천주교)가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라고 생각했
다가, 곧 황허탄괴(謊虛誕怪, 허황되고 괴이쩍음)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학이 하늘을 거역하고 신을 모독한다[逆天慢神]고
단정했다. 요컨대 다산은 가톨릭의 신학과 인간관, 그리고 제도적 종교
의 도그마와 그 의례에 공감하지 않았다. 다산이 동의한 것은 세상 너
다산과
주자학의 거리는 (다산과) 가톨릭과의 거리보다는 훨씬 가깝다.
아일랜드의 Kevin N. Cawley는
논문 Traces of the Same within the Other : Deconstucting Tasan’s Christo-Confucianology(타자 안에 있는 동일자의 흔적들 : 다산의 그
리스도–유교학 해체하기
김영식은 〈정약용 사상과 학문의 실용주의적 성격
3일차(7월 7일) 발표자로 나선 김상홍은 〈다산의
문학연구〉에서, 그가 1987년 발표한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92)은 “다산이 표리부동한 삶, 外儒
內天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천주교와 결별한 후 철저하게 外儒內儒로
일관하였음을 논증하여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
부를 찍음으로서 다산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평했다.
네덜란드의 Boudewijn Walraven은
이단으로 볼 수 있는 신앙과 실천의 형태
들을 위한 풍부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2012년 8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다산 학술대회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 심포지엄

발표자 - 송영배,  토론자 백민정

2012년 8월 13일 발표된 김영식의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
“다산은 1797년의 ‘자명소’에서 서양과학 기술 때문에 처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변명했지만,
토론자 구만옥
2012년 8월 13일 발표된 이향만의 〈쁘레마르와 다산의 유교해석
에 대한 토착신학적 의의>
같은 날 발표된 김선희 〈라이프니츠의 신, 정약용의 상제>
같은 날 발표된 이동희 〈서학수용의 두 가지 반응 : 신후담과 정약
용–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수용을 중심으로–〉
다산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논쟁
1) 다산의 ‘만년 신자설(晩年信者說)’을 긍정하는 연구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확립한 이는 최석우
신부이며, 더욱 보강한 이는 김옥희 수녀이다.       유홍렬 교수
불교사를 전공하
는 허흥식 교수가 1830년대에 오규일이 ‘요한’ 이란 세례명을 새긴
다산의 인장을 증거로 들어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라고
긍정론에 힘을 보탰다96)는 점이다.
1836년 다산이 선종한
후 약24년 만인 1860년경 저술된 다블뤼 주교(Mgr. Antoine Daveluy
1818~1866, 한국식 이름은 安敦伊)의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朝鮮殉敎史備忘記》, 이하 ‘비망기’로 약칭)에 그 최초의 근거를 두고 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
1829~1878) 신부가 1874년 2권으로 된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한국천주교회사》, 이하 ‘달레 교회사’로 약칭)97)를 편찬하면서
다블뤼 서술을 그대로 인용했고, 이후 교회 측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
으로 보인다.

1975년경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의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소장 신부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작업
을 최초로 시작했다. 1976년 1월, 최석우 신부는 우선 다산의 만년
신앙생활을 기술한 달레 교회사의 해당 기록을 찾아서 학술지에 발표
하였는데, 특히 다산이 직접 목도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정에 대해
만년(해배 후)에 기록한 l’introduction de l’Evangile en Corée(한국
복음전래사, 또는 조선복음전래사 이하에서 《조선복음전래사》로 약
칭)98)의 존재가 달레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렸다(최석우, 〈Dallet
가 인용한 정약용의 韓國福音傳來史〉,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1]).

이어서 1979년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 비망기의 사본(총 515
면, 31×21cm)을 입수하고, 이를 근거로 1983년 서울 아카데미하우스
에서 진행된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 〈丁茶山의 西學思想〉을 발
표하여, 달레와 다블뤼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산의 만년 신앙생활에 대
해서, “다산이 만년에 신앙심을 회복하고 교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고 주장했다(1986년 단행본 《정다산과 그 시대》로 출간). 또한 이러한
주장의 간접적 근거로 다산의 西學思想을 太極論, 理氣論, 陰陽論, 鬼神
論, 人性論, 善惡論, 修養論의 측면에서 차례로 다루고 이들 諸論議 중
에 천주교와 서학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현존하는  다산 저술 중에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는 (沈黙
의) 이유로서 다산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라고 해석했다.99)

이후 최석우 신부는 1993년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100)에서
다산과 관련된 다블뤼 비망기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블뤼가 비망기를 작성하기 위해 모은 자료 중에는 황사영
의 帛書, 이기경의 闢衛編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교회 설립 때부터
당시까지 생존했던 적지 않은 目擊證人들의 진술도 확보했으며, 무엇
보다도 비망기 작성에 결정적인 큰 도움을 준 것은 다산이 저술한
《조선복음전래사》였다는 것이다.
ⓖ 최석우 신부의 위 논문(1993년)에 의하면 《조선복음전래사》
는 다산이 남긴 몇 가지 종교(천주교) 저술 중의 하나로서, 다블뤼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실을 다산의 《조선복음전
래사》에서 인용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기원과 관련해서) 비망기는 단
순히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옮기고 연결시키는 데 그쳤다고 비
망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 《조선복음전래사》는 “간략하고
정확하다”는 다블뤼의 평가도 아울러 기록했다.
ⓗ 최석우 신부는 같은 논문(1993년)에서 다블뤼 주교가 조선순
교자 210명을 선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다블뤼 주교의 1858년
11월 7일자 서한,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소장)하는 중에, 순교자
“丁若鍾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다산의 증언을 여러 번 인용했는데, 그

99) 이에 대해서 백민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눈에 보이는 이에 대해서 백민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눈에 보이는 주장이 없다고 하여 정약용이 천주교
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주장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적어도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진정한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면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그의 관점은 분
명히 자신의 사상적 저술들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증언은 아주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
비망기에는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한 다음 선종했다고 기록
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저술연대를 1830년대로 추정했다. 다블뤼는 당
시 신자들로부터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와는 별도의 구전을 들었는
데, 그 구전과 다산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점이 없었다고 기록한 점
도 아울러 언급했다. 한편 다블뤼는 1801년 신유박해의 도화선이 된
정약종 집의 冊籠을 다산이 〈自撰墓誌銘〉에서 완강히 부인하고 있지
만, 이와 상관없이 정약종 자신과 정씨 친척의 증언을 들어서 그 책롱
이 정약종이 家藏하던 것임을 서술했다. 또 다블뤼는 신유박해의 희생
자에 대해서, “이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정약용도 최소한 희생자가
2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고 기술했다. 1811년 조선교회가 북경
교구에 선교사(사제)를 청하는 밀사를 파견할 때, 다산이 권기인, 권노
방, 이여진, 조동섬, 홍우송 등과 함께 이 일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다블뤼는 비망기에서, 다산의 신앙심에 대해서, “정약용이 배교한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후의 일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그는 마음으로
는 신자로 머물렀다. 실제로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신심, 묵상,
극기 등 모든 종교행위에 전념하였고, 1835년 유 파치피코(방제) 신부
를 만난 후 참된 참회자로서 선종하였다.101) 그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저자이다”라고 기록했음을 적었다. 또 다블뤼는 비
망기의 다른 곳에서 다산에 대해,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
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천주교 진리는 언
제나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항상 외딴 방에 칩거하면서 소수의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단식과 그밖의 속죄를 위한 고행을 하였다. 그는 직접 만든 아주 고통을 주는 허리띠를 항상 띠고
있었고 또한 자주 몸의 여러 군데를 작은 쇠사슬로 감았다. 그는 오랫
동안 묵상을 하고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미신을 반박하고 무식한 사
람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 중 일부는
여러 박해 동안 땅 속에 숨겨둠으로써 썩어 없어졌다. 그러나 그중 많
은 것이 그의 집안에서 보존되었다. 그는 완전히 복권된 후에도 그의
은둔적 생활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신앙심은
그를 아는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1835년 유방제 파치피
코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배교의 스캔들을
조선교회 앞에서 그의 좋은 모범으로 보상하였다”라고 기록했음을 밝혔다.

ⓘ 다블뤼는 또 다산의 아들 丁學淵(1783~1859)이 “천주교가 자
기 가족이 겪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천주교를 원수
로까지 여기면서 오랫동안 천주교를 멀리하다가 만년에 이르러 회개하
고 영세한 후 몇년 후에 사망했다”고 기록한 사실도 들었다.
ⓙ 결론적으로 최석우 신부는 위 논문(1993년) 말미에, “다산은
原始儒學과 西學을 동시에 깊이 이해하고 또 그 고유성을 확신하고 있
었으므로 儒學과 西學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만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양자택일이 불필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다산은 완전한 천주교인으로서 신앙과
종교생활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유교인으로서 유교전통에 충실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자신의 의견(다산의 신앙관)을 첨부했다.102)

ⓚ 김옥희 수녀는 1991년에《韓國天主敎思想史II–茶山 丁若鏞의 西
學思想硏究–》103)를 통해서 “다산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自撰墓誌
銘》(壙中本)에서 일생을 소사상제(昭事上帝, 하느님을 섬김)하였다고 하
였을 뿐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나 배교 문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보아서, 그가 유학자 서학자를 따지기 전에 진심으로 하늘
을 섬겼던 위대한 진인(眞人)이었다”고 하여 위에서 언급한 최석우의
결론(ⓙ)이 나오기 전에 다산이 유교와 천주교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유
학자이자 천주교 신자였음을 밝혔다.
ⓛ 김옥희는 위 저서(1991년)에서, 김옥희는 다산의 저술로 알려
진 천주교 관련 문헌들을 엄격한 문헌비판에 입각하여 새롭게 고증해
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다산은 補儒論에 입각하
여 천주교를 수용했기에, 洙泗學의 표현으로 그의 신앙을 상징화하고
은닉하였으며, 극한상황에 몰렸을 때 한 몇 마디 문초기록이나 배교선
언 등을 가지고 그것을 다산 인격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여 背敎者, 또는 害敎者로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고졸한(고지식하
고 졸렬한) 인식이자 역사를 왜곡하기 쉽다고 했다. 이와 같이 판단한
근거로 김옥희는 1920~1921년경 다산의 현손 정규영이 편찬한 《俟
菴先生年譜》에도 1936년 정인보 등이 편찬한 《與猶堂全書》 속에 실
린 2편의 자명소가 모두 들어있는데, 전자는 후자에 들어있는 천주교
관련 비난 문구 등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어, 전자만을 읽으면, 다산이
천주교를 떠났다거나 혹은 배교했다는 내용이 전무(全無)하여 오히려 몇 마디 다산이 서술한 것 같지 않은 잔인한 용어들만 빼면 천주교를
변호하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실제로 김옥희의 위
의 책, 283~309쪽에는 2건의 자명소 한문(영인본)과 한글번역문이 첨
부되어 있다) 이외에도 다산이 살던 박해기 당시, 천주교 관련 서적이
압수, 소각되고 신앙생활이 감시당하는 등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다산을 (사학죄인의 멍에에서 풀어주기 위해) 다산의 본심과 관계
없이 (다산을 옹호하던 외교인들이) 다산이 배교했다는 ‘회오지정’(悔
悟之情)을 강조하여 기록에 첨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 김옥희 수녀는 위 책(1991년) 제5부와 1993년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에도 재수록한 〈茶山의 心經密驗에 나타난 心性論에 관한 考
察〉을 통하여, “上帝天의 所住處인 인간의 心에 내재하는 靈明之天, 經
世濟民的 治心觀을 드러내는 仁과 恕의 실천덕목들이 성리학적 차원이
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산의 心性論에서는 靈明之
天의 上帝와 對越하는 것에 그 중점이 있고[對越上帝], 修德論에서는 이
웃과의 상호관계의 德인 仁, 恕, 和, 愛로 구성된 利他的 仁愛心[捨身愛
人]의 실천이 그 핵심이다”고 결론지어,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였음
은 명백한 일이었고, 겉으로 배교를 표방한 시기에도 항상 마음속으로
신앙심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했다.104)

김옥희 수녀의 다산 경전 해석에 대해서 백민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섬기는 성전이며 그분께서 內在하고 內住하시고 現存하시는 집이며 언제나
항상 임하셔서 비추어주는 室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한 김옥희의 언급은 주로 정약용이
《중용》과 관련하여 上帝의 모습을 해명한 내용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상제의 내재성을 강조할
경우 초월적 의미의 상제보다 양심을 통해서 내재화된 신적 명령을 강조할 때 그 주장의 동일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김옥희의 경우처럼 이것이 곧 천주와 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인격신과의 만남을 드러내주는 필요충분의 논거는 될 수 없다고 본다. 김옥희의 《심경밀험》
분석처럼 다산의 심성론이 어떤 학적 이론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인성론이나 성기호설 등의 규
명이 아니라고 볼 때, 정약용이 전통유학의 심학적 토대에 대해서 갖고 있던 입장들을 간과하게
된다. 특히 《맹자》와 같은 경전들을 근거로 성기호설을 주장한 것은 다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쟁점들 역시 배제될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저작들을 모두
천주교에서 말한 의미의 靈性을 체험한 공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437~438쪽.
최석우 신부는 1983년 정다산의 서학사상을 발표하면서, 활동
기(1784~1795), 배교기(1795~1811), 회심기(1811~1836) 등 3시기
로 나누어 다산의 서학적 생애를 고찰했고, 1986년과 1993년도 글에
서도 같은 입장을 지켰다. 여기서 보면 최석우는 1795년 다산이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어, 천주교 신자를 유교로 회귀시키는 등 교회에 명백
한 害敎행위를 한 것을 그의 배교기의 시점으로 보고, 1811년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성직자(신부) 영입운동에 동참한 때로부터 신앙의 회심
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최석우의 시기구분은 외적으로
명백한 배교 또는 회심의 표시를 시기구분의 경계선으로 삼은 특징이
있다. 또 1822년 다산이 회갑을 맞아 이제부터 평생 지은 죄를 속죄하
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기가, 다블뤼 비망기와 달레 교회사에서 해
배 후 2~3년 뒤부터 신앙생활을 재개했다는 기록과 시기적으로 일치한
다105)는 점을 밝혔다.

김옥희 수녀도 최석우 신부와 마찬가지로 활동기, 배교기, 회
심기 등으로 3분하고 있으나, 1795년 배교가 시작된 것을 언급했을
뿐 배교기와 회심기를 구분하는 시점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
았다. 다만 김옥희 1991년의 단행본 중 제2부 〈다산 정약용의 서학
(천주교) 신봉론〉의 내용에 의하면, 1801년 강진 유배 이후, 中庸講義
補를 저술할 때 이벽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과 다블뤼 주교
비망기에 언급된 교회재건운동의 일환으로서 성직자영입운동에 다산이 참여한 사실들을 회심기 이후의 내용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강진유배기 중에 다산의 회심기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⑤ 다산의 천주교 관련 저술의 존재론 :
㉠ 최석우 신부와 김옥희 수녀 등의 이 같은 주장(다산의 천주교
저술 존재론)은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앙심을 회복했던 증거로서 설
명되는데, 최석우 신부가 먼저 주장했던 이 이론에 대하여 김옥희 수
녀는 일치된 의견을 보여준다.
㉡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의 비망기를 근거로, 다산이 회심기에 접
어든 후, 대략 1830년대에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교회(신앙공동
체)가 설립되던 시점의 일을 기록한 《조선복음전래사》를 기록한 외에
도, 苦身克己 등을 통해 묵상을 하면서 기록한 묵상의 일부를 기록한
글, 또 우둔한 백성들에게 천주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쉬운 교리서적등 몇 종의 종교서적을 서술해서, 박해기 중에 이들 중 다수가 땅속에
서 썩어 없어졌지만, 상당수는 그의 집에 보관되었다고 보았다.
㉢ 최석우 신부는 다산이 저술했다는 《조선복음전래사》의 내용을
다블뤼 비망기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출하고 있다.106)
㈠ 이책은 다산이 직접 참여하고 목도한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되
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㈡ 이책은 간략하고도 정확하여, 이 책과는 무관한 이들로부터 들
은 口傳과 다른 곳(어긋나는 곳이)이 없었다.

㈢ 이 책에서 다산은 그의 형 순교자 정약종에 대해서 여러 번
증언하였는데, 이 증언이 매우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다블뤼가 평
가했다.
㈣ 이 책에서 다산은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숫자가 200명이라고
했다.

2) ‘다산의 만년 신자설(晩年信者說)’을 부정하는 연구
① 부정론의 개요 : 다산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음은 인정하지만,
1791년 호남에서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문제 시 된
후, 다산은 공식적으로 교회와 결별(배교)하였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앙에 다시 물들지 않고 온전한 유학자로만 생활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② 주요 논자 : 이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일제강점기 최익한
이다. 그 후 체계적 이론을 세운 대표적인 논자는 김상홍 교수이며,
박석무, 강재언, 한형조도 이 주장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다산의 서학
사상을 언급하면서, 다산의 천주교 신자 여부에 대해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은 연구자 중 김언동 등 다수도 이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③ 부정론의 근거 :
ⓐ 대표적인 논자인 김상홍 교수는 1981년부터 2012년 현재까
지 대략 10여 차례에 걸쳐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자설을 반박하는 다
음과 같은 논문을 써왔다.107)

김상홍의 위 글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것은 본인 스스로 반박론
의 완결편이라고 자평한 1990년 단행본 속에 들어 있는 〈다산의 천주
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와 최근(2012년)
107) 이 같은 김상홍의 체계적 반론은 교회사를 전공으로 하지 않는 비천주교인으로서 현재까지 거
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또 반론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보여준 교회사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
대해서 경탄을 표한다. 김상홍 교수의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교회사를 교회 안의 신자들
만의 특별한 역사로 취급해온 그간의 일반 역사학계의 관행과 인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선구
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필자의 이런 평가와는 별도로 필자보다 앞서 백민정은 교회 측이
다산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한 점에서 김상홍의 노고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
(2007, 이학사).

〈다산의 「秘本 墓誌銘 7편」과 천주교〉이다. 김상홍의 이 논문들을 통해
서 정리된 입장은 다음과 같다.
ⓑ 다산은 23세 때인 1784년 4월 15일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와 서적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러다가 26세(1787)부터
4~5년간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이때 천주교를 통하여 서양과학의 문
명을 수용하였고, 천주교를 유교의 일파로 인식했으며 문원(文垣)의 감
상물로 알았다. 그는 천주교를 믿었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2차례의
자명소).
ⓒ 다산은 30세 때(1791) 천주교와 완전히 절의(絶意)하였다. 신
해옥사 이후 국법으로 西敎(천주교)를 엄금했을 뿐 아니라, 이전(천주
교를 믿을 때)에 조상제사를 폐지하라는 교회의 말을 듣지 못했다가
윤지충 등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한 것에 충격을
받고 절연하였다. 천주교와 절연한 이상 ‘천주교도’라는 오명을 씻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1801년 옥사 때도 국문(鞫問)에서 전에 이미
배교한 것이 입증되어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떠났다.
ⓓ 달레와 다블뤼 등 교회 측의 기록에만 나오는 다산의 만년 신
앙회복설은 다산의 기록(저술)에서 일체 나오지 않으므로 객관적인 타
당성이 결여되어 있어 인정하지 않는다.108)
ⓔ 다산의 천주교 외배내신론(外背內信論)의 근거가 된 황사영의
백서는 1801년 양력에 작성된 것이고 1801년 2월까지 목도한 것에
의존하므로 1801년 2월 이후 다산이 서거하기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단 해당되지 않는다.
ⓕ 1801년 장기현 유배지에서 지은 〈惜志賦〉의 내용과 같이 외배내신(外背內信)이 아니라 외배내배(外背內背)하여 표리가 일치한 유
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1797년 〈辨謗辭同副承旨疏〉와 해배
후에 쓴 〈自撰墓誌銘〉에서 30세에 천주교와 절연하였음을 밝히고 있
으므로 ‘외배내신론(外背內信論)’은 성립되지 않는다.
ⓖ 최석우 신부의 “다산이 교회재건에 기여했다”는 논의에 대해
서는, 다블뤼도 이 문제에 대하여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라는 단서
를 붙였는데, 구전이란 신빙성이 없다.109)
ⓗ 다산은 1810년 유배지 강진에서 쓴 《詩經講義補遺》 머리말에
서 “선성(先聖) 선왕(先王)의 대도(大道)에 몸을 바쳐 진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한다”고 하여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고자 다짐
했다. 또 〈자찬묘지명〉에서 유배기간을 선왕의 대도를 알 수 있는 절
호의 기회로 여겨 경학연구에 전념하면서, 先聖 先王의 道는 곧 堯 舜
周公 孔子의 道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다산의 현손 정규영이 1921
년 완성한 〈사암연보〉에서 다산은 유배기간에 상고시대 성인들의 경
전을 私淑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것들로 보아 유배기간인 1811년에
다산이 교회재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없다.
ⓘ 최석우 신부가 다산 해배 후 59~60세부터 칩거하면서 천주교
를 신봉했다는 논의에 대해서, 다산은 칩거보다는 만년을 소요자적 하
였다. 59세에 청평산과 춘천을, 66세에 천진암 일대를, 67세에 송파
를, 69세에 용문산 일대를 유람하며 기행시집(紀行詩集)을 남겼다. 이
로보아 칩거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없다.110)

108) ⓓ의 견해에 대해서는 앞서 제3장에서 논한 홍이섭의 견해, “··· 문헌학적 확인이 용이치 않은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반증의 자료일 수만은 없으리라고 본다”는 말과 일정하게 배치된다
109) ⓖ에 대해, 최석우 신부에 의하면, 다블뤼 주교가 교회사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1850년대 후반
부터 1860년대 초에는 다산 집안의 소상한 사정을 전해주는 目擊證人(다산의 책롱사건 변명에
대한 견해를 밝혔던 다산의 친척도 포함)이 다수 있었다고 하는데, 목격증인의 증언은 2, 3차 傳聞證言과는 달리, 1차 사료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110) ⓘ의 견해에 대해, 앞서 본문 제3장에서 다산 간찰의 특성을 언급한 박철상의 견해, 즉 “다산처
럼 간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인물도 없으며, 누구보다도 간찰을 쓰고 보관하는 일에 민감했는데, 이는 일찍부터 간찰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편
해배 후인 1821년경 다산은 갈수록 쓸쓸함과 외로움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간찰에
담았다”고 한 언급은 다산이 해배 후 대체로 바깥활동을 삼갔다는 교회 측의 주장에 일정한
힘을 실어준다. 한편 다산이 가끔 지인들과 함께 소풍을 갔다고 해서 그의 활동을 逍遙遊歷의
나날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해배 후 정적들의 감시 속에서 근신하는 삶을 살아온 모습과도 배치
되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111) ⓙ와 같이 다산이 유교적 삶으로 일관했고, 내세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한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도 가능하다. 이상익은, 다산이 사후의 심판에 의한 보상의 관념을 도입하여
윤리적 행위의 동기를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상익은, 다산이 항상 두려움을 낳는 외재
적 초월자인 상제에 대한 복종 그리고 상제가 내리는 福善禍淫의 대가가 없으면 윤리적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상익, 〈정약용 사회사상의 새로운 지평〉, 《철학》 48집
(한국철학회, 1996).

ⓙ 〈자찬묘지명〉을 “평생의 허물과 죄를 씻어버린다”는 등의 구
절을 근거로 최석우 신부가 신봉론(信奉論)의 근거로 본 데 대하여,
“다산이 쓴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정약전 등과 자신의 묘지
명 2편 등 모두 7편은 비본(秘本)으로 전해진 것이므로 진실의 기록이
다. 그런데, 같은 묘지명에서 완전히 절의(絶意)했다고 한 부분을 불신
하고 일부 구절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찬묘지
명〉의 顧諟明命은 《大學》에 나오고, 樂善好古는 《孟子》와 《論語》에
나오고, 以復乎天命之性은 《中庸》에 나오는 것으로 유교주의적 세계관
이다. 묘지명에서 6경4서로 몸을 닦고 1표2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겠다”고 한 것은 유교적 삶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이다.111)
최석우 신부는 다산의 철저한 신앙생활 재개를 1820년대 초반으로 보
았는데, 그 이유로 다블뤼가 다산 유배 후 2~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 기록과 묘지명에서 그가 1822년에 회갑을 맞아 새로
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묘
지명의 일부 표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산의 양심선언서인 묘지명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 다산이 만년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산은 58세, 62세, 66세(1827) 때에 조정에서 등용논의가 있었는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보안이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고 등
용논의가 나왔을 리가 없다. 또 66세와 69세 때 윤극배가 다산을 천
주교 관계로 모함했지만 모두 무고임이 밝혀졌다. 또 다산이 66세 때
인 1827년에 정해박해가 있었는데, 다산이 이런 박해기에 신앙생활을
했을 리 없다.112)
ⓛ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다고 하지만, 이 책의 원본
이나 사본이 한국이나 프랑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
책들은 결국 다산이 쓴 7편의 비본 묘지명들을 가리키는 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묘지명들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113)
ⓜ 다산이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산에게 종부성
사를 주었다는 유방제 중국인 신부는 모방 신부로부터 성무집행정지를
받을 정도로 스캔들(돈과 여자 문제)이 난 타락한 자인데, 다산이 그
소문을 모르고 이런 자에게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114) 정규영이 편찬한 〈사암연보〉에는 다산이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서거하기 4일 전에는 다산에게 병환이 있었다고
하고, 3일 전에는 ‘회근시’를 쓴 것이 남아있는데, 건강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설령 임종 4일 전인 1836년 4월 3일 유 신부에게 종부
성사를 받았다고 가정하는 것도 날자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유방제
신부가 중국으로 쫓겨난 때는 다산이 서거한 때(4월 7일)로부터 4~5
일 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회근시에 의하면, 그가 임금의 은혜에 감
사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고 종부성사와 관련된 언급은 없다. 또한
그가 죽은 후 자손들에게 자신이 쓴 유명첩(遺命帖)과 상의절요(喪儀節
要)에 따라 유교식으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고 후손들도
이에 따라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되어 있다.
ⓝ 다산은 유독 순교한 셋째형 정약종의 묘지명은 짓지 않았는데,
비본으로 간직할 묘지명이라면, 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
만 다산이 정약종의 묘지명을 짓지 않은 것은 그와 종교적 뜻(신념)이
다르기 때문에, 또 가문에 일사이적(一死二謫)의 엄청난 재앙을 몰고온
장본인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
로 조카사위인 황사영, 매형인 이승훈 등의 묘지명도 종교적 신념 차
이로 그 묘지명을 짓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 다산은 〈五學論〉에서 선진유학(洙泗學)을 밝히고 구현하려고
했으며, 목민심서에는 문묘(文廟), 제단(祭壇), 서원(書院), 사묘(祠廟)의
제사중시론(祭祀重視論)을 개진하였고, 효제(孝悌)가 인륜의 근본이라는
다산의 효론(孝論) 등은 천주교와는 다른 것이다. 또 정규영의 〈사암연보〉에서 다산이 유교주의로 일관했다고 한 점 등으로 보아 다산은
만년에 천주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정규영이 연보를 완성한 때
는 1921년으로 다산 사후 85년이 지난 때이며, 이때 굳이 다산의 천
주교 관련 행적이 사실이라면 숨길 이유가 없다.
ⓟ 학문과 종교를 분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다산이 살았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이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만약 다산이 외배내신(外背
內信)의 이중적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다산의 불행이자, 조선후기 한국
학의 불행이기도 하다. 다산은 천주교와 절의(絶意)한 후에 철저한 유교
주의자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밝혀졌다.115)
ⓠ 한형조는, 2012년 7월 6일,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주관하고 문
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 다산학 국제학술회의’
제2일차에서 〈유신론적 주자학과 다산학 사이의 대화〉에서, 〈자명소〉
에서 다산이 한 말을 분석하여, “다산은 처음 西敎(천주교)가 儒門의
別派라고 생각했다가, 곧 황허탄괴(謊虛誕怪, 허황되고 괴이쩍음)를 깨
달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西學이 하늘을 거역하고 神을 모독한
다[逆天慢神]고 단정했다. 요컨대 다산은 가톨릭의 신학과 인간관, 그
리고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와 그 의례에 공감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서 다산의 천주교 부정론을 강하게 뒷받침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그
의 神, 또는 하느님(天) 관념의 형성에 가톨릭이 깊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다산이 초월적 신을 믿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기술했다. 이
어서 “하늘이 선한 본성을 주고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고투하게 한 것이 다 ‘하느님의 의도’라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 알고도 그렇게 시키
신다(天非不知而使之然也). 그래야 善이 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논리이고 또한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만나
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하여, 다산의 저술에 서학적 영향이 있음
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론적으로 다산과 주자학의 거리보
다도 다산과 천주학의 거리가 더 멀었다고 하면서 다산의 천주교 신앙
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 김상홍과 별도로 박석무는 정약용, 〈그의 시대와 사상〉, 《한
국사회연구》 2(1984) 및 《다산기행》(1988, 한길사) 등에서 “다산은
30세 이후 완전히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 백민정은 2007년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116)을 통하여 김상홍의 천주교회 측 주장에 대한 반론을 지지하면
서117) 최석우 신부와 김옥희 수녀 등 천주교회 측의 주장이 무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12)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정해박해 때는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
에서 박해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정해박해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혹독한 병인박해
때는 전국적으로 근 8년 정도 박해가 지속되었다. 그런데도 신앙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순교자
외에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면 김기호 요한 회장 같은 분이다. 정해박해 때는 경기도 광주
마현(다산이 살던 고장)에서 박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박해와 관련되어 알려진 사실도 없
다. 이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13)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최 신부의 논문에 의하면 다블뤼 비망기에
는 묘지명에 안 나오는 부분도 두 군데 보인다. 정약종에 대한 다산의 증언과 신유박해 순교자
200명 등.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것인가?
114) ⓜ의 주장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교회사 전공자들은 모방 신부로 대표되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유방제로 대표되는 중국인 사제 사이에 조선전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유방제 신부에 대한 모방의 기록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본다. 또 모방의 진술과는 달리, 신자
들의 증언록(“기해병오박해순교자 시복재판록” 등)에는 서울과 서울 인근 경기지방의 신자들
이 자기들을 방문한 유방제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은 내용을 구술하는 내용이 수차례 나오며,
성인 남경문 베드로(1796~1846)는 유방제 신부가 순방 때 동행했던 전교회장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한편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출국한 것은 교회 측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4월 4일이 아니라 그해 12월 초 중국(마카오)으로 유학가던 김대건 등 3소년과 함께 간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증빙하는 1836년 11월 29일자로 조선에서 쓴 유방제 신부의 라틴어 편지가
있다. 또한 최석우 논문(1993년)에서는 다산이 유방제 신부를 만난 것이 1836년이 아니라
1835년이라고 한 다블뤼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는데, 이때는 모방 신부가 아직 입국(1836년
1월 13일)하기 전에 해당된다.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조선후기 양명학이 들어온 후 상당수 유학
자들이 겉으로는 성리학(정주학)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했다는 의미에서 ‘外
朱內王’으로 표현한다. 다산의 경우도 박해기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당시의 다수 양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外儒內天’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상장례나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 다
산에게 천주교와 유교는 그의 會通的 思考 내에서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④ 시기구분과 관련하여 : 김상홍을 비롯한 ‘다산의 천주교 신앙
회의론자들’은 다산의 천주교 신앙 배교를 1791년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최석우, 김옥희 수녀가 1795년을 배교의 시점으로
본 것과 다르다.
116)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117) 백민정이 김상홍의 주장을 지지한 이유로는, 첫째, 동기의 측면에서 김상홍의 천주교 입장에
대한 반론이 “서학의 영향만으로 정약용 철학을 이해하던 기존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
는 하나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둘째, 다산의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김상홍의 분석
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데, 특히 정조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연모의 정, 기본적 인륜관계인
부모와 자식에 대한 유학자로서의 강한 애착과 사랑, 사서육경의 가르침을 잘 연마하지 못했다
는 다산의 깊은 회한 등이 표현된 다산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다산이 결국은 유학자로서 죽고
기억되길 바란 인물이라고 한 점 등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5.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다산의 서학 또는 천주교와 관련된 논의들을
2000년대 이후 급증한 다수 연구자들의 연구사정리 논문을 통해서 주
제별로 살펴본 후, 조선후기부터 현재(2012년)까지 그 연구사적 흐름
을 [다산 서학/천주교 논의의 제기(조선후기~1945년) → 다산 서학의
쟁점 형성(1945~1970년대) → 다산 천주교 신앙과 서학사상의 쟁점
부각(1980~1990년대) → 다산 서학사상 연구의 국제화와 관련 연구
사 정리의 성행(2000년~현재) 등으로 구분하여 당대의 주요 논자와
그 논의의 주요 내용들을 쟁점을 곁들여 기술해보았다.
주지하듯이, 다산의 서학사상이나 천주교와 관련된 문제들에는 매
우 많은 논쟁점들이 있다. 그러한 여러 논의 중에서도 특히 수십 년간
상반된 주장들이 팽팽하게 대립해온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앙 여부”
에 대하여 긍정론자와 부정론자들의 견해를 조목조목 따져보았다.  필자
는 공평하게 연구사를 정리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또 직접 원전(原典)
을 깊숙이 연구할 기회가 부족했던 관계로 인해서 섣불리 단언을 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교회사와 한국사 일반의
가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본고의
연구사 서술에서는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쪽을 전적
으로 배척하는 방식의 논의는 전개하지 않았다. 다만 쟁점이 되는 논점
들에 대해서 찬반 양론을 본문이나 각주에서 부기하는 방식으로 가능
한 논의를 활성화하면서 기존 논의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부족한 점을
보완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도출
하고자 노력했을 따름이다. 이제 다산과 천주교의 상관성에 대한 양쪽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된 문제점만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첫째, 관점(시각)의 문제이다. 이봉규와 돈 베이커, 부드윈 왈라반
등의 지적은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청해야 할 적절한 조
언으로 생각한다. 즉 천주교, 불교, 유교 등 다양한 요소가 모두 다산
의 저술 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한 가지 측면만을 지나
치게 강조하는 연구는 다산의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단순화시켜 연구의
객관성과 균형감을 상실케 할 뿐 아니라, 다산의 치열한 시대적 고민
과 개혁적 의도를 간과하기 쉽게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한 비슷한 맥락이지만, 다산과 같은 조선후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적
인 영역에서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개인적 기호에 맞는 사
상을 취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이들을 배타적인 유교, 불교, 또는 도교
의 신앙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당시대 사람들의 정
신세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는 점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연장선상에서 고려해 볼 것은 과연 ‘천주교 신
자’, 내지 ‘유학자’의 기준을 어떤 수준에서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조선후기 천주교가 막 들어온 시점에서 그나마 박해까지 당하여 성
직자도 없이 평신도들만으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에서 일개 평신도로
서 다산 정약용이 어느 정도까지 천주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을 비롯하여 한국교회 창설
자로 불리는 이승훈, 권일신 등도 모두 당시 교회법규로는 허용되지
않았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평신도로서, 성직자만 가능
했던 각종 성사(聖事)를 집전했는데, 이는 정통 가톨릭 교리를 사제로
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혼자서 또는 동료들과 토론을 통해서 漢文西學書를 보면서 가톨릭
교리를 익혔던 다산의 가톨릭 교리지식상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일정부
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이 당시 가톨릭 교리와는 어긋난 유교식 喪祭禮를 거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가톨릭 신자
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는 물론 다산이 자신의 喪祭禮觀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점을 1791년 이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자료의 탐색과 해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1983년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 최석우 신
부가 발표할 당시에 나온 토론 중에, “신앙인으로서의 다산과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분리하여 연구하는 것이 다산 사상을 보다 올바로 이해
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므로 본 연
구에서는 고려해보아야 할 조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
나라 유학자들 중 다수가 외적(公的, 政治的)으로는 유학을 표방하면
서, 내적(私的, 心理的)으로는 불교적 삶을 살아간 이들도 많았다. 이
런 사상과 문화 풍토에서 조선후기 천주교가 들어와서 조선초기 불교
가 탄압받듯이 탄압을 받았을 때, 외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듯하면
서 내심으로 천주교를 믿고 신앙생활을 남몰래 했던 사람이 없었을 것
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둘째, 자료(비판)의 문제이다. 이 점에서 하우봉의 언급과 김영호
의 선구적 논문118)은 참으로 필요하고도 타당한 지적을 한 것이다. 또
노희경, 조성을, 김문식 등의 문헌학적 연구도 매우 소중한 작업이라
고 생각한다. 현재 다산학술재단에서 추진 중인 다산 저술의 정본화
작업은 다산 저술의 진면목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본화 작업과 함께 현재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고, 간행되지 않은 다산의 일문(逸文)들을 최대한 조직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정본화 작업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혹시라도 1836년 다산서거 직후나, 1934년 여유당전서 간행 전
후에, 다산 집안에 소장하던 필사본 자료들을 간행하기 위해 편집하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과실이나 고의에 의해 간행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
료들이 발견된다면,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미처 알려지지 않았
던 다산의 진면목이나 또는 논쟁중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던져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앞으로 상당수의 미공개된 사료들
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셋째, 다산의 내면적인 사상(사고)과 그의 삶(실천)의 문제를 어떻
게 어느 정도까지 연결시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위론적으로 말
하면 이 양자는 당연히 일치되어야 하고 연구자는 원칙적으로 상관성
이 있다는 관점 하에서 논지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
은 다산 자신의 고백은, 과연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솔직한 그의 심정
을 현존하는 저술(특히 간행본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
이 든다. 또한 오늘날 연구자가 취해야 할 입장이 어떠해야 할것인지
참으로 고심하게 한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편지
가 큰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겠는
가? 또 이렇게 빌었다. “이 편지가 수백 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
들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하는 일이 없겠는가?”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였다. 이것이 군자의 신중함이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보니 이
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이사장 염수정 대주교)는 11월 23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컨벤션센터에서 '다산 정약용과 서학 및 천주교와의 관계'를 주제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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