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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2. 오전 10:37:29

글자

先王末年 南人又分而爲二 一邊則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敏等若干人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다시 나뉘어 두 파가 (攻西派와 信西派) 되었습니다. 그 한편은 이가환 (1742~1801 남인학자) 정약용 (요한 1762~1836 실학자)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홍낙민 (루가 1740~1801) 등 몇몇인데


外雖毒害聖敎 中心尙有死信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양하는 소
臣於所謂西洋邪說。嘗觀其書矣。然觀書豈遽罪哉。辭不迫切。謂之觀書。苟唯觀書而止。則豈遽罪哉。蓋嘗心欣然悅慕矣。蓋嘗擧而夸諸人


신은 이른바, 서양(西洋) 사설(邪說 천주교(天主敎)를 가리킴)에 대하여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할 수 없어 책을 보았다고 했지, 진실로 책만 보고 말았다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사모했고, 또 일찍이 이를 거론하여 남에게 자랑하였습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권

P. 17

6번째 줄

이 분들 중에서 순교자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조카 권기인 요한을 우선 들어야 하겠다.

그는 박해중에 몸을 피하였으나, 서울을 떠나지는 않고, 자기 돈으로 옥에 갇힌 이들을

비밀히 도와 주고, 할 수 있는 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일과 그들의 집안 일을

보살펴 주었다. 박해가 끝나자 그는 이쪽 저쪽으로 다니며, 교우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무관심을 흔들어 깨우고 공포심을 덜어 주고, 다시 신자의 본분을 지키도록 이끌고 하여, 전력을 다해 전박적인 절망상태와 대항하여 싸웠다.


19번줄(아래에서 5줄) 이 재건운동에 활발히 참여한 사람들로는 이 여진 요한과 그의 사촌 신태보 베드로, 홍낙민 루가의 아들 홍 우송, 정약용 요한을 또한 들어야 하겠는데, 정약용 요한은 박해 중에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했었으나, 진실히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온 힘을 기울여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자기 죄를 속죄하기에 이르렀다.


1권 P. 302 아래에서 5줄 그의 누이의 1주기를 기회로 마재 정씨 집에서 얼마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1784년의 오기) 초여름 4월 15일에 정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역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 연구였다.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후세의 상선벌악 등 문제를 차례차례로 검토하고 해석하였다.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위로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고 횡홀해졌다.


朴 錫 武(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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