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2007. 11. 20 김학렬 신부.
근래에 이르러 일부 식자들을 주축으로 엉뚱한 논리로 다산 정약용을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들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천주교의 근본을 흔들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시자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보고자 한다.
가. 다산 정약용 요한은 심약한 배교자였으나, 회개하고 보속하다가 천주교 신앙인으로 선종하였다.
1. 벽위편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인년 1806)에 사직 강준흠이 상소하기를 : 정약용이 반촌에서 흉적을 모으고 집에는 요망한 무리들을 길러서,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 그 사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병진년(1796)에 한 차례 상소하여 겉으로는 탈을 바꾼 것처럼 꾸몄으나, 실속은 성상을 속이는 계략이었습니다. 황사영의 백서에(여진천, 황사영 백서 해제, 1999 기쁜소식, 53참조) 이른바 “이가환 . 정약용은 겉으로 배교한 듯하지만, 가슴속에는 늘 끊어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 고 한 것은 저들의 심정을 사실대로 그려낸 것입니다.(벽위편, 한국천주교 박해사, 1987 명문당, p.322)
무자년(1828) 10월에 구언할 때, 예부좌랑 윤극배가 상소하기를: 사역의 괴수, 정약용은 19년 동안 바닷섬에서조차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설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편안히 고향에 돌아가 있을 때에는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신명처럼 받들어 섬겼으며, 또한 옥사로 가환. 관검이 도륙을 당하였음을 한편으로 당화처럼 보고 나타나게 원통하다 하였다.(벽위편 p. 274)
동부승지 정약용의 상소(정사 1797년 6월)에 관하여: 약용이 자수하고자 하였다면, 상소한 말이 순박하고 솔직하여 꾸밈이 없고 조각조각 적심을 나타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곧은 마음의 회개함을 볼 것이어늘, 이제 천언만어가 오로지 꾸며냄을 일삼으니 ( 그 상소가 극히 많았는데, 지금 이것은 기록을 덜어서 열 중 두셋에 불과하다). 그 스스로 이른바 회개한 곳은 ‘관리가 된 뒤, 어찌 이단의 설에 마음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불과할 따름이다. 자못 한 글자도 몹시 간절한 것이 없으므로, 약용이 비답을 받은 이튿날에 왕이 입시한 승지와 사관에게 묻기를: ‘정약용의 상소가 어떠하냐? 각각 소견을 말하라’ 하시니, 검열 오태증이 아뢰기를 ‘ 신의 소견으로는 이 사람이 아직도 그 사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 하니, 왕이 크게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 ‘네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었다.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이 학설이 대체 무엇이 좋아서 전후 30년간에 걸쳐 머리를 돌리고 마음을 고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슬프도다. ( 벽위편, 219)
벽위편 발문에 보면 원편자는 천주교 배척의 선봉장이었던 이 기경이라 하였고, 이만채는 그의 현손이라 한다. ... 이기경 편본은 1959년에 고 홍이섭 교수가 이기경의 후손이 산다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용진에서 한 사본을 발견하고, 이것을 양수본(兩水本)이라고 명명하였다(벽위편, 역자서문).
이렇게 벽위편에서 보듯이, 그토록 상소를 올리면서 정약용의 처형을 주장하던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을 옹호한 대표적인 선각자로만 둔갑시키려고 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나약한 심성으로 배교하였으나, 신앙인으로 회개하여 선종한 정요한은 사라지고, 자신들만을 옹호한 다산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2. 달레의 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1818) 2,3년 뒤라고 Daveluy, Notes, p. 340에서는 적고 있다), 정약용 요한은 이전보다도 더 열심히 모든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1801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고, 그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 놓지 않았다. 그는 자주 오랫동안 묵상을 하였다. 정약용 요한은 그의 묵상의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외교인들의 미신을 반박하고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여러 가지 다른 서적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 여러 권이 박해 때에 땅 속에 감추어졌다가 벌레에 갉아 먹히고 썩고 하였으나, 많은 저서가 그의 집안에 보존되었다. 완전히 복권이 된 뒤에도 정요한은 생활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였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열심은 전에 그가 배교함으로 인하여 나쁜 모범을 보였던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감화시켰다. 정요한은 1835년 유방제 빠치피꼬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뒤(1833-1836년 거주), 그의 손으로 마지막 성사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 요한의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하여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그의 아들 홍 유산( 최석우 신부의 주석 : 비망기에도 홍 유산으로 나온다. '홍'을 '정'의 오식으로 보고 정 유산으로 해석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유산은 정약용의 장자 학연의 호였다.)은 재능과 학식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천주교가 자기 가족이 당한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며, 오랫동안 몹시 멀리하다가 마침내 회개하여 죽기 몇 해 전에 성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약용 요한의 누이 하나는, 1801년 박해에 대하여 말할 때에 이야기한 일이 있는 채제공 재상의 며느리였다. 이 여자는 16세에 과부가 되어 슬프고 외로운 일생을 외교인만 사는 시가에서 보냈다. 마침내 이 여자는 노경에 이르러 다행히도 신앙을 얻게 되었고, 1851년에는 본국인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몰래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그에게 모든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중, 1987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 p.185- 186 ; Daveluy, Notes, p. 339-341).
정약용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모든 사실을 명쾌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터에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가문의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폐기하여 버렸거나, 달레의 기록처럼 숨겨서 보관하다가 벌레에 먹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기록들은 많은 부분이 회고록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희미한 기억으로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감추려고 하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은 다른 자료들로 보완이 되어야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3. 벽위편 말미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는 병자성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양의 천주교는 조사하여도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천주교는 처음에 입교하면 환약을 받아먹게 하는 것과, 세 차례 돈을 받는 일이 있으며, 조상의 신주를 쓸어 없애는 일이 있으며,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자는 일이 있고, 병들어 죽을 때에 본사(선교사)가 와서 눈알을 뽑아가는 일이 있었다. ,,,. 또한 입교한 사람이 병들어 죽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선교사에게 알려야 하며, 선교사가 오면 처자들은 모두 방문 밖에 꿇어앉게 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오래지 않아 병자가 죽으면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선교사는 흰 보자기로 시체의 머리를 싸매어 놓고 풀어보지 못하게 하며, 대개 눈알은 이미 없어졌더라.(벽위편, 373-374).
4.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다산 정약용의 병자성사를 부정하고 있
다.
<종부성사론의 반론>에서 :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거행하였다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는 주문모 신부 후임으로 1833년 말에 조선에 들어왔으나, 스캔들로 인하여 1836년 조선을 떠난 사람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1836년 결혼 60주년일인 2월 22일(양력4월 7일) 75세로 향리에서 운명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1836년 양력 4월 4일 이전에 서울을 떠나 산서성 고향집으로 출발하였다. 즉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이전에 서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 적어도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인 4월 4일 이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그가 어떻게 4월 7일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할 수 있겠는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 이런 그가 4월 7일 辰時初刻 (7시초)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주장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 김상홍, 다산학 연구, 1990 계명문화사, p.46-48)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병자성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부성사에 대한 이해가, 한문을 직역하여 알아들었거나, 위의 벽위편의 해국도지에 나오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병자성사는 반드시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서만 시행하는 성사가 아니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소결론 : 위의 사례들로 보아, 교회사는 교회의 신학을 아는 사람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을 배교자로 결론짓고 자신의 편으로 보는 측에서는, 모든 논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생활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진 사람은 교회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일반 사학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내의 자료가 국외의 자료보다 우선한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릇된 추리를(Faction) 학설로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있는 사실을(긍정) 기록한 자료를 추리로(가설) 번복할(부정)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빈치 코드라는 추리소설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신학을 배우지 않은 역사가가 교회사의 자료를 다룬다 해도, 그는 교회사가가 될 수 없다. 신학적인 지식 없이는 교회사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일반 역사가는 교회사를 연구할 때, 교회의 신적神的 요소를 제거하고 외적 현상만을 다룰 수 있으며, 자칫 그릇된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세 후기 교회의 <대사>의 오용과 남용에 따른 이른바 <면죄부>가 그러하다. (황치헌, 교회사는 신학인가?, 2004 한국 교회사 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p. 26 참조)
또한 교회 내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될 수 있는데, 문제에 대한 종합과 결정적인 판단은 교권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한국천주교회 창설과 주역 이벽, 2007 수원교구, 간행사 참조)
나. 천진암은 우리나라 천주교신앙의 태동 장소였다.
1. 다산은 천진암이 이벽과 정약전 등이 강학을 하던 장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녹암 권철신 묘지명, 1822년> 중에 천진암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고 말한다. : 선형 정약전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적에 이벽이 눈 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놓고 경을 담론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여유당전서 2, 1985 여강출판사 , p. 613 = 講學于天眞菴走魚寺)
<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 > 에서는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고 한다. :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임시로 머물면서 강습하였는데, 그 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제잠을 외고, 정오에는 사물잠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하고 각공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여유당전서 2, 1985 여강 출판사, p.621=寓居走魚寺講學)
정약용이 정사년(1797)에 천진암에 와서 지은 시에서는 :
단오날에 둘째 형님(정약전)과 천진암에 와보니, 이벽의 독서처가 아직도 그저 있구나. (여유당 전집 1권, 1985 여강출판사, 199면 참조 = 端午日陪二兄遊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 천진소요집, 1827년>에서는 :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적에 오르내래며 놀던 길인데/
이제 지금 천진암에 다시 와보는 이 나그네의 마음은 서글퍼지네/
여기서 우리는 <붉은 잎>을 제목으로 시를 짓기도 하였었지/
여기서 호걸들과 선비들은 일찍이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였으며/
상서(중용,대학,서전,주역)를 외우고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며 익혔었지/
폐허가 된 기숙사는 잡풀만 수북이 자랐구나/
참선하며 강학하던 학원(소림)은 아주 폐쇄되었구나/
새벽에 일어나 덕목을 외우기는 지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해가 지면 그런 책들만은 꺼내서 읽어본다오/
누각 앞 도랑건너 우리가 공부하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 터인데/
그 때 이 도장 선방에서 면학 수도하던 옛 친구들은 다 죽었으니/
이 세상 어디를 간들 그 벗들 다시는 찾아서 구해올 수가 없네그려/
아, 여기서 다시 면학 강학하며 그 옛날처럼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도다/
오늘밤은 잘데 없어 걱정했는데/
불교신도회장(이포)이 우리를 받아준다니, 믿고 자야지/
설마 관가에 고발 같은 무슨 일이야 하랴? (당시 1827년 정해년 박해중)
(여유당 전서 1, 1985 여강 출판사, p. 510)
이렇게 귀양에서 풀려난(1818) 후, 1827년에 65세로 천진암을 다시 찾은 다산은, 성현의 학덕과 호걸의 기백을 갖춘 이벽께서 강학하시고 독서하시던 천진암의 강학당, 독서처, 기숙사 등이 암자와 함께 폐허가 되어 농경지화함을 못내 서글퍼하였다.
이상의 글을 살펴볼 때 한문의 번역 문제를 가지고 논할 필요도 없이, 강학은 천진암에서 있었음이 확실하다. 주어사와 함께 양쪽 모두에서 있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기억과 마음속에 남아 있는 곳은 천진암임을 알 수 있다.
2. 천진암 강학의 성격은 무엇이었나?
유학적인 공부,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공부와 실천으로 이어졌음을 다음의 글에서 알 수가 있다. :
위의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에서 본 바와 같이 숙야잠, 경재잠, 사물잠, 서명 등을 외우면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바르게 마음가짐을 하였다. 이는 유학적인 탐구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발전되어 신앙적인 명상으로 발전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렇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위의 벽위편에서 본 바와 같이 사방에서 적대자들이 그를 천주교 신자로 옭아 넣을 빌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민구, 한국천주교의 기원, 2002 국학 자료원, p. 220 참조).
< 달레, 교회사 상권> 에서는 이 강학의 성격을 신앙적인 모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 여리나 되었다. ... 연구회는 10여일 걸렸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 점 한 점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서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 그런데 그 과학 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따위를 다룬 책들이었다. ...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의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 이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 이런 연구회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매우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내용이 우리에게까지 전하여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레 상, 300- 303; 여유당전서 1, 1985 여강 출판사, 시문집 p.12 贈李檗 詩 참조)
이 강학의 성격은, 유학과 서양의 과학 탐구에 그치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주일을 지키는 등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였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신앙활동이 이미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학술, 이벽전> 에서는 :
이벽이 시세 무술년(1778) 이십오세라. 수시 이성호 종학도와 현우현사 이씨 정씨네와 면학하시더라. --- 일도 광주 원앙산사에 은거하심에 도우가 중도하니 성교요지를 하필하시더라. (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2002 국학 자료원, 286 참조)
광주에 있는 원앙산사는 천진암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씨네와 정씨네가 모여서 면학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성교요지를 하필하였다 함은 강학을 하면서 聖敎要旨, 즉 신앙내용을 가르쳤다는 뜻이다.
소결론 :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청에서는 기적심사를 관면하였다. 후손들의 활기찬 신앙생활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기적의 표가 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도 다산 정약용 요한의 후손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그 후손 중에는 여러 명의 성직자들도 있다. 모두가 정씨 가문과 다산 정요한의 신앙의 결실인 셈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여 진다고 한다. 정약용이 죽음에 앞서 후손들에게 무엇을 유언하였겠는가? 그토록 가문의 몰락 때문에 천주교를 반대하던 큰 아들 정학연이, 할 수없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역사의 원칙에 따라서 결론을 내려 보자.
1. 긍정적인 사실을 근거도 없이 부정할 수는 없다. 추리 소설로 자료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공식적인 기록이 개인적인 기록에 우선한다. ( 관변서류와 공문이 보다
더 객관적이다)
3. 가까운 자료가 우선한다. - 시기적으로 가까운 일기가, 자신을 미화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기억이 희미한 회고록보다 우선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내의 자료가 국외의 자료에 우선한다.
그러나 교회사에서는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신학자의 자료와 해석이 우선한다. 서양 선교사들의 자료라 하더라도, 한학에 능통한 수재들이 조선에 와서 20여년씩 천주교와 유교가 조선에서 만나는 과정을 연구하고, 조선 국내에 머물면서 기록한 성직자의 자료는 국내자료이다. 지금도 우리 중에는 그만큼 장기간 연구한 사람들이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므로, 양쪽 사정을 깊이 연구한 연구가의 기록이 더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교회사학은 신학으로서 사목과 결부되므로, 여러 가지 학설이 난무할
때에는 교권이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리하고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예, 교황 비오 9세의 실라부스)
이상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그릇된 편견으로 역사적인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사방의 적대자들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확실하게 드러내놓고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다산 정약용은 글자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게, 글자 속에 자신의 신앙을 감추어 놓았다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는, 수원 화성(1796년 완공)의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도 다산 정약용의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인 신부가 입국하여 새롭게 신앙생활이 활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정약용이 무언의 신앙표시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건축물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에 관하여 확실한 반대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화성의 건축물은 모두 다산 정약용의 책임 하에 완성된 작품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호교론적으로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감성에 의존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성직자들은(특히 천진암이 있는 수원교구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바로 알고, 천주교의 뿌리를 확실히 연구하면서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으며, 올바르게 알려야 할 것이다. < 김 학렬 요한 A. 신부 >
다산의 한평생
이 책은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완역한 것이다. 사암(俟菴)은 정약용의 호(號)이다. 정약용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다산(茶山)이라는 호 이외에도 열수(洌水), 사암(俟菴), 탁옹(籜翁),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등 여러개의 호를 가지고 있는데 다산 자신은 그중에서 사암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자찬묘지명」에서도 자신의 호를 ‘사암’으로 밝혀놓았다. ‘俟菴’은 『중용』 제29장의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것인데 이 구절은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俟]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500여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술은 백세 뒤의 성인이 보더라도 한점 의혹이 없을 만큼 당당하다는 자부심을 나타낸 호이다. 『사암선생연보』는 다산의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이 1921년에 편찬했다. 대개의 문집에는 저자의 연보, 행장(行狀), 묘지명 등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가계(家系)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다산의 문집에는 연보도 행장도 묘지명도 없다. 이 글들은 일반적으로 저자 사후에 그 자손이 작성하거나 자손이 남에게 부탁해서 작성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다산 사후에 연보나 행장이나 묘지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산 자신이 생전에 방대한 분량의 「자찬묘지명」을 작성해놓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찬묘지명」이 있으니 별도의 묘지명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자찬묘지명」에는 그 어떤 연보나 행장 못지않게 자신의 행적과 업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사실상의 연보나 행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사암선생연보
1762년(영조 38, 1세) 6월 16일 사시(巳時)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4남 1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압해(押海)로, 압해는 나주의 속현이므로 나주 정씨라고도 한다. 관명(冠名)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鏞)ㆍ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ㆍ다산(茶山)이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변고로 시파에 가담하였다가 벼슬을 잃은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귀향할 때 출생하였기 때문에 자를 귀농(歸農)이라고도 했다.
1763년(영조 39, 2세) 완두창(豌豆瘡)을 앓았다.
1765년(영조 41, 4세)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67년(영조 43, 6세) 부친인 정재원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하자 그곳에 따라가 부친의 교육을 받았다.
1768년(영조 44, 7세) 오언시를 짓기 시작했다. ‘산’이라는 제목의 시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진주공(晉州公 : 다산의 아버지)이 그의 명석함에 놀랐다.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 위에 흔적이 남아 눈썹이 세 개로 나누어지자 스스로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다. 《삼미자집》이 있는데, 이는 10세 이전의 저작이다.
1770년(영조 46, 9세) 모친 해남 윤씨가 죽었다.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다.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다산의 외증조부가 된다.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공재를 많이 닮았다. 다산이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라 하였다.
1771년(영조 47, 10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학했다. 이때 경서와 사서를 본떠 지은 글이 자기 키만큼이나 되었다.
1774년(영조 50, 13세) 두시(杜詩)를 본떠 시를 지었는데, 부친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1776년(영조 52, 15세) 관례를 치르고 풍산 홍씨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했다. 이때 진주공이 호조좌랑이 되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살림집을 세내어 서울 남촌에 살았다.
1777년(정조 1, 16세) 선배 이가환과 자형 이승훈을 추종하여 성호(星湖)이익(李瀷)의 유고를 보고 사숙했다. 진주공의 임소인 화순으로 따라갔다. 청주, 전주 등지를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
1778년(정조 2, 17세) 전남 화순의 동복현에 있는 물염정(勿染亭)과 광주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했다. 겨울에 둘째형 약전과 함께 화순현에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하며 《맹자》를 읽었다.
1779년(정조 3, 18세) 진주공의 명으로 공령문(功令文)을 공부했고,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에 선발되었다. 손암 정약전이 녹암 권철신을 스스로 모셨는데, 기해년(녹암 44세, 손암 22세, 다산 18세) 겨울 천진암(天眞庵)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며 했는데, 그 후 7년이 지나 서학에 대한 비방이 생겨, 그처럼 좋은 강학회가 다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780년(정조 4, 19세) 진주공이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서 글을 읽었다. 반학정(伴鶴亭), 촉석루(矗石樓)를 유람하며 독서하고 시를 지었다. 겨울에 진주공이 어사의 모함으로 예천군수를 사임하고 마현으로 돌아왔다.
1781년(정조 5, 20세) 서울에서 과시(科詩)를 익혔다. 7월에 딸을 낳았는데, 5일 만에 죽었다.
1782년(정조 6, 21세) 서울 창동(倉洞 : 지금의 남대문 안)에 집을 사서 살았다.
1783년(정조 7, 22세) 성균관에 들어갔다. 2월에 순조의 세자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增廣監試)에서 둘째형 약전과 함께 경의(經義)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4월에 회시(會試)에서 생원으로 합격했다. 회현방으로 이사, 재산루(在山樓)에 살았다. 9월 12일에 큰아들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1784년(정조 8, 23세)향사례(鄕射禮)를 행하고, 〈중용강의〉 80여 항목을 바쳤다. 율곡의 기발설(氣發說)을 위주로 했는데. 정조가 감탄했다. 이벽(李檗)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협(斗尾峽)을 내려가면서 서교(西敎)에 관한 얘기를 듣고 책 한 권을 보았다. 《성호사설》을 통해 상위수리(象緯數理)에 관한 책들 이외에 서양인 방적아(龐迪我)의 《칠극(七克)》, 필방제(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蠡勺)》, 탕약망(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의 책을 열람했다. 6월 16일, 반제(泮製)에 뽑혔다. 9월 28일, 정시(庭試)의 초시에 합격했다.
1785년(정조 9, 24세) 2월 25ㆍ27일, 4월 16일, 반제에 뽑혀 상으로 종이와 붓을 하사받았다. 10월 20일, 정시의 초시에 합격했다. 11월 3일, 감제(柑製)의 초시에 합격했다. 겨울 제주도에서 귤을 공물로 바쳐와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다산이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2월 1일, 임금이 춘당대에 친히 나와 식당에서 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식당명(食堂名)을 짓도록 했는데, 다산이 수석을 차지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 한 질을 하사받았다.
1786년(정조 10, 25세) 2월 4일, 별시(別試)의 초시에 합격했다. 7월 29일,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출생했다. 8월 6일, 도기(到記 : 식당장부)의 초시에 합격했다.
1787년(정조 11, 26세) 1월 26일, 3월 14일, 반제에 수석으로 뽑혔다. 《국조보감(國朝寶鑑)》 한 질과 백면지(白綿紙) 1백 장을 하사받았다. 8월 21일, 반제에 뽑혔고, 8월 성균관 시험에 합격했다. 《병학통(兵學通)》을 교지와 함께 하사받았다. 12월, 반제에 뽑혔고, 다산은 과거 보는 일을 그만두고 경전의 뜻을 궁구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아마도 임금이 무인(武人)으로 등용할 뜻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1788년(정조 12, 27세) 1월 7일, 반제에 합격했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임금을 뵈오니 책문(策文)이 몇 수인가를 물었다. 3월 7일, 반제에 수석 합격하여, 희정당에서 임금을 뵈오니 초시와 회시의 회수를 질문했다.
1789년(정조 13, 28세) 1월 7일, 반제에 합격했다. 임금이 4번 초시를 본 것을 확인하고 급제하지 못함을 민망히 여겼다. 3월, 전시(殿試)에 나가서, 탐화랑(探花郞)의 예로써 7품관에 부쳐져서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되었다. 5월에 부사정(副司正)으로 옮겼고, 6월에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다. 이해 문신의 시험에 수석을 5번, 수석에 비교된 것이 8번이었다. 각과문신(閣課文臣)으로 울산 임소로 진주공을 찾아뵈었다. 겨울에 주교(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었는데, 다산이 그 규제(規制)를 만들어 공(功)을 이루었다. 12월에 셋째 아들 구장(懼牂)이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 29세) 2월 26일, 한림회권(翰林會圈)에서 뽑혔고, 29일에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뽑혀 예문관 검열(檢閱)에 단독으로 제수되었다. 3월 8일, 해미현(海美縣)으로 정배(定配)되었다. 13일에 배소(配所)에 이르렀는데, 19일에 용서받아 풀려났다. 5월 3일, 예문관 검열로 다시 들어가고, 5일에 용양위(龍驤衛)의 부사과(副司果)로 승직되었다. 7월 11일,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9월 10일,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무과감대(武科監臺)에 나아갔다.
1791년(정조 15, 30세) 5월 23일,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0월 22일,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시경의(詩經義)〉 800여 조를 지어올려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임금이 그 책에 대해서 비지(批旨)를 내리기를 “널리 백가를 인용하여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무궁하니, 참으로 평소 학문이 축적되어 해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훌륭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겨울에는 호남에서 진산사건(珍山事件 : 辛亥邪獄으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목만중, 이기경, 홍낙안 등이 공모하여 서교(西敎)에 빠진 자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했다.
1792년(정조 16, 31세) 3월 22일, 홍문관록(弘文館錄)에 뽑혔으며, 28일 도당회권(都堂會圈)에서 뽑혀, 29일 홍문관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남인 가운데서 사간원ㆍ사헌부의 관직을 이을 사람을 채제공과 상의하였다. 다산이 28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올리니 그 가운데 8명이 먼저 두 부서에 배치되었다. 4월 9일, 진주 임소에서 진주공의 상(喪)을 당했다. 5월, 충주에 반장(返葬)하고, 마현으로 돌아와 곡했다. 광주(廣州)에 여막을 짓고 거처했다. 겨울에 수원성의 규제를 지어 올렸고,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려서 4만 냥을 절약하였다.
1793년(정조 17, 32세) 4월에 소상(小祥)을 지내고 연복(練服)으로 갈아 입었다. 여름에 화성 유수로 있던 채제공이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
1794년(정조 18, 33세) 6월에 삼년상을 마쳤다. 7월 23일, 성균관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 8월 10일, 비변랑(備邊郞)에 임명하는 계(啓)가 내렸다. 10월 27일, 홍문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가 28일 수찬에 제수되었다. 12월 7일, 경모궁(景慕宮 : 정조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神位를 모시던 궁)에 존호(尊號)를 추존해 올릴 때 도감(都監)의 도청(都廳 : 우두머리)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 34세) 1월 17일, 사간원 사간(司諫)에 제수되었다.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2월 17일, 병조 참의에 제수되어, 임금이 수원으로 행차할 때 시위(侍衛)로서 따랐다. 3월 3일, 의궤청(儀軌廳)찬집문신(纂輯文臣)으로 계하(啓下)되었고, 규영부(奎瀛府) 교서승(校書承)으로 부임할 것을 명받았다. 3월 20일,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攷)》의 찬술과 원소(園所 : 장헌세자의 능인 顯隆園의 터)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고, 이가환ㆍ이만수ㆍ윤행임 등과 합작하였다. 4월에 규영부 교서직에서 이윽고 정직(停職)되었다. 이는 일종의 악당들이 헛소문을 선동하여 모함하고 헐뜯고 간사한 꾀를 썼기 때문이다. 다산이 이때부터 가슴속에 우울한 마음이 있었다. 마침내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 교서를 하지 아니하였다. 7월 26일, 주문모입국사건으로 금정도(金井道 : 洪州에 있는 지명) 찰방(察訪)으로 외보(外補)되었다. 이때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 성호 이익의 증손)에게 청하여 온양의 석암사(石巖寺)에서 만났는데, 당시 내포(內浦)의 이름 있는 집 자제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날마다 수사(洙泗)의 학(學)을 강학하고, 사칠(四七)의 뜻과 정전(井田)의 제도에 대해서 물었으므로 별도로 문답을 만들어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지었다. 성호유고를 가져다 처음 《가례질서(家禮疾書)》로부터 교정했다. 《퇴계집》 반 부를 가져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바로 그가 남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은 뒤에 아전들의 인사를 받았다. 정오가 되면 연의(演義) 1조(一條)씩을 수록(隨錄)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였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 하였으니, 모두 33칙(則)이다. 12월 20일, 용양위 부사직으로 옮겨졌다.
1796년(정조 20. 35세) 10월에 규영부 교서가 되었다. 《사기영선(史記英選)》의 제목과 《규운옥편(奎韻玉篇)》의 범례에 자문했다. 이만수 등과 더불어 《사기영선》을 교정했다. 12월 1일,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고, 3일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다음날 좌부승지에 올랐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옮겨졌다.
1797년(정조 21, 36세) 3월 대유사(大酉舍)의 향연에 참석하고 춘추경전(春秋經傳)을 교정했다. 이서구ㆍ김조순과 함께 두시(杜詩)를 교정했다. 교서관(校書館)에 입직(入直)하면서 《춘추좌씨전》을 교정했다. 6월 22일, 좌부승지를 사퇴하는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렸다. 윤윤 6원 2일, 곡산 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홍역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처방을 기록한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완성했다.
1798년(정조 22, 37세) 4월, 《사기찬주(史記纂註)》를 올렸다. 겨울에 곡산의 좁쌀, 콩을 돈으로 바꾸어 올리라는 영(令)을 철회하여 주도록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오례의도척(五禮儀圖尺)》과 실제 척이 달라서 척을 바로잡았다. 종횡표를 만들어 호적, 군적을 정리했다.
1799년(정조 23, 38세) 2월에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았다. 4월 24일, 내직으로 옮겨져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상경 도중인 5월 4일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부호군에 옮겨졌다. 입성(入城)한 5월 5일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초도둔우계(椒島屯牛啓)〉를 올렸다. 10월에 조화진과 충청감사 이태영이 이가환, 정약용과 주문모 밀입국을 보고한 한영익 부자를 서교에 탐닉하였다고 상주하였는데, 정조는 무고라고 일축하였다. 12월에는 《춘추좌전》의 세서례(洗書禮) 때 어제시(御製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 이 달에 넷째 아들 농장(農牂)이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 39세) 봄에 다산은 세로(世路)가 위험하다고 느껴 전원으로 돌아갈 계획을 결단하였다.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였다. 겨울에 졸곡(卒哭)을 지낸 뒤 열수(洌水 : 한강의 상류로 다산의 고향을 말함) 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에 다산은 초천(苕川)의 별장으로 돌아가 형제가 함께 모여 날마다 경전을 강(講)하고, 그 당(堂)에 ‘여유(與猶)’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해에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가 이루어졌다.
1801년(순조 1, 40세) 2월 8일, 사간원의 계(啓)로 인하여 9일 하옥되었다. ‘책롱사건(冊籠事件)’의 발단이었다. 19일 만인 2월 27일에 출옥되어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손암(巽菴)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3월에 장기에 도착하여 《이아술(爾雅述)》 6권과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분실되었다. 여름에 성호가 모은 1백 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 지은 《백언시(百諺詩)》가 이루어졌다.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손암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11월, 다산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손암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1802년(순조 2, 41세) 큰아들 학연이 와서 근친(覲親)하였다. 겨울에 넷째 아들 농장이 요절했다는 소식이 왔다.
1803년(순조 3, 42세) 봄에 〈단궁잠오(檀弓箴誤)〉가 이루어졌다. 여름에 〈조전고(弔奠考)〉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예전상의광(禮箋喪儀匡)〉이 이루어졌다.
1804년(순조 4, 43세) 봄에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가 이루어졌다.
1805년(순조 5, 44세) 여름에 〈정체전중변〉(일명 〈기해방례변〉) 3권이 이루어졌다. 겨울에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다. 이에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나가 밤낮으로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혹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그가 질문한 것을 답변하여 기록해 놓았는데, 모두 52칙이었다. 이를 이름하여 〈승암문답(僧菴問答)〉이라고 하였다.
1807년(순조 7, 46세) 5월에 장손(長孫) 대림(大林)이 태어났다. 7월에 형의 아들 학초(學樵)의 부음을 받고 묘갈명을 썼다. 《상례사전(喪禮四箋)》 50권이 완성되었다. 겨울에 〈예전상구정(禮箋喪具訂)〉 6권이 이루어졌다.
1808년(순조 8,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주역》의 어려운 부분을 들추어 〈다산문답〉 1권을 썼다. 봄에 둘째 아들 학유가 방문했다. 여름에 가계(家誡)를 썼다. 겨울에 〈제례고정(祭禮考定)〉이 이루어졌다. 또 《주역심전(周易心箋)》이 이루어졌다. 〈독역요지(讀易要旨)〉 18칙을 지었고 〈역례비석(易例比釋)〉을 지었다. 〈춘추관점(春秋官占)〉에 보주(補注)를 냈다. 〈대상전(大象傳)〉을 주해했다. 〈시괘전(蓍卦傳)〉을 주해하였다. 〈설괘전(說卦傳)〉을 정정하였다. 《주역서언(周易緖言)》 12권이 이루어졌다.
1809년(순조 9, 48세) 봄에 〈예전상복상(禮箋喪服商)〉이 이루어졌다. 《상례외편(喪禮外篇)》 12권이 완성되었다. 가을에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산록(刪錄)했다. 내용은 《모시강의(毛詩講義)》 12권을 첫머리에 놓고, 따로 《시경강의보유》 3권을 지었다.
1810년(순조 10, 49세) 봄에 《관례작의(冠禮酌儀)》ㆍ《가례작의(嘉禮酌儀)》가 이루어졌다. 봄, 여름, 가을에 3차례 가계(家誡)를 썼다. 9월에 큰아들 학연이 바라를 두드려 억울함을 상소했기 때문에 특별히 은총이 있었으나, 홍명주의 상소와 이기경의 대계(臺啓)가 있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했다. 겨울에 《소학주관(小學珠串)》이 이루어졌다.
1811년(순조 11, 50세) 봄에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겨울에 〈예전상기별(禮箋喪期別)〉이 이루어졌다.
1812년(순조 12, 51세) 봄에 《민보의(民堡議)》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이 완성되었다. 〈아암탑문(兒菴塔文)〉을 지었다.
1813년(순조 13, 52세) 겨울에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가 이루어졌다. 이 책은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이해 겨울에 완성했는데 40권이다. 이강회(李綱會), 윤동(尹峒)이 도왔다. 《논어》에 대해서는 이의(異義)가 워낙 많아서 〈원의총괄(原義總括)〉 표를 만들어 〈학이(學而)〉 편에서부터 〈요왈(堯曰)〉 편까지의 원의를 총괄한 것이 175조가 된다. 춘추삼전(春秋三傳)이나 《국어》에 실린 공자의 말을 모아 한 편을 만들어 책 끝에 붙였는데, 〈춘추성언수(春秋聖言蒐)〉 63장이 그것이다.
1814년(순조 14, 53세) 4월에 장령(掌令) 조장한(趙章漢)이 사헌부에 나아가 특별히 대계(臺啓)를 정지시켜, 죄인명부에서 그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때 의금부에서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석방시키려 했는데 강준흠(姜浚欽)의 상소로 막혀서 발송하지 못했다. 여름에 《맹자요의(孟子要義)》가 이루어졌다. 가을에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이 이루어졌다.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이 이루어졌다. 《중용강의보》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대동수경(大東水經)》이 이루어졌다. 또 이여홍(李汝弘 : 汝弘은 李載毅의 字)의 편지에 답하여 학문과 사변의 공(功)을 논했다.
1815년(순조 15, 54세) 봄에 〈심경밀험(心經密驗)〉과 〈소학지언(小學枝言)〉이 이루어졌다.
1816년(순조 16, 55세) 봄에 《악서고존(樂書孤存)》이 이루어졌다. 6월, 손암(巽菴)의 부음을 들었다. 손암의 묘지명을 썼다.
1817년(순조 17, 56세) 가을에 《상의절요(喪儀節要)》가 이루어졌다. 《방례초본(邦禮艸本)》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했다. 뒤에 《경세유표》로 개명했다.
1818년(순조 18, 57세) 봄에 《목민심서》가 이루어졌다. 여름에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 2권이 이루어졌다. 8월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관문(關文)을 발하여 다산을 떠나 14일 비로소 열수의 본집으로 돌아왔다.
1819년(순조 19, 58세) 여름에 《흠흠신서(欽欽新書)》가 이루어졌다. 이 책의 처음 이름은 《명청록(明淸錄)》이었는데 후에 우서(虞書)의 “흠재흠재(欽哉欽哉)” 즉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을 써서 이 이름으로 고쳤다. 겨울에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이 이루어졌다.
1820년(순조 20, 59세) 겨울에 옹산(翁山) 윤정언(尹正言)의 묘지명을 지었다.
1821년(순조 21, 60세) 봄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가 이루어졌다. 겨울에 남고(南皐) 윤참의 지범(尹參議持範)의 묘지명을 썼다.
1822년(순조 22, 61세) 이해는 다산의 회갑년이다.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윤지평 지눌(尹持平持訥)의 묘지명을 썼다. 이장령 유수(李掌令儒修)의 묘지명을 썼다. 신작(申綽)의 편지에 답하면서 육향의 제도를 논했다.
1823년(순조 23, 62세) 9월 28일, 승지(承旨) 후보로 낙점되었으나 얼마 후 취소되었다.
1827년(순조 27, 66세)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동뢰구언(冬雷求言)’으로 상소하여 다산을 참혹하게 무고하였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830년(순조 30, 69세) 5월 5일에 약원(藥院)에서 탕제(湯劑)의 일로 아뢰어 부호군(副護軍)에 단부(單付)되었다. 그때 익종(翼宗 : 순조 아들)이 위독하여 약원(藥院)에서 약을 논의할 것을 청했다. 약을 달여 올리기로 했는데, 채 올리기도 전 6일 세상을 떠났다.
1834년(순조 34, 73세) 봄에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改修)하고 합하여 모두 21권으로 만들었다. 가을에 다산에 있을 때 《상서》를 읽으면서 매색(梅賾)의 잘못된 이론을 잡아서 논술했던 《매씨서평(梅氏書平)》을 개정했다. 순조의 환후가 급해 명을 받들고 12일에 출발했는데 홍화문(弘化門)에서 초상이 있음을 듣고 이튿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36년(헌종 2, 75세) 2월 22일 진시(辰時)에 열상(洌上)의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쳤다. 이 날은 다산의 회혼일(回婚日)이어서 족친(族親)이 모두 왔고 문생(門生)들이 다 모였다. 장례 절차는 모두 유명(遺命) 및 〈상의절요(喪儀節要)〉를 따랐다. 이에 앞서 임오년(1822) 회갑 때 공이 조그마한 첩(帖)을 잘라 유명을 적어 두었으니 장례 절차였다. 4월 1일에 유명대로 여유당(與猶堂) 뒤편 광주(廣州)초부방(草阜坊) 마현리(馬峴里)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1910년 7월 18일에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내렸다. 다산 문집의 판본은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여유당집(與猶堂集)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본 《열수전서(洌水全書)》, 활자본으로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이 있다. 영인본으로 1985년 여강출판사가 간행한 《여유당전서》(전20책)이 있다. |
원재연(元載淵, 하상 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