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2015. 1. 25. 오전 10:30:21

글자

순조 2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1월 10일(정해) 1번째기사
사학(邪學) 엄금에 관해 대왕 대비가 하교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261) 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262)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이른바 야소(耶蘇)의 천주학(天主學)이 있었는데, 대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이야기로 현혹시켜,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윤리(倫理)를 업신여기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혔으니, 이교(異敎) 가운데 가장 윤기(倫紀)가 없는 것이었다. 그 책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더러 빠져들어 어그러지는 자가 있었으므로, 정조조에서 법으로 엄금하였었다. 그러나 아직도 법망에서 빠져 나간 여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습하여 점차 서로 오염시켜서 포청(捕廳)에 붙잡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장 B면
【영인본】 47책 354면
【분류】 *사상-서학(西學)
 
純祖 2卷, 1年(1801 辛酉 / 청 가경(嘉慶) 6年) 1月 10日(丁亥) 1번째기사
사학(邪學) 엄금에 관해 대왕 대비가 하교하다
 
○丁亥/大王大妃敎曰: “先王每謂, 正學明, 則邪學自熄。 今聞所謂邪學依舊, 自京至于畿湖, 而日益熾盛云。 人之爲人, 以有人倫, 國之爲國, 以有敎化。 今之所謂邪學, 無父無君, 毁壞人倫, 背馳敎化, 自歸於夷狄禽獸, 彼蚩蚩之氓, 漸染詿誤, 若赤子之入井, 此豈不惻然而傷心乎? 監司、守令, 仔細曉諭, 使爲邪學者, 飜然改革, 不爲邪學者, 惕然懲戒, 無負我先王位育之豐功盛烈。 而如是嚴禁之後, 猶有不悛之類, 當以逆律從事。 守令各於其境內, 修明五家統之法, 其統內如有邪學之類, 則統首告官懲治, 當劓殄滅之, 俾無遺種。 以此下敎, 自廟堂申明知委於京外。” 先是, 西洋國, 有所謂耶蘇天主之學, 蓋惑於堂獄之說, 不尊父母, 蔑理亂常, 異敎之最無倫者也。 其書自中國, 流傳於我東, 而或有浸溺詿誤者, 自正宗朝, 嚴法禁之矣。 尙有漏網餘孽, 嘯聚講習, 轉相染汙, 多有見捉於捕廳者, 故有是敎。
 
국사시간에 졸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들어온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처음에는 천구교 서적이 들어와도 그건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서의 연구대상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양반부터 중인에 평민까지 종교로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하지만 가부장적 질서를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의 조선의 지배층에게 천주교는 마음에 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특히나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거 까지 부정하는 데 더욱 그랬다.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다는 정조 때도 1791년, 정약용의 외사촌인 윤지충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천주교 교리에 따라 위패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게 알려지면서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유교국가 조선에서 천주교의 교리는 용납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럼에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늘어갔다. 급기야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하여 천주교 전파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연히 주문모는 조선 정부에게는 반체제활동을 선동하는 불온한 배후세력 정도였기에 체표대상이었고, 실제로 배교자의 밀고로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무사히 체포를 피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해주면서 선교를 계속 하엿는데,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왕실 여인에게까지도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상계군 이담의 부인, 신(申)씨와 시어머니 송(宋)씨, 다시 말하자면 은언군의 아내와 며느리가 주문모의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신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고, 주문모의 세례까지 주선한 사람은 강완숙이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천주교를 믿어 남편에게 쫓겨났지만, 아들 홍필주는 어머니를 따라 천주교를 택하고, 모자가 함게 천주교를 믿고 주문모를 숨겨주기도 하면서 송씨와 신씨에게까지 천주교의 교리를 알렸다. 송씨와 신씨가 머물던 폐궁의 나인 강경복까지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남편들이 역적으로 규정되어 몰락한 여인들이라 천주교에 더욱 쉽께 빠져들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은 정조가 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이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바로 은언군 집안을 몰락시킨 홍국영과 상계군의 역모에 관한 언문전교를 내린 정순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수렴청정과 함께 벽파가 정권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시파 중에 신자가 많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된다. 바로 1801년의 신유박해다.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등의 천주교 신자로 지목된 남인들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도망다니던 주문모는 더 이상 피하는 걸 포기하고, 관가에 자수한다. 그리고 주문모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송씨와 신씨가 주문모에게 세례까지 받은 사실이 밝혀지고, 이들 고부는 결국 사사당한다. 물론 강완숙, 강경복 등의 여인들도 참수형에 처해졌다.

당연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이 죽었다고 끌날 일이 아니었다. 이 일글 계기로 신하들은 일제히 은언군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정조 때 못 이룬 숙원(?)을 기어코 이루고 말겠다는 태세였다. 더군다나 새 국왕 순조는 아직 어리고, 은언군 집안을 몰락시킨 전교를 내린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은언군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속에서 또 한 명의 왕실여인이 가슴을 졸이고 있었으니, 바로 혜경궁 홍씨였다. 그녀의 친동생 홍낙임(洪樂任)은 정조 때 은전군 추대 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목숨만은 건졌는데, 1801년 초 탄핵 상소가 올라온 걸 시작으로 신유박해가 본격화 된 이후 은언군과 함께 '꼭 죽여야 하는 인물 공동 1위'로 지목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들과 대간들은 연일 은언군과 홍낙임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정순왕후는 쉽게 윤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을 지켜주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명분을 축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무리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도, 죽은지 1년이 안 된 선왕이 끝까지 보호한 이복동생과 외삼촌을 단숨에 죽이는 건 보기에 별로 안 좋지 않겠는가?

결국 1801년 5월, 각각 강화도와 제주도에 안치되어 있던 은언군과 홍낙임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로도 한동안은 두 사람에 연좌된 무리들을 처벌하라는 주장과, 아직 끝나지 않은 천주교 박해로 세상은 조금 더 시끄러웠다.

그리고 1804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1년 뒤 사망하면서 그녀의 정치적 지지세력인 벽파는 시파 김조순의 집권과 함께 몰락하였다. 그리고 순조는 홍낙임을 복권시켜 외할머니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하지만 은언군의 복권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
 
제주도 복음화에 족적 남겨 홍낙임·이규석 3부자 등 제주 순교자 새로 확인 홍낙임···正祖외조부로 유배중 순교 이규석부자···신축교난시 참수형 당해 제주도 복음전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경위와 대표적인 박해사건인 신축교난(辛丑敎亂)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제주도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4단계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일본 오사카에서 유럽 사신들을 만나 교리책과 가도서 등을 갖고 들어온 김복수에 의해서이고, 둘째단계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제주도에 귀양 와서 순교한 정조임금의 외삼촌 홍낙임과 역시 이때 귀양 와서 1838년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마리아)에 의해서다.

다음은 제주도 천주교 전래사와 관련된 홍낙임및 이규석 3부자(父子)의 순교 사실과 그들의 묘소에 관한 마백락(영남교회사 연구위원)씨의 글이다. 마씨는 지난 7월 제주도를 방문, 이들의 순교지와 묘소를 새로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규석 부자의 묘는 신축교난 당시 순교자들 중 유일한 유명(有名)묘소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을 계기로 성지로 개발 보존하려는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길 기대해 본다.

셋째단계는 1856년 펠릭스 베드로에 의해서 이다. 그는 홍콩에서 유학중이던 조선인 신학생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후 1858년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가족 20여명과 뱃사공 등을 입교시켰으나, 제주도의 신자집단은 병인박해(1866년)중에 전멸한 것 같다.

넷째단계는 1898년 양베드로가 육지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1899년 고향에서 전교함으로써 복음의 씨가 착실히 뿌리내리고 자라났다.

1899년 말 페이네신부와 김원영 아우구스띠노신부가 제주도에 부임해 포교활동과 성사 집행을 하였다. 1901년 봄까지 신자수 2백42명에 예비신자는 7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주읍과 한논에는 성당이 설립되고 2개 고소가 설립되었다.

 

신축년敎亂



바로 그해 신축교난이 일어나 외교인들과 신자들의 충돌로 신자 7백여 명, 외교인 2백여 명이 순교하는 큰 박해가 일어났다. 박해의 원인은 봉건사회의 말기에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중의 외침이 엉뚱하게 천주교 신자들과의 충돌로 발전된데 있다.

그리고 한반도 지배를 위해 불란서 선교사들을 축출하려는 과정에서 일본이 비밀 상무사를 결성하도록 도와 교회를 박해했다.

아울러 신부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의 태도가 도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토착민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교회가 사들인 땅에 있는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마구 쓰러버림으로써 토착민들과의 엄청난 갈등을 빚었다.

필자는 지난 7월 제주도에 가서 1801년 신유박해 때 귀양가서 약을 받은 홍낙임의 순교지와 정난주의 묘, 영세준비를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 귀양간 추사 김정희의 배소와 신축교난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과 대정현의 순교자 이규석과 2명의 자녀 무덤을 모슬포본당 신자들의 안내로 새로 확인했다.

이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홍낙임과 이규석3부자의 순교사실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순교자 홍낙임



그는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정조임금의 외조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영의정 홍봉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769년 정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 되었으며 정언, 문학, 사서를 거쳐 승지의 벼슬에 올랐다.

그가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윤행림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권고로 춘주교에 입교하여 권상현과 윤지충의 제사문제로 일어난 1791년 신해 박해 때 그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풍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1800년 정조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영의정 심환지등의 상소로 사학의 괴수라 하여 그해 1801년 4월 제주도로 유배되어 다음 달인 5월 29일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그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은언군인(恩彦君絪)의 부인 신마리아, 또 자부인 송마리아가 강완숙(골롬바)의 권고로 천주교를 믿고, 또 한 주문모신부를 폐궁에 잠시 피신시켰던 것이 발각되어 그도 같은 날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았다. 홍낙임이 신자가 아니라 억울하게 신자로 몰려 반대파의 탄핵으로 희생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1791년 신해박해 때 그의 형제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풍설이 있다는 혜경궁 홍씨(그의 누님)읍혈록과 현재 서울교구 대방도본당 신자인 홍석심(베드로)씨가 『저의 7대조인 홍낙임께서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이 문중에서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천주교 신자였음이 확실하다. 그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을 정조의 어머니이며 그의 누님인 혜경궁 홍씨의 주선으로 제주도에서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문봉산에 있는 문중(問中)산에 묻었다.

 

이규석과 두 아들



순교한 이규석(본명미상)은 고부 이씨 12대 손으로 1845년 이수형의 아들로 제주도 대정현에서 태어났다. 큰 부자였던 이규석은 물려받은 재산을 자선사업을 위해서 희사했다. 그의 집안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빼이네 배신부와 김원영 아우구스띠 노신부가 제주도에서 전교할 때부터 열심한 신자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즉 당시 대정현의 천주교회당으로 중문 색달리(서귀포시 여재동)에 공소를 차리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01년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당시 먼 친척이며 대정현의 관노비였던 교난의 선봉장인 이재수가 1901년 4월 15일에 『이풍헌 천주교를 믿겠느냐. 안 믿겠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자『난 죽어도 좋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해 그의 목을 쳤다. 그러자 그의 아들들이 달려들어 말렸으나 이재수는 큰 아들이 기문과 셋째 아들 이기만, 넷째아들 이기생도 차례로 목을 쳐서 순교 시켰다.

그런데 큰 아들 이기만은 크게 다쳐 죽은 듯 했으나 다시 살아나서 밤중에 처가가 있는 중문으로 가서 치료를 해 살아났다.

현재 세분의 순교자 묘소는 모슬포읍에서 동남쪽 7백 미터 지점에 있는 동글 동산 옆의 밭뚝에 묻혀있다. 그가 처형된 장소는 모슬포읍내 북쪽에 있는 노른 고지 동산이었다.



1901년 신축교난때 신앙을 증거하다 참수형으로 순교했던 이규석과 두아들이 묻혀있는 묘소앞에서 모슬포본당 신자와 함께한 필자(左).



마 백 락

<영남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조선시대 유배문화천주교에 물든 자를 가만히 놔둘 수 없다!

천주교에 물든 자를 가만히 놔둘 수 없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인데, 당초에 사서(邪書)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일찍이 보고서 찬미하였으나 중간에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정약전·정약용은 죽음은 면하였으되 다음가는 중형으로 정약전은 강진의 신지도에, 정약용은 장기현에 유배를 갔다.

원천자료 보기

신유박해가 일어나 서학을 신봉한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조리 하옥되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이다.

사헌부에서 국문하였는데, 이가환이 진술하기를 “일찍이 이승훈의 집에서 사학의 서책을 빌려 왔는데, 거기에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칼로 긁어서 지워 버리고, 다시는 가져다 보지 않았습니다.”하고 결백을 주장하였다.

끝내 결백을 주장하다가 홍낙임과 오석충 두 사람을 끌어대고는 옥중에서 죽었다.


권철신은 곧 권일신의 형인데, 천주를 신봉하였으며 옥중에서 죽었다. 이승훈은 그 아비 이동욱을 따라 중국에 간 다음 북경의 천주당에 가서 구경하다가, 서양인과 교유를 맺고 그가 증여한 서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사학을 널리 배포하였다. 사형에 처하여졌다.

정약종은 한결같이 곧바로 사학을 정도라고 하며 천주의 화상을 만들어 놓고 7일마다 예배하며 이르기를, ‘천주는 대군(大君)이고 대부(大父)이다. 하늘을 섬길 줄 모르면 살아 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선조에게 제사지내고 분묘에 배알하는 것은 모두 죄과라고 하였다. 사형에 처하여졌다.

최필공은 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후에 곧 전교되었는데, 전에 끌려와 스스로 살길을 찾아 다시는 학습하지 않겠다고 진술하였다.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였으나 오히려 개전하지 않아 다시 잡혀왔다.

지금 추국하는 데에서는 ‘이제 죽기로 결심하였다. 천주학은 식견이 있고 지각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를 해야 하니, 나는 결단코 개혁할 마음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사형에 처하여졌다.

이존창은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옥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진술을 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무리를 불러 모아 호서지방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하여 사형시켜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홍교만은 사학의 서책과 예수의 초상화 및 의식 도구 등을 모두 그 집에 모아 놓고 경전을 인용하여 겉만 그럴 듯하게 꾸며 서학은 요사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형에 처하여졌다.

홍낙민은 처음에는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올렸으나, 마침내는 옛 소굴을 연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깊이 현혹시키고 교유하여 호남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감히 꾸짖어 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형에 처하여졌다.

최창현은 본래 천인으로서 사학의 서책에 고혹되어 정약종·권철신 등을 대부로 존숭하고 이승훈·강노파를 교주로 일컬었다. 마귀의 화상을 그려서 몰래 서로 선사하고 이단의 무리들을 숨겨 주고 간사한 꾀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형륙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결안을 써서 바쳤으므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인데, 당초에 사서(邪書)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일찍이 보고서 찬미하였으나 중간에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국청에 나아가기에 이르러서는 차마 형을 끌어들이지 못하였는데,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그 무리가 서로 왕복하는 즈음에 정약용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한 것과 그 집안 사이에 왕래를 금한 것과 같은 것으로 뉘우쳤음을 증험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최초로 물든 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지목한 바 되었으므로, 정약전·정약용은 죽음은 면하였으되 다음가는 중형으로 정약전은 강진의 신지도에, 정약용은 장기현에 유배를 갔다.

<순조실록 1년 2월 26일조(신유)>

 

순조 2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2월 3일(기유) 2번째기사
영의정 심환지가 행 부호군 오재소의 승진을 요청하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행 부호군 오재소(吳載紹)는 선왕조(先王朝)에서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셨을 때에 이미 비옥(緋玉)321) 으로 승진하였었고, 또 문학(文學)이 뛰어났으며, 행 부호군 박장설(朴長卨)은 지나간 해에 한 소장(疏章)으로서 맨 먼저 사학(邪學)을 공박(攻駁)하여 도를 호위한 공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아경(亞卿)322) 에 승탁(陞擢)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2장 B면
【영인본】 47책 363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상(思想)

 

純祖 2卷, 1年(1801 辛酉 / 청 가경(嘉慶) 6年) 2月 3日(己酉) 2번째기사

○領議政沈煥之啓言: “行副護軍吳載紹, 在先王朝代聽之時, 已陞緋玉, 而且有文學。 行副護軍朴長卨, 向年一疏, 首攻邪學, 實有衛道之功。 請竝亞卿陞擢。” 從之。

 

 

111.jpg

 
[심상훈의 부자팔자(父子八字)] 출사(出仕) 접은 이익(李瀷), 실학 세상을 펼치다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할아버지 이용휴가 외손주 허질에게 ➀
심상훈 고전경영연구가 | ylmfa97@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9.19 17:04:21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能知足者 天不能貧(능지족자 천불능빈) : 만족함을 아는 자는 하늘이 가난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자풀이] 能 능할 능, 知 알 지, 足 발 족, 者 놈 자, 天 하늘 천, 不 아닐 불, 貧 가난할 빈

 

‘상우(尙友)’라는 말이 있다. 언어의 마술사인 맹자가 한 말로 ‘옛사람과 친구가 된다’라는 그런 뜻으로 쓰인다. 고전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하편’에 나온다.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송기시 독기서 부지기인 가호 시이논기세야 시상우야)

‘그 사람의 시를 읽고, 그 사람의 저서를 읽고,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논하는 것이며, 이것을 상우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라는 문인이 있었다. 18세기 조선의 문인 사회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문단의 영수였다. 다음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차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박지원’ 세 글자를 잘 기억하고 있지만, ‘이용휴’ 세 글자는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집(燕巖集)>이 워낙 사람들에게 유명해서다. 저작물 유통이 잘된 까닭이리라.

2005년 10월 10일, 나는 처음 이용휴를 알았다. 우연히 <나를 돌려다오>(이용휴·이가환 지음, 안대회 옮김, 태학사 펴냄)라는 책에서 만났다.

최고 명문가의 피는 못 속인다

이용휴는 조선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여주(驪州)(지금의 경기도 여주)다. 여주는 조선 때 ‘여흥(驪興)’이라고 했다. 이용휴의 집안은 대대로 글을 잘 썼다. 시인, 서예가, 화가, 작가, 학자, 즉 문인들이 많았다.

조선이 창건되기 전에 이 땅엔 고려가 먼저 있었다. 고려 최고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도 따지자면 ‘여주 이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집안은 17세기 조선에 접어들면서 대쪽 같은 성정에 맞는 관직인 사헌부(司憲府), 형조(刑曹)의 벼슬을 얻는 후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왕이 머무는 궁궐(조정)과 위치가 가까운 정릉(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옹기종기 모여서 살게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세인들은 ‘정릉 이씨’라고도 불렀다. 아무튼 정릉 이씨는 당대엔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다.

이용휴의 증조부는 이지안(李志安, 1601~1657)이다. 지안은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은 정릉 이씨 집안의 명성을 최고로 떨친 인물로, 사헌부 최고 지위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을 지냈다. 숙종과 장희빈의 궁합이 좋았을 때 말이다.

그러다가 1680년(숙종 6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났다. 경신대출척은 남인들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경신환국). 왕에게 밉상이 된 남인에 속한다는 이유로 이하진은 대사헌에서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는데 서인의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681년 우리땅 최북단인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를 가서 다음해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진은 시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붓을 들면 곧장 몇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명필이었다고도 전한다. 다행히 하진의 재능을 아꼈던 숙종(1685)에 의해 명예가 복권되었다. 아무튼 하진은 이용휴의 친할아버지가 된다. 비교적 이른 나이(55세)에 죽었기에 이용휴는 생전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었다. 그저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할아버지 전설에 기대어 이하진을 그리워했고 상상했을 것이다.

이하진이 평안도 운산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옆에서 수발을 거든 사람이 있다. 후처(後妻) 권씨로, 이 시기에 권씨는 임신한 몸이었고 유배지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이하진의 5남으로 족보에 오른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이다. 이익은 이용휴의 친부 이침(李沈)의 동생이 되므로 이용휴에게 있어서는 숙부인 셈이다.

생전에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났던 친부(이하진)의 영향 탓일까. 막내인 이익을 포함해 슬하의 5형제-해(瀣)·잠(潛)·서(漵)·침(沈)-는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장남 해는 시(詩)에 뛰어났고 차남 잠은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삼남 서는 서예가 발군이었다. 지금도 현존하는 해남 윤씨 고택의 ‘녹우당(綠雨堂)’ 현판 글씨는 동국진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장남부터 3남까지 셋은 이하진의 전처(前妻) 이씨의 소생이다. 4남 침은 후처 권씨가 낳았다. 이침은 자세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문학에 뛰어났다고 짐작할 뿐이다. 이침은 이용휴의 아버지로 이익의 바로 위 형이다. 이익은 5형제 중에 가장 유명해졌다. 그는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고 성취가 뛰어났다. 이익의 대표작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지금도 읽히고 있으며 고전으로 가치가 높다.

이익의 생부 이하진은 경기도 안산 출생이다. 1678년 이하진은 조선 조정의 사신으로 뽑혀 중국(청나라) 연경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귀국할 때 수천 권의 서적을 사가지고 오는 바람에 안산 집에 작은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도서관은 후처 권씨가 관리했다.

이잠(李潛, 1660~1706)은 이하진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21세에 정릉 집을 떠나 안산 첨성리(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모(권씨)를 극진히 모셨다. 도서관도 이잠에게 맡겨졌다. 이잠은 학문 성취도가 빨랐는데, 이미 1675년 16세 나이로 사마시를 치러 진사로 당당히 합격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하진은 이잠이 빠르게 성취를 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잠은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 일을 맡아 안산에서 공부만 했다.

동생 이익은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 병약했다. 이런 까닭에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은 둘째 형 이잠의 몫이었다. 만일 이잠이 재야에서 학문에만 오롯이 정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18세기 조선을 빛내는 최고의 석학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앙의 당쟁에 휘말리고 만다.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지어 왕에게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화근이 돼 서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곧 역적이 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형신(刑訊)은 끔찍했는데 그 횟수가 17, 18차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몸이 버티질 못했고, 결국 이잠은 47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옥사(獄死)하였다.

둘째 형의 옥사는 이익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25세 때 과거시험의 뜻을 완전히 비우고 학문에만 전념한다. 첨성리 성호(星湖)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날마다 공부만 했다.

이렇듯 학문에 매진하던 이익이 35세가 되면서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어린 조카들을 거뒀다. 또 스승이 되었다. 이익이 47세가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당시 이익은 학자로서 명성이 조선에서 최고였다. 이 때문에 조정(1723, 영조 3년)은 이익에게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란 벼슬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익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욕심을 비웠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조카 이용휴는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출사의 마음을 모조리 비워낸다.

조부-삼촌-조카로 이어진 성호학파(星湖學派) 조선의 인문 숲 이루다

용휴(用休)는 같은 항렬을 쓰는 사촌 동생인 병휴(秉休)와 맹휴(孟休)와 함께 10여 년을 숙부 이익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배웠다. 이름의 휴(休) 자는 항렬로 돌림자(譜名)다.

돌림자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원칙을 준수한 것이다. 오행상생법이란 일테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의 역학원리를 말한다.

여주 이씨의 돌림자를 이용휴의 할아버지때부터 살펴 보자. 할아버지 이하진은 ‘진(鎭)’ 자가 돌림자다. 아버지 이침은 ‘水(물 수)=氵(삼수 변)’ 자가 항렬이다. 아들 이용휴는 ‘휴(休)’ 자가 돌림자다. 이용휴의 둘째 아들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환(煥)’ 자 항렬을 따랐다. 다음 돌림자로는 ‘재(載)’가 쓰였다. 따라서 5대가 각각 ‘鎭(金)→沈(水)→休(木)→煥(火)→載(土)’ 식으로 오행상생법 원리가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청나라)으로부터 사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덕분에 아들 이익은 당시 조선의 석학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당쟁에 휩싸여 정치적 희생양이 되자, 막내인 이익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 일체 벼슬의 뜻을 비웠다. 덕분에 집안에 참화(慘禍)의 바람이 멎었다. 가주이자 스승의 역할을 하던 훌륭한 삼촌(이익)을 둔 덕분에 조카 용휴, 병휴, 맹휴는 문학, 경학(經學) 등을 발전시켰다. 18세기 조선의 인문 숲이 푸르게 무성해졌다.

또한 이익 조카들의 아들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구환(李九煥)과 이삼환(李森煥)이 경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학(과학)과 지리학은 과거에 급제한 이가환(李家煥)과 이중환(李重煥)이 선두주자가 되어 빛냈다.

그러나 아버지(이용휴)와 작은 할아버지(이익)에게서 ‘비움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이가환은 서학과 문학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신유박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또 이용휴의 친척 조카로 나이도 19살이나 많았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병조좌랑으로 승승장구하다 노론에 의해 1726년(영조 2년) 유배지로 떠난다.

 

여주이씨(정릉이씨)

이지안(李志安, 1601~1657)이다. 지안은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은 정릉 이씨 집안의 명성을 최고로 떨친 인물로, 사헌부 최고 지위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을 지냈다. 숙종과 장희빈의 궁합이 좋았을 때 말이다.

이지안 - 이하진 - 경신대출척으로 진주목사로 좌천 -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어 죽다.

 

이하진의 전처 소생 해(瀣)·잠(潛)·서(漵)·

후처 권씨의 소생 침(沈)-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이다

이익의 생부 이하진은 경기도 안산 출생이다. 1678년 이하진은 조선 조정의 사신으로 뽑혀 중국(청나라) 연경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귀국할 때 수천 권의 서적을 사가지고 오는 바람에 안산 집에 작은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도서관은 후처 권씨가 관리했다.

 

이잠(李潛, 1660~1706)은 이하진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21세에 정릉 집을 떠나 안산 첨성리(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모(권씨)를 극진히 모셨다. 도서관도 이잠에게 맡겨졌다. 이잠은 학문 성취도가 빨랐는데, 이미 1675년 16세 나이로 사마시를 치러 진사로 당당히 합격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하진은 이잠이 빠르게 성취를 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잠은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 일을 맡아 안산에서 공부만 했다.

 

동생 이익은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 병약했다. 이런 까닭에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은 둘째 형 이잠의 몫이었다. 만일 이잠이 재야에서 학문에만 오롯이 정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18세기 조선을 빛내는 최고의 석학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앙의 당쟁에 휘말리고 만다.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지어 왕에게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화근이 돼 서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곧 역적이 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형신(刑訊)은 끔찍했는데 그 횟수가 17, 18차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몸이 버티질 못했고, 결국 이잠은 47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옥사(獄死)하였다.

 

둘째 형의 옥사는 이익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25세 때 과거시험의 뜻을 완전히 비우고 학문에만 전념한다. 첨성리 성호(星湖)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날마다 공부만 했다.

이렇듯 학문에 매진하던 이익이 35세가 되면서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어린 조카들을 거뒀다. 또 스승이 되었다. 이익이 47세가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당시 이익은 학자로서 명성이 조선에서 최고였다. 이 때문에 조정(1723, 영조 3년)은 이익에게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란 벼슬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익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욕심을 비웠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조카 이용휴는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출사의 마음을 모조리 비워낸다.

 

조부-삼촌-조카로 이어진 성호학파(星湖學派) 조선의 인문 숲 이루다

용휴(用休)는 같은 항렬을 쓰는 사촌 동생인 병휴(秉休)와 맹휴(孟休)와 함께 10여 년을 숙부 이익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배웠다. 이름의 휴(休) 자는 항렬로 돌림자(譜名)다.

돌림자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원칙을 준수한 것이다. 오행상생법이란 일테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의 역학원리를 말한다.

여주 이씨의 돌림자를 이용휴의 할아버지때부터 살펴 보자. 할아버지 이하진은 ‘진(鎭)’ 자가 돌림자다. 아버지 이침은 ‘水(물 수)=氵(삼수 변)’ 자가 항렬이다. 아들 이용휴는 ‘휴(休)’ 자가 돌림자다. 이용휴의 둘째 아들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환(煥)’ 자 항렬을 따랐다. 다음 돌림자로는 ‘재(載)’가 쓰였다. 따라서 5대가 각각 ‘鎭(金)→沈(水)→休(木)→煥(火)→載(土)’ 식으로 오행상생법 원리가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청나라)으로부터 사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덕분에 아들 이익은 당시 조선의 석학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당쟁에 휩싸여 정치적 희생양이 되자, 막내인 이익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 일체 벼슬의 뜻을 비웠다. 덕분에 집안에 참화(慘禍)의 바람이 멎었다. 가주이자 스승의 역할을 하던 훌륭한 삼촌(이익)을 둔 덕분에 조카 용휴, 병휴, 맹휴는 문학, 경학(經學) 등을 발전시켰다. 18세기 조선의 인문 숲이 푸르게 무성해졌다.

또한 이익 조카들의 아들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구환(李九煥)과 이삼환(李森煥)이 경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학(과학)과 지리학은 과거에 급제한 이가환(李家煥)과 이중환(李重煥)이 선두주자가 되어 빛냈다.

그러나 아버지(이용휴)와 작은 할아버지(이익)에게서 ‘비움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이가환은 서학과 문학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신유박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또 이용휴의 친척 조카로 나이도 19살이나 많았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병조좌랑으로 승승장구하다 노론에 의해 1726년(영조 2년) 유배지로 떠난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