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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知足者 天不能貧(능지족자 천불능빈) : 만족함을 아는 자는 하늘이 가난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자풀이] 能 능할 능, 知 알 지, 足 발 족, 者 놈 자, 天 하늘 천, 不 아닐 불, 貧 가난할 빈
‘상우(尙友)’라는 말이 있다. 언어의 마술사인 맹자가 한 말로 ‘옛사람과 친구가 된다’라는 그런 뜻으로 쓰인다. 고전 <맹자(孟子)>의 ‘만장(萬章) 하편’에 나온다.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송기시 독기서 부지기인 가호 시이논기세야 시상우야)
‘그 사람의 시를 읽고, 그 사람의 저서를 읽고,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논하는 것이며, 이것을 상우라고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라는 문인이 있었다. 18세기 조선의 문인 사회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문단의 영수였다. 다음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차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박지원’ 세 글자를 잘 기억하고 있지만, ‘이용휴’ 세 글자는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연암집(燕巖集)>이 워낙 사람들에게 유명해서다. 저작물 유통이 잘된 까닭이리라.
2005년 10월 10일, 나는 처음 이용휴를 알았다. 우연히 <나를 돌려다오>(이용휴·이가환 지음, 안대회 옮김, 태학사 펴냄)라는 책에서 만났다.
최고 명문가의 피는 못 속인다
이용휴는 조선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여주(驪州)(지금의 경기도 여주)다. 여주는 조선 때 ‘여흥(驪興)’이라고 했다. 이용휴의 집안은 대대로 글을 잘 썼다. 시인, 서예가, 화가, 작가, 학자, 즉 문인들이 많았다.
조선이 창건되기 전에 이 땅엔 고려가 먼저 있었다. 고려 최고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도 따지자면 ‘여주 이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이 집안은 17세기 조선에 접어들면서 대쪽 같은 성정에 맞는 관직인 사헌부(司憲府), 형조(刑曹)의 벼슬을 얻는 후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왕이 머무는 궁궐(조정)과 위치가 가까운 정릉(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옹기종기 모여서 살게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세인들은 ‘정릉 이씨’라고도 불렀다. 아무튼 정릉 이씨는 당대엔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다.
이용휴의 증조부는 이지안(李志安, 1601~1657)이다. 지안은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은 정릉 이씨 집안의 명성을 최고로 떨친 인물로, 사헌부 최고 지위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을 지냈다. 숙종과 장희빈의 궁합이 좋았을 때 말이다.
그러다가 1680년(숙종 6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났다. 경신대출척은 남인들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경신환국). 왕에게 밉상이 된 남인에 속한다는 이유로 이하진은 대사헌에서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는데 서인의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681년 우리땅 최북단인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를 가서 다음해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진은 시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붓을 들면 곧장 몇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명필이었다고도 전한다. 다행히 하진의 재능을 아꼈던 숙종(1685)에 의해 명예가 복권되었다. 아무튼 하진은 이용휴의 친할아버지가 된다. 비교적 이른 나이(55세)에 죽었기에 이용휴는 생전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었다. 그저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할아버지 전설에 기대어 이하진을 그리워했고 상상했을 것이다.
이하진이 평안도 운산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옆에서 수발을 거든 사람이 있다. 후처(後妻) 권씨로, 이 시기에 권씨는 임신한 몸이었고 유배지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이하진의 5남으로 족보에 오른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이다. 이익은 이용휴의 친부 이침(李沈)의 동생이 되므로 이용휴에게 있어서는 숙부인 셈이다.
생전에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났던 친부(이하진)의 영향 탓일까. 막내인 이익을 포함해 슬하의 5형제-해(瀣)·잠(潛)·서(漵)·침(沈)-는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장남 해는 시(詩)에 뛰어났고 차남 잠은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삼남 서는 서예가 발군이었다. 지금도 현존하는 해남 윤씨 고택의 ‘녹우당(綠雨堂)’ 현판 글씨는 동국진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장남부터 3남까지 셋은 이하진의 전처(前妻) 이씨의 소생이다. 4남 침은 후처 권씨가 낳았다. 이침은 자세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문학에 뛰어났다고 짐작할 뿐이다. 이침은 이용휴의 아버지로 이익의 바로 위 형이다. 이익은 5형제 중에 가장 유명해졌다. 그는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고 성취가 뛰어났다. 이익의 대표작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은 지금도 읽히고 있으며 고전으로 가치가 높다.
이익의 생부 이하진은 경기도 안산 출생이다. 1678년 이하진은 조선 조정의 사신으로 뽑혀 중국(청나라) 연경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귀국할 때 수천 권의 서적을 사가지고 오는 바람에 안산 집에 작은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도서관은 후처 권씨가 관리했다.
이잠(李潛, 1660~1706)은 이하진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21세에 정릉 집을 떠나 안산 첨성리(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모(권씨)를 극진히 모셨다. 도서관도 이잠에게 맡겨졌다. 이잠은 학문 성취도가 빨랐는데, 이미 1675년 16세 나이로 사마시를 치러 진사로 당당히 합격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하진은 이잠이 빠르게 성취를 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잠은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 일을 맡아 안산에서 공부만 했다.
동생 이익은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 병약했다. 이런 까닭에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은 둘째 형 이잠의 몫이었다. 만일 이잠이 재야에서 학문에만 오롯이 정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18세기 조선을 빛내는 최고의 석학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앙의 당쟁에 휘말리고 만다.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지어 왕에게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화근이 돼 서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곧 역적이 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형신(刑訊)은 끔찍했는데 그 횟수가 17, 18차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몸이 버티질 못했고, 결국 이잠은 47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옥사(獄死)하였다.
둘째 형의 옥사는 이익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25세 때 과거시험의 뜻을 완전히 비우고 학문에만 전념한다. 첨성리 성호(星湖)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날마다 공부만 했다.
이렇듯 학문에 매진하던 이익이 35세가 되면서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어린 조카들을 거뒀다. 또 스승이 되었다. 이익이 47세가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당시 이익은 학자로서 명성이 조선에서 최고였다. 이 때문에 조정(1723, 영조 3년)은 이익에게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란 벼슬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익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욕심을 비웠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조카 이용휴는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출사의 마음을 모조리 비워낸다.
조부-삼촌-조카로 이어진 성호학파(星湖學派) 조선의 인문 숲 이루다
용휴(用休)는 같은 항렬을 쓰는 사촌 동생인 병휴(秉休)와 맹휴(孟休)와 함께 10여 년을 숙부 이익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배웠다. 이름의 휴(休) 자는 항렬로 돌림자(譜名)다.
돌림자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원칙을 준수한 것이다. 오행상생법이란 일테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의 역학원리를 말한다.
여주 이씨의 돌림자를 이용휴의 할아버지때부터 살펴 보자. 할아버지 이하진은 ‘진(鎭)’ 자가 돌림자다. 아버지 이침은 ‘水(물 수)=氵(삼수 변)’ 자가 항렬이다. 아들 이용휴는 ‘휴(休)’ 자가 돌림자다. 이용휴의 둘째 아들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환(煥)’ 자 항렬을 따랐다. 다음 돌림자로는 ‘재(載)’가 쓰였다. 따라서 5대가 각각 ‘鎭(金)→沈(水)→休(木)→煥(火)→載(土)’ 식으로 오행상생법 원리가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청나라)으로부터 사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덕분에 아들 이익은 당시 조선의 석학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당쟁에 휩싸여 정치적 희생양이 되자, 막내인 이익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 일체 벼슬의 뜻을 비웠다. 덕분에 집안에 참화(慘禍)의 바람이 멎었다. 가주이자 스승의 역할을 하던 훌륭한 삼촌(이익)을 둔 덕분에 조카 용휴, 병휴, 맹휴는 문학, 경학(經學) 등을 발전시켰다. 18세기 조선의 인문 숲이 푸르게 무성해졌다.
또한 이익 조카들의 아들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구환(李九煥)과 이삼환(李森煥)이 경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학(과학)과 지리학은 과거에 급제한 이가환(李家煥)과 이중환(李重煥)이 선두주자가 되어 빛냈다.
그러나 아버지(이용휴)와 작은 할아버지(이익)에게서 ‘비움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이가환은 서학과 문학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신유박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또 이용휴의 친척 조카로 나이도 19살이나 많았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병조좌랑으로 승승장구하다 노론에 의해 1726년(영조 2년) 유배지로 떠난다.
여주이씨(정릉이씨)
이지안(李志安, 1601~1657)이다. 지안은 형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은 정릉 이씨 집안의 명성을 최고로 떨친 인물로, 사헌부 최고 지위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을 지냈다. 숙종과 장희빈의 궁합이 좋았을 때 말이다.
이지안 - 이하진 - 경신대출척으로 진주목사로 좌천 -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어 죽다.
이하진의 전처 소생 해(瀣)·잠(潛)·서(漵)·
후처 권씨의 소생 침(沈)-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이다
이익의 생부 이하진은 경기도 안산 출생이다. 1678년 이하진은 조선 조정의 사신으로 뽑혀 중국(청나라) 연경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귀국할 때 수천 권의 서적을 사가지고 오는 바람에 안산 집에 작은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도서관은 후처 권씨가 관리했다.
이잠(李潛, 1660~1706)은 이하진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21세에 정릉 집을 떠나 안산 첨성리(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모(권씨)를 극진히 모셨다. 도서관도 이잠에게 맡겨졌다. 이잠은 학문 성취도가 빨랐는데, 이미 1675년 16세 나이로 사마시를 치러 진사로 당당히 합격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 이하진은 이잠이 빠르게 성취를 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잠은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 일을 맡아 안산에서 공부만 했다.
동생 이익은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 병약했다. 이런 까닭에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은 둘째 형 이잠의 몫이었다. 만일 이잠이 재야에서 학문에만 오롯이 정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18세기 조선을 빛내는 최고의 석학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앙의 당쟁에 휘말리고 만다.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지어 왕에게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화근이 돼 서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곧 역적이 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형신(刑訊)은 끔찍했는데 그 횟수가 17, 18차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몸이 버티질 못했고, 결국 이잠은 47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옥사(獄死)하였다.
둘째 형의 옥사는 이익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25세 때 과거시험의 뜻을 완전히 비우고 학문에만 전념한다. 첨성리 성호(星湖)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날마다 공부만 했다.
이렇듯 학문에 매진하던 이익이 35세가 되면서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은 어린 조카들을 거뒀다. 또 스승이 되었다. 이익이 47세가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당시 이익은 학자로서 명성이 조선에서 최고였다. 이 때문에 조정(1723, 영조 3년)은 이익에게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란 벼슬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익은 일체 응하지 않았다. 욕심을 비웠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조카 이용휴는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출사의 마음을 모조리 비워낸다.
조부-삼촌-조카로 이어진 성호학파(星湖學派) 조선의 인문 숲 이루다
용휴(用休)는 같은 항렬을 쓰는 사촌 동생인 병휴(秉休)와 맹휴(孟休)와 함께 10여 년을 숙부 이익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배웠다. 이름의 휴(休) 자는 항렬로 돌림자(譜名)다.
돌림자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원칙을 준수한 것이다. 오행상생법이란 일테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의 역학원리를 말한다.
여주 이씨의 돌림자를 이용휴의 할아버지때부터 살펴 보자. 할아버지 이하진은 ‘진(鎭)’ 자가 돌림자다. 아버지 이침은 ‘水(물 수)=氵(삼수 변)’ 자가 항렬이다. 아들 이용휴는 ‘휴(休)’ 자가 돌림자다. 이용휴의 둘째 아들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환(煥)’ 자 항렬을 따랐다. 다음 돌림자로는 ‘재(載)’가 쓰였다. 따라서 5대가 각각 ‘鎭(金)→沈(水)→休(木)→煥(火)→載(土)’ 식으로 오행상생법 원리가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청나라)으로부터 사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덕분에 아들 이익은 당시 조선의 석학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아버지와 형들이 당쟁에 휩싸여 정치적 희생양이 되자, 막내인 이익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 일체 벼슬의 뜻을 비웠다. 덕분에 집안에 참화(慘禍)의 바람이 멎었다. 가주이자 스승의 역할을 하던 훌륭한 삼촌(이익)을 둔 덕분에 조카 용휴, 병휴, 맹휴는 문학, 경학(經學) 등을 발전시켰다. 18세기 조선의 인문 숲이 푸르게 무성해졌다.
또한 이익 조카들의 아들 세대에 이르러서는 이구환(李九煥)과 이삼환(李森煥)이 경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학(과학)과 지리학은 과거에 급제한 이가환(李家煥)과 이중환(李重煥)이 선두주자가 되어 빛냈다.
그러나 아버지(이용휴)와 작은 할아버지(이익)에게서 ‘비움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이가환은 서학과 문학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신유박해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또 이용휴의 친척 조카로 나이도 19살이나 많았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2)도 24세에 과거에 급제해 병조좌랑으로 승승장구하다 노론에 의해 1726년(영조 2년) 유배지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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