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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5. 오후 4:19:25

글자

 

 

 若鍾之文跡

형제와 함께 학(學)을 익힐 수 없으니, 자기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又謂不能與兄弟同學, 莫非己罪云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일컬은 강거능파(姜巨能巴)라는 자는 곧 반족(班族)의 여인으로

若鍾文書中所稱姜巨能巴者, 卽班孽女人

乃是洪文甲爲名漢之母也云

 

이 현(아우구스띠노)

이 현(李鉉․야고보 : 문초 기록에는 安순이라는 교명으로 나온다)은 1801년 5월 11일(음력 3월 29일)에 순교한 이희영(李喜英․루가)의 조카이며, 훗날 순교한 홍익만(洪翼萬․안또니오)의 사위이기도 하다. 기록상으로는 그의 고향이나 어렸을 적의 행적, 입교 동기 등에 관하여 자세히 나타나지 않으니, 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문초 기록에서 볼 때 그는 입교한 후에 교우들과 연락을 하면서 교회의 일을 돕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숙부 이희영(루가)이 여주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이웃에서 생활할 때 야고보는 그곳에 왕래하면서 요사팟과 여러 차례 상봉하여 교회의 일을 논의하였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홍문갑(洪文甲)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만나 보았으며, 그 집에서 있은 교리 강습이나 첨례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깊이 사귀던 교우들은 정광수(鄭光受), 홍정호(洪正浩), 김종교(金宗敎), 최필제(崔必悌․베드로) 등이었다. 그러던 중 신유 교난이 일어나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그도 곧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야고보는 여러 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심을 지켜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러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혹은 5월 22일)이었다.

 

강경복(수산나)


강경복은 은언군의 부인인 송(宋) 마리아와 그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유폐(幽閉)되어 있었던 폐궁 나인(廢宮內人)이었으며, 교명은 선아(仙娥 : 수산나?)였는데, 1801년 5월 22일에 정법(正法)대로 참수당하여 순교(殉敎)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의 문초기록에는 그녀가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게 된 것은 홍문갑(洪文甲)의 어머니에게서라고 한다. 강경복 궁녀는 이렇게 알게된 천주교의 교리와 그것에 관한 학문이 너무 좋아서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신앙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대개 강경복이 입교하게 된 때는 1797년 8월경이다. 송 마리아의 거처인 폐궁에서 천주교를 알고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때부터 그녀는 홍씨의 집을 거쳐 강완숙(姜完淑)에게로 인도됐고 강완숙은 또 주문모 신부에게 그녀를 인도하여 폐궁 두 왕가(王家) 부인들과 접촉하게 했으며, 강경복은 강완숙과 왕래하면서 모든 연락을 주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그녀는 항상 강완숙과 왕래하면서 친지라고 자칭하였고 주 신부에게서 ‘수산나’라는 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강경복은 폐궁에 유폐되어 있던 은언군의 부인과 그 며느리들을 강완숙의 집으로 인도하여 첨례를 보고 주 신부의 강론에 참예할 수 있도록 했으며, 마침내는 세례를 받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를 폐궁에 은밀히 감추어 드리기도 했다.

그 해 정월에는 부친의 대상이 있었는데,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치 못했다. 대상에 참석하고 온 조카가 홍가(洪家)에 와서 체류하고자 하므로 그녀 역시 그 곳에서 여러 날 유숙했다. 이때 포교들이 당도하자, 그녀는 밖으로 나와 체포되었고 포청으로 갔다. 그녀의 문초 기록에 의하면 ꡒ그녀는 천주학에 깊이 맛들이고 그것을 정도(正道)라고 인식했으며, 폐궁에 주 신부를 숨겨 두고 영세와 본명을 받아 온전한 마음과 몸으로 천주를 섬기면서 그 마음이 견고하고 변함이 없어 모든 형벌을 기쁘게 참아 받고ꡓ그렇게 그녀는 순교했던 것이다.

 

꾸짖었으며,57) 洪文甲의 장인인 洪翼萬은 주 신부와 주야로 담론하고. 친분이 두터웠을 뿐 아니라 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는데도 폐제를 하. 지 않았고,58) 南必容의 ... 

 

이익 허목 윤휴의 영향

그들의 학문을 이해 혼자 습득

 

달레의 천주교회사 1777년 주어사 강학회

정약용 1779 천진암

한번이 아니고 여러차례 장소도

1776년영조 52년  권철신 녹암계

아들2대 - 손자()3대 - 증손()4대 - 고손(), 현손()5대 - 내손()6대 - 곤손()7대 - 잉손()8대 - 운손()

 

1910 년 (융희 4, 庚戌 )

7월 18일 특별히 정헌대부 (正憲大夫 ) 규장각 제학 을 추증하고

문도공(文度公) -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것을 文이라 하고

                        일을 처리함에 義에 맞는 것을 度라 한다.

문도공의 시호를 내렸다.

 

조서에 이르기를 "엣 승지 정약용은 문장과 경제가 일체에 탁월하여

마땅히 조가의 표창하는 일이 있어야 하기에 특별히

정3품 규장각 제학을 추증하여 절혜의 은전을 베푸노라." 했다.

 

1796년 (정조 20, 丙辰) 35세 

정월에 오사 이정운이 금백이 되었다.

임금이 승지 이익운에게 말하기를 

"정 아무개가 계책을 써서 도적을 잡았으니, 그 일은 민멸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계략도 마땅히 드러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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