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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2. 오후 12:03:21

글자

 1789년 말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李性源을 正使로 한 進賀 兼 謝恩冬至使가 북경에 파견될 때,

사행을 수행하는 마부 자리를 은자 20냥에 구입하여 함께 갔다.

及至己酉年冬 有一以二十兩銀子 買使行中私持馬名色一

그는 북당을 방문하여 이승훈의 편지를 로오(Raux)신부에게 전달했다.

로오 신부는 곧 당시 북경의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의 사정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구베아 주교는 기쁨에 넘쳐 즉시 조선의 신입 교우들에게 보내는

사목서한을 작성하였다. 그는 서한에서 훗날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약속했다.

 

유관검의 1801 신문

"대저 주문모를 영입하는 계책은 '이가환 홍낙민, 이승훈, 지황' 등이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1790 년 9월에 康熙帝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聖節進賀 兼 謝恩使行 편에 윤유일을 다시

파견하였다.  이 때에 왕실의 관리로 使行의 일원인 吳某가 북경에서 요한 세자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받았다. 

 

교황 비오 6세는 구베아 주교의 의견을 받아들여

1792년 4월 1일자로 구베아주교에게 조선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후 조선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될 때까지 북경 주교의 사목지역이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1790년 10월경 마카오 태생의 중국인 요한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es Remedios 吳) 신부의 조선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는 1791년 2월경 북경을 출발하여 20일 동안을 걸어서 조선의 국경 지대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지사 일행이 귀환하는 길에 장이 설 때 조선교우들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교우들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한편 윤유일도 변문에서 기다렸으나 불행하게도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레메디오스 신부는 열흘이 지나고 장이 끝날 때까지 조선교우를 만나지 못하자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후 조선에서는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고 변방의 경계도 심해져 선교사 영입운동을 추진할 수 없었다. 

 

북경 구베아 주교는 3년동안 조선으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고,  1792년 사신 행차를 따라왔던 사람들에 의해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메디오스 신부는 1793년 세사을 떠났다. 1793년 중인층 신도들은 선교사 영입운동을 재개하였다. 

1793년 동지겸사은사가 파견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지황은 商買를 가장하여  

 

1794. 12. 3 (양력 1795. 1. 3) 주문모 신부는 의주 변뭄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황을 비롯한 조선 신도들의 안내로 조선 복장으로 갈아입고 동지사행의 환국에

때를 맞추어 입국하였다. 그는 신도들과 함께 의주에서 서울로 이동하였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역부로 가장하였다.  이동 과정에서 일반 여관집에 머물렀다. 12일간을 걸은 뒤 12월 14일(양력 1795년 1월 14일) 서울에 들어왔다.

 

백서

주문모 신부는 1796년 겨울에 황심을 동지사행에 동행시켜 구베아 주교에게 파견하였다.

황심은 1797년 1월 28일 북경에 도착하여 두 통의 서간, 즉 라틴어로 쓴 주문모  신부의 서간과 조선신도들이 연명한 한문으로 된 비단 서간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연례보고서

1797년 (정사년)동지사행  중국입국 1798(무오년) 황심

1799년(기미년) 동지사행 중국입국 1800(경신년) 황심과 옥천희

1800년(경신년) 동지사행 중국입국 1801(신유년) 옥천희

1801년(신유냔) 4월 入燕  중국 6월 입국 옥천희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종식시키고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에 밀사를 파견, 서양 선교사와 함께 서양 선박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 조정을 경악케 했다.



'대박청래사건'으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주문모 신부와 6월1일 순교한 김건순(요사팟)의 심문 과정에서 그 사실의 일부가 밝혀졌다. 이에 조정은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개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유중태, 윤지헌, 황심, 옥천희 등 연루자 체포작전에 돌입했다.



의금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대박청래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인 1794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경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파견하기 위해 400냥이라는 거금을 낸 유항검과 조선 천주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1794년 주 신부가 서양 선박을 타고 윤유일과 함께 입국하기 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1796년 북경에 황심(토마스)을 파견했을 때도 유관검 일행은 이미 서양의 큰 배가 와서 조정과 '일장판결'을 본 후라야 신부가 안전하고 천주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북경교구에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대박청래는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전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 신부는 1796년, 1798년, 1800년 등 3차례에 걸쳐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 황심과 김유산(토마), 옥천희를 파견, 조선교회에 대한 박해 상황과 조선인의 성품, 풍습, 법률, 정치, 종교 등에 관해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대박청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신부는 대박청래를 요구한 이유에 대해 "수학과 의술을 갖춘 선교사들이 수행하는 포르투갈 여왕의 사절(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포교권을 위임받은 나라가 포르투갈이기 때문)을 조선 왕에게 파견하여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와 우호 조약을 맺도록 간청하는 것이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주문모 신부의 사형 집행과 관련해 김 대왕대비를 비롯한 조정 중신들 사이에 격론이 있었던 사실?밝혀졌다. 나라가 금하는 천주교의 최고 중심 인물을 처벌하는 데 있어 조정 대신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것은 주 신부가 중국인이기 때문.



김 대왕대비는 지난 4월24일 의금부에 자수한 주 신부가 심문과정에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때부터 조정 대신들과 주 신부 처리 문제를 한 달여간 신중하게 논의해 왔다. 일부 대신들이 "주 신부를 본국으로 돌려 보내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영의정 심환지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 영부사 이병모 등은 "그가 이미 조선에 입국한지 오래고 국법을 어겼기 때문에 어느 나라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고, 속히 군문으로 하여금 일률(一律)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대왕대비는 "소국(小國)에서 대국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도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매우 불가한 일이며 군법을 쓴다면 함부로 대국 사람을 죽였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묻고 "모름지기 만분의 일이라도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김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중론이 주 신부 처형으로 기울자 5월15일 어영대장 신대현에게 주 신부를 군문효수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신대현은 병을 핑계로 3일간 출근하지 않자 김 대왕대비는 그를 사임시키고 18일자로 신대겸을 신임 어영대장으로 임명했다.



신대겸은 노론 출신으로 1765년 무과에 급제, 길주 목사, 평안· 함경 병사, 삼도 수군 통제사, 포도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신임 어영대장 신대겸은 김 대왕대비의 명을 받아 5월31일 주 신부의 군문효수형을 집행했다.



한편 조정이 주문모 신부를 사형체 처한 후 청나라에 발송한 토사주문(討邪奏文)에는 주문모의 의복이나 언어 및 외양이 조선인과 동일했고 외국인으로 알아보게 할 만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1801년 3월 12일 의금부에 자현 (자헌) 하였다.

의금부에서 3회에 걸친 신문을 받고 1801년 4월 19일 (양력 5월 31일)

어영청(?)에서 군율에 따라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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