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서울을 둘러싼 4배도(陪都) 중의 하나로서 유사시에는 국왕의 피난처로서 보장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1795년 이후 광주유수부의 최고 책임자인 유수를 비롯하여 중군, 판관 등의 관리와 군관, 포교, 아전 등의 거처인 공해(公廨)가 있었는데, 《여지도서》에는 행궁(行宮 231칸), 좌전(左殿 29칸), 우실(右室 4칸), 군향창사(軍餉倉舍 924칸), 객사(客舍36칸), 관아(123칸), 향청(16칸), 주사(11칸), 작청(27칸), 군기청(12칸), 관청(11칸), 종각(6칸), 형옥(21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 행궁의 상궐 왼편 담밖에 위치한 좌승당(坐勝堂)은 1817년(순조17) 유수 심상규(沈象奎)가 행궁에서 집무하는 것이 불편하여 별도로 집무처를 건립한 곳이다. 성 한복판 북쪽 산 밑에 수어군을 훈련하고 지휘하던 본부로서 수어영(守禦營)이 있었으니, 연무당(鍊武堂), 연병관(鍊兵館)이라고도 했다. 행궁 옆에 있는 이아(二衙)는 판관의 공식 집무실이었고, 제승헌(制勝軒)은 판관의 숙소라고 여겨지며, 연병관 옆의 작은 두 채의 건물은 남녀로 구분된 형옥(刑獄)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연무관 바로 오른 편의 큰 건물이 중군이나 판관이 죄인을 다스리던 정청(正廳)으로서의 군뢰청(軍牢廳)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신문을 받고, 온갖 고문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한편 연무관과 현 성당 사이의 주차장이 장터로서, 때로는 사형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로타리 남동쪽 개천가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고 신문하던 포도군관, 포리, 포졸들이 근무하던 포도군관청이 있었다.
(퍼옴)
2015. 3. 13. 오전 7: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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